소설리스트

〈 11화 〉3. 시작이 시작되기 전에 - 05 (11/201)



〈 11화 〉3. 시작이 시작되기 전에 - 05

“...약혼 취소라.”

상당히 서프라이즈한 소식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에게서 그 소식을 듣기 전과 똑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라가 내게 파혼을 신청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의 전 약혼자이신 사라 세르나드나 나의 아버지인 프란츠 폰 에스텔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사실이겠지만, 사실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사람은 10년 뒤 미래에서 회귀한, 일종의 미래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말인  슨, 사라 세르나드와 약혼 했다는 사실에 광분하여 그녀를 향한 시를 휘갈기거나 혹은 첫째 아이의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망상이나 하던 그 병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회귀자 카인 폰 에스텔은 그런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를 할 만큼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미래에서 쌓아온 연륜의 짬밥은 뒷구멍으로 쳐 먹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정적으로 사라가 나에게 파혼을 신청하는 일은 회귀 전에도 일어난 일이었다.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께는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그 소식을 들으며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말을 들은 수준의 감상 밖에 들지 않았다.

뭐, 그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회귀 전에는 사라가 에스텔 공작령을 떠나고 나서 나에게 파혼 신청서를 보내기 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이곳을 떠난 지 고작해야 2주 만에 파혼 신청서가 날라 왔다. 아무래도 아리아가 내 침대 위에 누워있던 것을 목격한 것이 사라가 단호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지대한 공헌을 해준  같다.

“그야 어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와 질질 짠다고 해서 파혼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도 아닐지 언데.”

“호오, 상당히 의외구나. 나는 평상시 네 태도로 미루어볼 때 그 편지를 붙들고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버지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자 가슴 한 구석이 뜨끔하며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사실, 회귀 전에는 사라의 편지를 붙들고 질질 짰었던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나약했던 카인 폰 에스텔 따위, 비앙카와 황녀의 지속적인 갈굼을 받고 가루가 된지 오래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은 1년간의 갈굼을 이겨낸 끝에 마음이 강철보다 더욱 단단해진 새로운 카인폰 에스텔이었다.

“헌데 당당하기도 하구나. 내가 알기로 사라 그 아이가 파혼을 신청한 원인은 전부 네게 있다고 들었는데.”

“네? 그건 또 무슨...?”

“넌 내가 듣는 귀도 없는  아느냐?”

아버지는 나를 향해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을 하셨다.

“내 이곳으로 오는 길에 전부 다 들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 아이를 납치하다가 억지로 겁간하였다면서? 그 아이의 뱃속에 에스텔 공작가의 후계자가 잉태되었다는 것이 정녕 사실이더냐?”

“.....”

대체 왜  근거도 없는 엿같은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살이 붙어가는 것일까. 게다가 임신이라는 설정은 나도 오늘 처음 들어본다. 아무래도 중간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들이 듣는 이들의 흥미를 위해 많은 설정을 덧붙여나간 모양이다. 덕분에 아리아의 손목조차 잡아보지 않은 나는 어느새 한 아이의 아버지가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야, 덕분에 내 너를 다시 보았다. 에스텔 공작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라는 녀석이 고작해야 여자 한 명 때문에 죽니 사니하며 염병을 떨던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더 사내다운 행동이기는 하구나. 뭐, 네가 개새끼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처한 상황이 실로 유쾌하신 것인지 연신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나가셨다.

“그래서, 내 손녀를 가졌다는 그 아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신분 차이가 막심하기는 하지만 가문의 후계자를 품은 아이를 홀대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설마 재미를 다 보았다는 이유로 성 밖으로 쫓아낸 것은 아니겠지?”

오오, 하며 일부로 과장된 어조로 말씀을 하시는아버지. 확실하다. 저 양반은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 즐거워서 어쩔  몰라 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손녀입니까? 손자는 별로 원하시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계속되는 놀림에 아니꼬워진 내가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을 하자 아버지는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받으셨다.

“만약 손자면 널 닮았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겠느냐?  같은 놈이 세상에 둘이나 있다고 생각을 하니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어서 그런다.”

“.....”

젠장, 진짜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진작 들이박았을 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죄다 헛소문입니다. 아리아와 저는 손도 잡아본 사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잠깐, 아리아라는 아이가 대체 누구냐?”

“...설명이 꽤나 길어지겠군요.”

그리 말하며 나는 내가 과거로 회귀한  있었던 일을 단 한 치의 가감도 없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특히 아리아와 나는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을 뿐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수도 없이 강조하였다. 잠시 후, 나의 설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들으신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시며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그래서, 결국은 네가  아이를 겁간했다는 말이 아니더냐?”

“...지금까지 제 말을 똑바로 듣기는 하신 것입니까?”

어째서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일까. 이 양반은 내가 한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냈던 것이 아닐까?

“전부 들었으니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겠느냐. 한 침대 위에 같이 누워있었다면서 손도 잡아보지 못했니 어쩌니 변명을 하는 것이 참으로 구질구질해 보이는구나. 그냥 사내답게 인정 하거라.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여 일을 저질렀다고.”

“.....”

...거 참, 참으로 답답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여신께 맹세코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내 말을 구라라고 여기기만 하다니.

“뭐, 이대로 너를 추궁하는 것도 재미가 있겠다만  이야기는 이쯤 접어두도록 하마. 그 얘기를 나누려고 이곳에 너를 부른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 말을 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삽시간에 진지한 표정으로 뒤바뀐다.

