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3. 시작이 시작되기 전에 - 02 (8/201)



〈 8화 〉3. 시작이 시작되기 전에 - 02

“아가씨, 혹시 자기 이름은 기억이나나요?”

도리도리.

“음, 그러면 출신 지역은요?”

도리도리.

“나이도 기억 안나요?”

끄덕끄덕.

엘레나는 하얀 머리 소녀를 향해 이것저것 물었으며 하얀 머리 소녀는 마치 강아지라도 되는 것 마냥 엘레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들었다.

그 이후 엘레나는 한참 동안 하얀 머리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제야 내 쪽을 쳐다보았다.

“음. 오라버니 말이 사실인 것 같네요. 이 여성분은 자신이 그곳에 왜 있었는지,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해요. 그렇다고 강제로 그... 어쨌든 그런 일을 당한 흔적은 없기도 하고요. 적어도  여성분도 그런 불미스러운 기억은 없다고 하는군요.”

“...믿어주니 정말로 고맙구나. 엘레나.”

나는 사라에게 맞은 오른쪽 뺨이 쓰라려오는 것을 느끼며 엘레나를 향해 한숨을 푹하고 내쉬며 그리 말을 내뱉었다. 이제 와 나의 진실이 규명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이미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나와 저 하얀 머리 여자가 같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목격한 나의 약혼녀, 사라 세르나드의 눈이 돌아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사라가 노크도 없이 나의 침실에 난입하였을 당시, 정말 불행하게도 방문을 닫지 않은 탓에그녀의 목소리가 영주성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성내에 존재하는 모든 사용인들은 사라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전부 알게 되었다.

지금 사용인들 사이에서 나에 대하여 대체 어떠한 소문이 돌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에스텔 소공작의 명예가 땅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엘레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예, 말씀하세요. 오라버니."

나의 말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나. 나는 그러한 엘레나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주며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하였다.

"부디 성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지 않게 철저히 입단속을 하라고 전해 주렴. 그런 이상한 헛소문이 널리 퍼진다면 이 오라비는 쪽팔려서 일평생 얼굴을 쳐들고 다니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에스텔 공작가는 척박하고 험난하기 이를  없는 깡촌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영지민들 위에 군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동체와 같이 함께 어울려 지낸다는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가문이었다. 어차피 힘들게 사는 것은 모두 매한가지인데 괜히 권위를 내세워봐야 아무 짝에 쓸모도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전통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를 비롯한 에스텔 공작가의 일원들은 제국의 4대 공작가 답지 않은 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좋게 말해서 소탈한 것이지, 나쁘게 본다면 귀족으로서의 권위고 위엄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였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리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길었던 것을.

그리고 현 상황에서는 에스텔 공작가의 그러한 풍조야 말로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이 아닐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 가족과도 같이 지내는 영지민들이 그런 괴상한 소문을 사실이라고 믿은 채 나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기라도 한다면 나의 연약한 심장에 막대한 타격이 올 것이 분명한 일이었으므로.

"알겠어요, 오라버니. 제가 어떻게 해서든 입단속을 해보도록 할게요."

주먹을 불끈하고 쥐며 나를 향해 호기로운 발언을 늘어놓는 엘레나였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이러한 사태가 쉬이 진압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 뿐이었다.

"...그래, 고맙구나. 엘레나. 그리고, 잠시  방에서 나가줄  있으련?"

"예? 왜 그러시나요?"

내가 갑작스럽게 축객령을 내리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엘레나.

"이 아가씨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좀 나누어보고 싶거든."

나는 아직도 비를 흠뻑 맞은 강아지 같은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는 하얀 머리 여자를 힐끔하고 가리켰다. 지금부터 저 여자와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상당히 조심스러워야 할 이야기였기에 나로서도 부득이하게 엘레나에게 축객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음, 알겠어요. 만약, 제가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를 불러주세요. 오라버니."

"그래."

그리 말을 하며 엘레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나의 방 밖으로 물러났다. 귀족가의 영애다운 깔끔한 태도였다. 어쩌면, 에스텔 공작가에서 가장 귀족다운 이는 다름 아닌 엘레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황에서는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하얀 머리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리고 어떻게 보아도 저 오밀조밀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어떠한 얼굴을 연상시킬 뿐이었다.

그렇다. 내가  얼굴을 어찌 잊어버리겠는가. 자색의 눈동자.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는 아름답기만  얼굴. 비록,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그 얼굴보다 한참이나 앳되보인 탓에 처음에는 긴가민가할 뿐이었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바라보니 저 하얀 머리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정체가 쉬이 짐작이 갈 뿐이었다.

'...겨울의 마녀.'

그렇다. 손끝에서 겨울을 피워내던,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 단신의 힘으로 원정대전체의 힘과 동수를 이룬, 틀림없는 인류 최강의 일각.

모든 것이 하얗게 표백된 세상 속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맞고 있던 마녀의 외모는 지독하게 아름다워 보였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외모에 반했다고 보아도좋았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아름다워 보였을 뿐이다.

마지막 순간, 나를 처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내 품에 안기던 그녀가 가련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비록 그녀가 세상에 끝없는 겨울을 불러왔으며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마녀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고마워.’

