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2. 겨울 원정대 - 04
“구워어어어어!”
콰앙!
오우거가 휘두른 방망이에 정통으로 쳐 맞고 나가떨어진다.
저 빌어먹을 놈의 힘이 어찌나 강력한 지 분명 검으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화살이라도 되는 것 마냥 저 만치 튕겨나가고 말았다.
“푸흡. 카인, 너 진짜 엄청 약하네. 팔 부러진 오우거 한 마리도 못 당하고.”
다만, 저 만치 훨훨 날아가는 와중에도 귀에 거슬리는 비앙카의 목소리만은 귀에 쏙쏙 잘도 들어온다.
‘개 같은 년.’
나를 이 먼 곳까지 쳐서 날린 오우거에 대한 증오보다 옆에서 시누이 마냥 혀를 재잘거리는 비앙카에 대한 증오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그리고 바앙카에 대한 증오심이, 나에게 힘을 가져다준다.
끼이이익-
날아가던 와중에 다리에 힘을 줘 바닥에 그대로 착지한다.
그리고 원심력을 이용, 그대로 오우거를 향해 화살처럼 스스로의 몸을 내쏘아 돌진한다.
“구워어어어어!”
팔이 부러졌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오우거.
녀석은 내 뚝배기를 깨버리기 위해 그대로 내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내리친다.
부우웅!
허나 녀석의 몽둥이가 내 뚝배기를 깨버리기 1초 전, 나는 녀석이 어디를 노리고 있는 것인지 눈치 채고 만다.
‘우측으로 한 발짝.’
옆으로 한 발짝 걷는 것만으로도 저 무식한 몽둥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다.
콰앙!
오우거의 몽둥이가 내 머리통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적중한다.
몽둥이가 일으킨 바람에 내 머리카락이 흩날리지만 내 얼굴에 표정의 변화 따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정도로 겁을 먹고 벌벌 떨기에 지난 6개월 간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겪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녀석에게 검이 닿는 영역까지 스스로 다가간다.
녀석의 역겨운 숨결이 나에게 와닿는다. 녀석과 눈이 마주한다. 나를 향한 살기를 지니고 있는 눈을 마주하니 오금이 저린다. 하지만 두려움을 떨쳐내며, 나는 그대로 오우거의 목에 검을 쑤셔 넣는다.
푸욱-!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목에 검을 꽂아 넣은 상태에서 시계 방향으로 검을 한 바퀴 빙글 돌려준다.
“끄르륵! 구어, 어어어...”
쿠웅!
제 아무리 잘난 오우거라고 할지라도 목구멍 안에서 칼이 돌아가고 버틸수는 없었는지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즉사였다.
“후우, 후우, 후우.”
죽을 뻔했다. 이번엔 진짜로 죽을 뻔했다. 오우거가 휘두르는 몽둥이의 범위를 조금이라도 잘못 판단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뚝배기가 박살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을 것이다.
짝, 짝, 짝.
옆에서 느릿느릿한 박수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정말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황녀의 모습이 서 있었다.
“카인 경. 훌륭하군. 훈련을 시작한 지 고작 6개월 만에 오우거를 쓰러뜨릴 수 있게 되다니.”
“...팔이 부러진 녀석이었잖습니까.”
장애인 오우거를 쓰러뜨렸다는 직함은 멋지지도 않을 뿐더러 어디 가서 남에게 말을 하기도 부끄럽기 그지 없는 일이다.
“그걸 감안해도 훌륭하네. 6개월 전만 해도 사지가 부러진 오크조차 당해내지 못하였잖은가. 아무래도 이 훈련법이 자네와 궁합이 맞는 듯 하군.”
황녀의 칭찬인지 뭔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에 내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진다.
나는 6개월 전, 황녀가 사로 잡아온 사지가 부러진 오크에게 그야말로 개처럼 얻어터지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고 만다.
황녀는 '사자는 높은 곳에 자기 새끼를 떨군다' 어쩐다 하는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명목 하에 내가 오크에게 쳐맞는 것을 그저 구경이나 할 뿐이었으며 비앙카는 내가 쳐맞는 꼴이 우습기만 한 것인지 내가 황녀에게서 훈련을 받는다고 하면 나에게로 부리나케 달려와 내가 쳐맞는 장면을 열심히 관람하는 것에 열중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대략 일주일간을 오크에게 쳐 맞은 끝에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대로 가다면 진짜 오크에게 맞아 뒤질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그리고 인간의 생존 본능이란 실로 위대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일주일을 내리 두들겨 맞았더니 오크가 휘두르는 주먹의 방향이 어디인지,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쳐 맞아야 조금이라도 덜 아픈지 자동으로 알게 되었단 말이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난 뒤에 나는 수없이 나를 두들겨 팬 오크의 모가지에 검을 꽂아넣는 것을 성공할 수 있었다.
