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2. 겨울 원정대 - 03 (4/201)



〈 4화 〉2. 겨울 원정대 - 03

그것 외에도 비앙카와 함께 1년이라는 시간동안 알콩달콩 쌓아온 추억의 개수는 그야 말로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으니 여기까지만 말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겨울 원정대’에서 기사의 역할을 맡고 있는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라는 여자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제국 내에서  손가락에 드는 실력자이자, 평생 동안 검을 휘두른 이도 쉽사리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여자로서 현 제국 기사단의 수장 역할을 겸임하기도 하고 있는 이 여자는, 황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황녀. 문자 그대로 황제의 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 그렇다. 아이리스라는 여자는 신분으로만 따진다면 공작위를 박탈당한 현재의 내가 감히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할 고귀한 위치에 서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황녀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런 원정에 직접 참가를 한 저의가 무엇인가?

그래서 언젠가 그녀에게이러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뒷받침해둔다고 해도 굳이 이런 궂은일에 직접 나서게 된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말에 그녀는 나를 엄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이리 답을 하였다.

“경 또한 귀족이 아닌가? 귀족의 의무가 뭐라고 생각하지?”

“...의무 말씀이십니까? 그야, 신민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틀렸다.”

그녀는 나의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족들의 의무란 신민들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앞에서 그들을 이끌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제국의 신민들에게서 비롯되는 것. 고귀한 피일수록 신민들을 위해 흘리는 피를 두려워해서는 아니 되며 가장 앞장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피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황실의 피를 이어 받은 나에게 가장 먼저 적용이 되는 말이니라.”

“.....”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구나. 내가 지금까지 제국의 신민들에게서 받았던 것들을, 이런 형태로나마 되돌려줄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마치 스스로를 타이르듯 말을 하는 황녀의 옆얼굴에는 엄한 기풍이 서려있었으며 그렇기에 너무도 긍지 높아 보이기만 하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생각해버릴 정도로.

“...흠? 그 시선은 무엇인가? 혹여 내게 반하기라도 한 것인가?”

그리 말을 하며 황녀는 살포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미안하지만 나는 강한 사내가 취향인지라. 경은 너무 허약하기 그지없으니 눈에 차지도 않는군.”

“.....”

누가 뭐랬나? 나도 언감생심 내 주제도 모르고 황녀에게 들이댈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다.

“흐음. 이제 보니 경은 제대로 된 단련은 전혀 하지 않은 것 같군. 하체도 부실하고, 팔에 근육은커녕 살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 에스텔 공작가는 대대로 훌륭한 무인을 배출한 가문이 아니었나?”

“딱히 무(武)에는 흥미가 없어서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을지라도 앞으로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네. 앞으로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원정이 지속될지 모르는데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기량은 갖추고 있지 않아야겠나?”

듣고 보니 매우 올바른 말인지라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언제 어디서 마수들이 튀어나올 지도 모르는 위험한 여정인데 다른 사람들만 믿으며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특히 목숨이 위험한 순간 비앙카 같은 년한테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살아난다는 상상을 하니 무척이나 배알이 꼴리기 시작한다. 그런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일 아침부터 빡세게 검술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

그 때였다. 나를 쳐다보는 황녀의  눈이 반짝하며 빛이 나는 것이.

“카인 경. 혹시 나에게 검술을 배워 볼 생각이 없나?”

“...예?”

“무얼, 사양할 필요 따위는 없네.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다가 자네는 이 원정대의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던가. 자네가 강해질수록 원정대의 전력 또한 상승하는 셈이니 나에게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생각하네.”

그 또한 듣고 보니 매우 타당한 말이었다. 사실, 내가 이 정도 되는 실력자에게 가르침을 받을 만한 기회가 대체 언제 오겠는가. 특히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의 가르침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하더라도 쉽게 얻지 못할 기회가 틀림 없을 터.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신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후후, 무얼. 우리는 원정대의 일원이자 동료 사이가 아니던가. 별 것 아닌 일일세.”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번째 지옥문을 열어 버리고 말았다.