가슴에 칼을 꽂은 남자에게 방긋 웃으며, ‘고맙다’라는 감사를 표한 그녀를, 나는 잊어버릴 수가 없었을 따름이다.

“......”

고개를 들어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겨울의 마녀를 바라본다.

“....아, 으...”

나의 시선이 닿기 무섭게 마녀는 몸을 움츠린다. 그 모습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마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내가 알던 마녀는 이렇지 않았다. 마녀는 당당했었다.

사실, 고작해야 반나절 정도 마주친 주제에 이렇게 아는 척 하는 것도 웃기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랬었다. 내가 아는 마녀라는 여자는, 전 세계를 적으로 돌려도 당당함을 유지하던, 그런 여자였단 말이다.

“....흠.”

엘레나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마녀는 정말,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다. 아니, 기억을 잃었으니까 식후 소화거리도 되지 않는 나를 보며 이리 벌벌 떠는 것이 아닐까. 몸을 부들부들 떠는 저 모습을 보니,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사실,  강아지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 여자가 10년 뒤에 겨울의 마녀라는 거물이 된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 뿐이다.

나는 오늘만 하더라도 몇 번째 내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들이키며  앞의 여자를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정말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까?”

나의 질문에 하얀 머리 여자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으음.”

엘레나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눈 앞의 여자는 기억상실증에 걸리기라도 한  같은 멍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억상실증이라?'

옛날 이야기에서는 수도 없이 들어본 증세이기는 하였지만 나의 눈 앞에 실제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등장하다니, 어쩐지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악명 높은 겨울의 마녀가  앞에서 무해한 일반인인 척 연기를  필요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였기에 아마 높은 확률로 그녀의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마녀를 위아래로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든다. 고민하는 바의 내용은 간단하였다.

마녀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 것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자리에서 저 여자를 죽여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그러한 고민이었다.

“.....”

겨울의 마녀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무해한 일반인이 되어버린 지금이라면, 죽이는 것은 굉장히 용이하다. 그녀는 10년 뒤, 대륙에 끝나지 않은 겨울을 불러온 무시무시한 마녀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계집아이에 불과한 상태였다. 지금  가냘퍼 보이는 목에 검을 쑤셔 넣는다면, 모든 것이 끝을 맺을 것이다.

대륙에는 끝나지 않는 겨울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며, 나는 지하 감옥에 쳐 박히는 신세가 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원정대에 강제로 끌려가 1년간 개처럼 갈굼 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비앙카의 손에 에스텔 공작령의 본성이 가루가 되는  또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회귀 전과는다르게 모든 것이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을 것이 분명한 노릇이겠지.

허나 고개를내젓는다. 죽인다는 것은 가장 간단한 방법임이 틀림없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마녀를 죽여서는 안 될 이유가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번째. 나는 아까부터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본 끝에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있었다. 나는, 10년  과거로 돌아온 것이 확실하였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라에게 그토록 강렬한 싸대기를 맞았음에도 깨지 않는 것을 보니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돌아온 것인지 그 이유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

내가 자신을 쳐다보니 눈을 깜빡이며 스스로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겨울의 마녀. 그래, 저것이다. 내가 과거로 돌아오게 된 이유에는, 저 마녀가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논리도, 근거도 아무 것도 없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죽이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마녀를 죽였다가 다시 10년 뒤로 돌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이름과  명예가 땅바닥에서 개처럼 구르고 있으며, 에스텔 공작령이 가루가 되어버린 그 미래로는 되돌아가기 싫단 말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보아도 마녀라는 불안 요소를 끌어안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시대에 머물러 있는편이 백 배는 나은 선택인 것 같았다.

그리고  번째,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것인데.

“한 가지 더, 물어볼게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세요.”

여전히 내가 무섭기만 한지 조용한 어조로 답을 하는 겨울의 마녀.

“돌아갈 곳은 있습니까?”

도리도리.

“가족, 친척. 기억나는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까?”

끄덕끄덕.

좋다. 실로 완벽하다. 현재 마녀는 지연도, 혈연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비유하자면 끈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스스로가 누구인지 기억조차 잃어버린 상태. 즉, 말하자면 마녀는 에스텔 공작가에서 쫓겨난다면 마땅히 다른 곳에 갈 데도 없는 부랑자 같은 신세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가 선심이라도 쓰듯 손을 내밀어주면 대체 어떠한 감상을 품게 될 지 뻔할 뻔자가 아니겠는가?

그런 음흉한 목적을 가슴 속 깊이 감춘 채 나는 겉으로는 그녀를 위해 고심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침중한 어조로 이러한 말을 건네었다.

10년 뒤, 미래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회귀자인에스텔 공작에게 있어 이런 순진한 여자 하나를 감언이설로 꼬시는 것은 정말 일도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면, 혹시 에스텔 공작가에서 고용되어 일해 볼 생각이 있습니까?”

“...네?”

"갈 곳이 없다면, 당신을 에스텔 공작가에서 정식으로 채용할 용의도 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이번 생에는, 겨울의 마녀를 나의 충실한부하로 삼아 꿀을 빨아 본다는 장대한 계획이 그렇게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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