“흠. 2주나 걸렸나. 예상보다 느리군. 훈련의 강도를 조금 더 높여야겠어."
내가 오크의 목에 검을 꽂아 넣는 것을 바라보며 그리 섬뜩한 말을 중얼거리던 황녀는 다음 날에는 사지가 멀쩡한 오크를, 그 다음에는 트롤을, 그 다음에는 이름조차 알지 못할 괴상한 마수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녀석들을 산 채로 잡아온 후 내가 녀석들을 쓰러뜨리기를 요구하였다.
사방 천지에 눈꽃이 흩날리며 생명체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혹독한 겨울 속에서 어디선가 저런 마물들을 잘도 잡아오는 황녀가 이제는 원망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녀석들에게 수도 없이 두들겨 맞고, 목숨을 위협당하며, 나 역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렇게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나는 드디어 장애를 가진 오우거 정도는 쓰러뜨릴 만한 기량을 갖추는 것에 성공하였다.
‘...근데 뭐 어쩌라고.’
하지만, 눈꼽만큼도 기쁘지 않았다. 6개월간 놈들에게 쳐 맞은 횟수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기분이 좆같기만 하다. 누가 나에게 ‘6개월 간 고생한 대신 강해졌으니까 괜찮은 거 아니냐.’라고 말을 하면 그 개자식을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줘 패줄 자신도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체력단련과 검술 훈련, 그 후에 극도로 낮은 기온 속에서 벌벌 떨며 눈밭을 헤치며 북쪽으로 행군, 저녁에는 나를 찢어 죽이려고 하는 마물들과 목숨을 건 대련, 거기에 중간중간 나를 갈궈 대는 비앙카의 개 같은 행동까지 곁들어지니 정말 자살이 마렵다.
황제나 여타 떨거지들이 나에게 고통을 안겨 주기 위해 길잡이 역할을 맡긴 것이라면 그 의도는 100% 성공을 한 게 아닐까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입에 칼을 물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니까.
“그대가 성장을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스승인 나조차 뿌듯하군. 그런 의미에서 내일은 오크 5마리와 사투를 벌여보는 것은 어찌 생각하는가?”
“.....”
마녀고 뭐고 이젠 엿같기만 하다. 누가 날 좀 빨리 죽여주었으면 한다.물론 비앙카 그 여자는 제외이다.
****
정말 다행스럽게도 ‘겨울 원정대’의 다른 구성원 2명은 비앙카나 황녀처럼 나를 직접적으로 갈구거나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미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비앙카가, 육체적인 측면에서는 황녀가 나를 수도 없이 두들기고 있는 이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가 한 팔 거든다면 진작 미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고해서 나에게 우호적이라던가 친밀하게 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한 명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는 모호한 미소를 짓고 있기만 할 뿐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나를 대놓고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우선, ‘겨울 원정대’에서 성직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교단의 성녀, 아리엘 티에르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자.
성녀 아리엘은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입가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원정 도중 그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여유를 잃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 표정이 변하는 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였기에 나는 성녀라면 잠이 든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자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을 정도이다.
여신의 현신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아름다움과 고운 마음씨, 사근사근한 말투와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원래대로 되살리는 막대한 신성력에 이르기까지 뭐 하나 빼놓을 수 없으며 부족한 면 따위는 아무 것도 없는, 성녀 아리엘은 그야 말로 완벽한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성녀가 왠지 모르게 불편하기만 했다.
그녀가 비앙카처럼 내게 꼬장을 부리거나 황녀처럼 나를 육체적으로 갈구는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게 여겨졌다.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냥, 그녀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내가 비앙카에게 하인 마냥 부림을 당하거나 혹은 황녀와의 훈련에 지쳐 헉헉 거리고 있을 때마다 말없이 내게 다가와 치유술을 걸어주는 상냥한 여인이었건만 나는 그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하기만 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 너무 잘 대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성녀는 나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10년 지기 친구인 것 마냥 서스름 없이 대해주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내가 짐을 들고 원정대의 뒤를 헉헉 거리면서 뒤따를 때마다 내가 자신들을 따라잡을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려주는 사람 또한 성녀가 유일하였으며 식사를 마친 후 뒷정리와 설거지를 도와주는 이 또한 성녀가 유일하였다.