****


“...경, 경. 일어나게나.”

“...으, 으음...”

누군가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만다.

눈을 게슴츠레 떠서 텐트 밖을 살펴보니 바깥은 아직도 짙은 어둠에 감싸여 있는 것이 보인다.

대체 어떤 놈이 나를 새벽부터 강제로 기상시키는 것이란 말인가.

싸가지 없는 비앙카조차도 내가 잠을 잘 때만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카인 경!”

내 귓가에 울리는 천둥 같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번뜩 뜨고 만다.

나의 코앞에 황녀가 완전무장을 한 차림새로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황, 황녀님...?”

“흠. 이제야 잠에서 깬 모양이군. 잠은  잤나?”

“...왜 이런 새벽에 저를 깨우신 것입니까? 혹시 마수들이 기습을 해오기라도  것인지...?”

“자네야 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오늘부터 내게 훈련을 받기로 하지 않았나?”

“...네?”

그 순간 내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새벽부터 뭔 놈의 훈련은 훈련이란 말인가?

“미안하지만 따로 훈련 시간을 낼 정도로 우리는 한가하지 않다네. 우리는 원정을 떠나온 것이지 여행을 온 것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잠  시간을 쪼개어 훈련을 하는 것이 제일 낫다고 생각하였네.”

“...음, 그렇긴 하네요.”

황녀의 말은 정론 중의 정론인지라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녀에게 훈련을 받겠다고  이상 한 입으로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한숨을 쉬며 나름대로 무장을 갖춘 채 텐트 밖으로 나서니 밤하늘에 아직도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도대체 지금이  시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훈련이고 뭐고 다시 텐트로 기어들어가 잠이나 자고 싶다.

그렇게 내가 잠이 덜 깬 멍한 눈빛으로 황녀 앞에  있으니, 그녀는 나를 보며 혀를 찬다.

“쯧, 경은 정말 허약한 남자로군 그래. 고작 잠을 몇 시간 덜 잤다고 눈이 그리도 흐리멍텅 하다니. 자네가 기사단 소속이었다면 정신교육부터 시켰을 것이라네.”

“.....”

“뭐, 어쩔 수 없지. 이곳은 제도가 아니니. 그럼 훈련을 시작하겠네. 우선 간단한 실력 테스트부터 해 볼까.”

그리 말하며 황녀는 자신의허리춤에 매여져 있는 검을 톡톡 두드린다.

“검을 뽑아서 내게 덤벼보게나. 자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을 해봐야겠으니. 참고로 나는 자네를 맨손으로 상대하겠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거 진검입니다만...”

나는 나름대로 걱정을 한다고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에 황녀는 푸흡 하며 웃음을 터트린다.

“경은 걱정을 사서하는군. 경의 실력으로 내 털끝이라도 건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건가?”

나를 개 무시하는 듯한 황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오기가 생기고 만다.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 나를 무시하는  같은데 나는 이래봬도 무가(武家)로서 대륙에 이름을 떨친 에스텔 공작가의 후계자이다.

손에서 검을 놓은 지 꽤나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어릴 적에는 교양의 일환으로서 검술 훈련을 착실히 받은 몸이라는 말이다.

“황녀님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겠습니다.  검에는 눈이라는 것이 달려 있지 않으니까요.”

“호오, 이제야 봐줄 만한 눈빛을 보여 주는군. 좋네. 어디 한 번 마음껏 덤벼보게나.”

황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든다.  오늘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황녀에게 남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똑똑히 각인시켜주고야 말 것이다-

“하아아아아아압!”

...그리고 정확히 1분 후, 나는 잔디밭 위에서 볼썽사납게 뒹굴고 있었다.

“커헙! 커헉! 어어억...”

황녀에게 배빵을 정통으로 맞아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꺽꺽 거리고 있자하니, 황녀는 나를 참으로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음. 생각보다 훨씬 약하군. 기사단의 막 들어온 막내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져. 설마설마했지만  정도 수준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네.”

“.....”