“내 마지막으로 너에게 물어보겠다. 사라와의 약혼, 이대로 끝을 맞이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언뜻 들으면 협박으로 들리기까지 하는 그 말에 나는 오히려 피식하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 질질 짠다고 해서 바뀌는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흐음.”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이런 문건을 당당하게 보내왔다는 것은 저쪽도 나름대로의 계산이 섰다는 증거일터. 애당초 이쪽과 어떠한 상의도 없이 이따위 편지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가문 간의 약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건수 하나 잡혔다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한다는 사실 자체가 저들의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속내?”

“그야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저희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막말로, 에스텔 공작가의 위세가 다른 4대 공작가와 같았다면 저들이 이렇게 나올 수 있었을까요?”

“...으음.”

나의 말에 아버지는 신음성을 흘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신다. 왜냐하면 나의 말이 전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파혼의 발단이  이유가 이쪽의 책임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는 것은 도를 넘은 짓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르나드 백작가가 우리를 등신으로 보고 있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세르나드 백작가의 행태는 에스텔 공작가는 무늬만 공작가일 뿐 북쪽 끝에 쳐 박혀서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는 치들이니 눈치 따위 볼 필요도 없다며 큰 소리로 떠드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까짓 거 파혼, 받아들이지요. 세상에 여자가 사라 한 명 뿐인 것도 아니고, 구차하게 자비를 구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넉넉잡아 10년  쯤에 제가 이 원한을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왜 하필 10년 뒤인 것이냐?”

왜냐하면  때쯤이면 아리아가 제국 제일의 대마법사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10년을 보내더라도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비실이는 팔다리가 작살난 오우거 하나에도 쩔쩔매는 반면 아리아는 손가락 하나로 에스텔 공작령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초월적인 강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 압도적인 강자를 부하로 거느리고 있는데 뭐하러 돈만 많은 탐욕스런 돼지새끼들의 눈치를 본단 말인가?

자고로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고 하던가. 10년 뒤의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아리아의 치마폭에 휘감긴 채로 꿀이라는 꿀은 전부 흡입할 예정이다. 그 과정에서 겸사겸사 세르나드 백작가 녀석들을 혼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뭐, 오늘 네 입에 나온 소리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소리인 것 같긴 하구나. 몇 달 전만 해도 사라 그 아이를 향해 시를 쓰니 어쩌니 하며 지랄을 하던 것보다는 훨씬 나아. 암, 에스텔 공작가의 후계자라면 이런 패기가 있어야지.”

그리 말씀하시며 아버지는 나의 변화가 진심으로 유쾌하신지 껄껄 웃음을 터트리신다. 나는 문득 아버지께서 내가 그리고 있는 청사진의 내용을 자세히 전해 듣고도 저렇게 웃음을 터트릴 수 있을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났지만 별 다른 말은 첨언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때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때도 있는 법이다-

“좋다. 네 결정이 바로 섰다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쇠뿔도 단김에 빼는 법.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확실하게 매듭을 짓자구나. 어서 짐을 싸거라. 빨리 제도(帝都)로 가보자꾸나.”

...응? 뭐라고?

“...잠시만요. 약혼을 파하는 것이랑 제도로 가는 것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어차피 세르나드 백작가 그 돼지새끼들이 파혼하자고 종이 쪼가리를  장 보내왔으니 우리도 알았다며 편지만 한 통 보내면  끝나는 일이 아닌가?  뜬금없이 제도로 가자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인가?

“아, 그러고 보니 네게  말을 하지 않았구나. 사실 에스텔 공작가와 세르나드 백작가의 약혼을 주선해주신 분이 바로 폐하이시니라. 뭐, 말 그대로 주선만 하신 것에 지나지 않다만 그래도 폐하의 체면이 있는데 약혼을 파할 것이라면 우선 그분의 허락을 맡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네?”

“그러니까  닥치고 짐이나 챙기거라. 아마 세르나드 백작가 녀석들도 지금쯤 제도로 출발하였을 것이다. 그놈들보다 한시라도 빨리 제도에 도착하려면 꽤나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내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가 새햐얗게 질리고 말았다. 제도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하나,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게 있어 제도라는 곳은 어느 무시무시한 여자가 서식하고 있는, 지옥과도 같은 장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련’이라는 명목 하에 매일같이 내 온몸을 샌드백처럼 두들긴 악마 같은 여자. 내게 ‘실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온갖 괴이한 마수를 잡아와 나를 개처럼 패버리게 한 악독한 여자.

황제의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자손, 황녀 아이리스  데브하르트.

과거로 회귀한 지 벌써 2주나 지났지만 매일 밤, 내 악몽 속에서 비앙카와 함께 단골로 출현하는 여인 중 한 명이다. 참고로 그 악몽 속에서 나는 황녀에게 쳐 맞기만 할 뿐이었다. 반항이라는 것을 하고 싶어도 마녀와의 결전 당시  한 자루로 산봉우리를 잘라버리던 그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훤하다. 나는 나의 꿈속에서조차 변변찮은 반항을 하지 못하는 등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쩔  없다. 황녀가 너무 무서운데 어쩌라고.

“...저, 아버지.”

“왜 그러느냐?”

“다시 생각해보니 사라와의 약혼, 그냥 유지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모욕 좀 당하면 어떻습니까?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런 것인데, 저희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해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

“.....”

구차해보여도 어쩔  없다. 황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줌을 지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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