하지만 불편했다. 누가 듣는다면 배때지가 부른 소리라고 지랄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정말로 성녀 아리엘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녀가 때때로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이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꺼림칙한 것으로만 느껴졌단 말이다.
그리고 ‘겨울 원정대’에서 궁수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세계수의 수호자 역할을 맡고 있는 엘프, 키리에 엘 데나리스 또한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키리에는 날 언제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종족 조금 아래로 깔아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반발이 깃들어 있는듯 보였다.
그 원인은 알지 못한다. ...뭐, 고작 해야 100년 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을 열등하게 생각한다던지, 아니면 대륙에 겨울을 불러온 ‘마녀’가 인간이라는 점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과거에 인간한테 싸대기라도 한 대 맞은 것인지,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단 말이다.
그 이유가 어찌되었건 간에 키리에의 그러한 태도는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비앙카와 황실에 대한 긍지로 똘똘 뭉쳐 있는 황녀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하였고 덕분에 오우거 사이에 낀 고블린 같은 신세인 나만 중간에서 죽어나갈 노릇이었다.
중간에서 후후 웃기만하며 내가 그들을 조율하는 것을 구경하기만 하고 있는 성녀의 존재는 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비앙카나 황녀가 빡이 돌아서 키리에와 정면으로 맞장을 뜨려 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숨 막히는 신경전은 내 숨통을 옥죄는 듯 여겨졌다.
꼴랑 5명밖에 안 되는 원정대였음에도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환장한 듯 구는 꼴을 보면 절로 한숨이 튀어 나왔으며 4명 모두 각각의 방식으로 나를 괴롭히는 꼴을 가만히 보자 하니 내 수명이 깎여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해야 1년 밖에 안 되는 원정이었지만 나에게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없었으며 그에 비례해 ‘마녀’라는 년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차곡차곡 쌓여만 나갔다.
그래, 이게 전부‘마녀’라는 년 때문이다. 그 개 같은 년만 아니었다면 내가 지하 감옥에 쳐 박힐 일도없었을 것이고 이 원정대에 고기 방패로 끌려올 일도 없었을 것이며 저 4명에게 돌아가며 치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 비앙카 그 개 같은 년한테 갈굼을 받은 것도, 황녀가 오우거 두 마리를 끌고 와 개처럼 얻어터진 것도, 키리에가 빈정거리는 말을 하여 빡친 비앙카와 맞장을 뜰 뻔한 것도, 성녀가 그것을 두 눈을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싱글벙글 웃고 있기만 한 것도 전부 마녀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 망할 년 때문에 내 인생이 이토록 망가진 것이 분명하다.
갈 곳 없는 분노와 원망은 살기가 되었고, 살기는 내 마음을 까맣게 잠식해 들어간다. 내 옆에서 어떤 이상한 여자들이 지랄을 떨더라도 허허롭게 웃을 수 있는 경지에 올랐지만 그것은 흘려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 한 구석에 꽁꽁 숨겨두는 일에 불과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다. 북쪽 끝, 에스텔 공작령에 도착한 우리는 대륙에 겨울을 불러온 주범, ‘겨울의 마녀’를 마주하였다.
마녀는 눈처럼 새햐얀 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미인이었다. 솔직히 외모로만 본다면 대륙에 겨울을 불러온 ‘마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손끝에서 눈송이를 피워내는 년을 보자마자 내 눈깔은 뒤집히고 말았다. 지난 1년 간 참고 참고 또 참아온 인내심이 끝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후후, 결국 여기에 당도하였구나. 당신들이 나를 막기 위해 남쪽에서 올라온...”
“야, 이 개 같은 년아.”
“...응?”
나는 뭔가 주저리주저리 떠드려고 시동을 걸던 마녀의 주둥이를 닫게 하였다. 내 머릿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저 개 같은 년의 모가지를 따버림으로서 지금까지 쌓인 모든 원한을 풀고 싶다는 충동 밖에 일지 않았다.
“주둥이 닫고 빨랑 한 판 붙자. 이 망할 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