젠장, 그거야 당연한  아닌가. 어렸을 적부터 꾸준하게 검을 잡아온 천재들조차도 제국의 기사단에 들어가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던데. 그런 인간 병기들과 집무실에서 펜대나 굴리다가 여기에 잡혀온 나를 비교하는 것은 좀 너무한 일이 아닌가?

“계획을 수정해야겠군. 원래는 검술 위주로 훈련을 하려 했건만 이대로 가다가는 10년이 지나도 자네는 전력이 되지 못할 걸세. 조금은 과격한 방법을 써야한다고 생각되네.”

“...과격한 방법이요?”

 단어의 울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불길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게무엇입니까?”

나의 질문에 황녀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잠깐 고심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어 대답을 하였다.

“실전.”


****



이틀 후, 북쪽을 향해 나아가던 원정대는 다시금 밤이 찾아오자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물론, 야영준비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원정대의 구성원  분 모두 야영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귀하신데다가 손에 물조차 묻혀보지 않으신 몸들이니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내가하지 않으면 대체 어느 누가 하리오.

이미 원정 내내 몇 번이고 해본 야영 준비였지만 오늘따라 몸이 너무도 피곤한 탓인지 저절로 손이 느려지고 만다.

“...진짜 피곤해 미치겠네.”

이틀 전부터 새벽같이 일어나 황녀와 함께 기초 체력 단련 및 검술을 지도받는다는 일정이 추가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낮에는  네 명의 짐을 등에 인 채로 길을 걷느라 힘들어죽겠건만 이젠 밤에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몸이 되었으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상태로 모닥풀을 피우고 텐트를 설치하고 있던 때였다.

“끙, 이거 참 무겁군.”

쿵!

야영준비를 한다고 말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던 황녀가 갑자기 돌아와서는 내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크아아아악! 날  꼴로 만들다니! 용서치 않겠다, 인간!”

자세히 보니 그것은 오크였다. 그것도 눈가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두 개나 있는, 존나 세보이는 오크.

주둥이로는 용서치 않겠다고 떠드는 주제에  반항을 하지 않는 것인지 호기심이 일어 녀석을 살펴보니 두 다리와 오른족 팔이 기형적으로 꺾여있는 것이 보인다.

과연, 저래서야 반항을 하고 싶어도 무리임이 틀림없겠군.

나는 오크를 향해 살짝 동정심을 품으며 황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놈은 왜 여기까지 끌고 오신 것입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시지 않고.”

“음. 그야 필요하니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전부 자네를 위해   좀 썼다네.”

“...저를 위해서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저 오크를 사로잡아 온 것이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설마 저 오크가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처럼 야영준비를 해준다거나 음식을 대신 만들어주는 그런 착한 오크였다는 말인가?

“크아아아악! 죽여 버리겠다. 몸을 산 채로 뜯어버리고  선혈로 내 목을 축일 것이다! 내게 이런 굴욕감을 안긴 네 년은 특별히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리겠다!”

“.....”

내뱉는 말을 가만히 듣자하니 청소나 요리를 대신 해줄 착한 오크의 언행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내가 설명을 재촉하는 눈길로 황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린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네에게는 실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네?”

순간, 내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간다. 황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해버렸기 때문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저 오크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다.

비록 얼굴은 구역질나게 못생기기는 하였지만 녀석의 체형만큼은 일류 전사라고 칭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잘 발달되어 있었다. 아랫배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복근은 두 말할 나위조차 없었으며 녀석의 이두박근은 내 허벅지의 두 배는 넘어 보이는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설마. 아니지? 농담이지? 농담이라 믿고 싶다. 설마. 황녀가 제정신이라면 절대 그런 일을 시킬 리가-

“...농담이시죠?”

“농담이라니.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이것이야 말로 내가 고안한 최고의 훈련법이거늘.”

그리 말하며 황녀는 자신의 허리에 있던 검을 풀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자네의 스승으로서 명하겠네. 어디 한 번 저 오크와 싸워서 재주껏 승리를 거두어 보게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