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2. 겨울 원정대 - 02
“...뭐라고?”
“귀가 별로 좋지는 않은가봐? 나 마사지 좀 해달라고. 오늘 너무 오랫동안 걸어서 그런지 다리가 아프단 말야."
"....."
당연하지만 비앙카의 말대로 귓구멍이 쳐 막혀서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해 반문한 것이 아니다.
진짜 존나게 어이가 없어서 내 귀가 정상인지 의심하느라 그런 것이란 말이다.
‘이 여자가 드디어 돌아버린건가? 내가 무슨 마사지사야?’
사실, 마사지정도 해주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비앙카와 내가 전혀 생면부지의 타인도 아니고, 악연이라고는 하지만 무려 20년이나 알고 지내온 사이인 만큼 마사지 해주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거기다가 지난 몇 달 간, 원정대에 속해있는 동안 수많은 일을 겪었으며 그로 인하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저 여자의 맨살 같은 것은 수도 없이 보아왔을 뿐이 아니라 매만져보기까지 하였다. 이제 와서 고작해야 마사지를 해주는 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세상 천지의 어떤 남자가 갑자기 뜬금 없이 자신에게 발마사지를 해달라고 조르는 여자를 곱게 볼 수가 있단 말인가? 결정적으로, 그녀가 왜 하필이면 다른 부위도 아니고 발을 마사지 해달라는 것인가? 발이란 귀족가의 여인에게서 다른 사내에게 함부로 보여서는 안되는 신체 부위 중 하나. 다른 사내에게 발을 보인다함은 최소한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아니라면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종합하자면, 비앙카는 지금 최소 결혼을 약속한 사이의 남녀에게서 오고갈 법한 일을 나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지만, 저 여자와 그런 사이로 오해를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지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왜?"
결국 나의 입에서 이 따위 질문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계집애에게 마사지를 해주는 것 만큼은 도무지 내키지가 않는 일이었으니까.
"왜? 왜애?"
나의 질문에 흉신악살마냥 자신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비앙카. 솔직히 고백하자면, 비앙카의 저 모습에 쫄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쫄아버린 것이 맞기 때문이다. 비앙카의 머리가 훼까닥 돌아버려서 나를 향해 마법이라도 날린다면 최소 즉사다. 힘의 격차가 이토록 뚜렷하기 그지 없는데 어떻게 쫄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여자하고는 서로 마사지를 해주었잖아. 나는 왜 안되는데!"
"...그 여자?"
이 원정대에 어디 여자가 한둘이 아니어서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황녀 말이야! 어제는 남들 다 쳐다보는 가운데서 서로의 몸을 조물락 거렸잖아!"
새된 목소리로 나를 향해 빼액하고 소리를 지르는 비앙카. 그리고 나는 그러한 비앙카의 모습을 보며 도저히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표현이 왜 저렇게 상스럽기만 한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건 황녀님에게 검술훈련을 받은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어쨌든 그 여자한테는 해줬잖아! 왜 나한테는 안 해주려고 하는데? 내 몸이 더러워? 어?"
"....."
할 말이 없다. 이 여자가 왜 갑자기 뜬금 없이 나를 붙들고 헛소리를 늘어놓는가 생각했더니, 어제 황녀와 한창훈련을 한 뒤 서로의 피로를 해소해주기 위해 마사지 좀 한 것 가지고 이리 지랄을 떠는 것이었단 말인가?
이쯤 되니 비앙카의 얄팍하기 그지 없는 속내가 나에게는 훤히 들여다 보였다. 아마 비앙카는, 자신만 쏙 빼놓고 내가 다른 여자에게 마사지를 해주었다는 사실이 분통이 터지는 것이겠지.
안 그래도 비앙카는 평상시부터 나라는 사람을 자기 노예 비스무리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준 것은 자신도 마땅히 받아야할 권리임이 틀림 없다, 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한 마디로 종합하자면, 이 여자는 성격이 끔찍할 정도로 더러울 뿐이라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비앙카. 그런데 발은 좀 그렇지 않아?"
혹시라도 누군가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면 비앙카와 내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오해를 해버릴지도 모른다. 실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오해가 아닐 수 없었다.
"발이 왜? 어때서?"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비앙카. 이쯤 되면 저 여자가 정말 귀족가의 영양인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그야, 우리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닐 뿐더러 함부로 맨살을 접촉할 만한 사이는 더더욱 아니잖아. 혹여 네 발을 마사지했다가 다른 사람이 이 광경을 보기라도 한다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지 않겠어?"
"...그럼 황녀는?"
투견마냥 끝까지 황녀를 물고 넘어지는 비앙카.
"그건 훈련의 일환이었잖아... 살갗이 닿지도 않고 어떻게 훈련을 하는데."
내가 어쩌다가 이런 구질구질한변명을 내뱉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건,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조금 무리가아닐 성 싶다. 너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상한 오해를 사는 것은 싫잖아. 그렇지?"
"....."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연이은 변명에 그제야 무언가 납득이라도 한 듯 조용히 입을 다무는 비앙카.
"그러면 나는 이만 나가보아도 될 까? 아직 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어서 말이지."
그렇게 말을 하는 내 몸은 이미 텐트의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이제는 한시라도 빨리 이 빌어먹을 곳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였다.
“야, 카인. 누가 나가랬어. 거기 안 서?”
우뚝-
비앙카의 말을 듣기 무섭게 내 몸은 그대로 일시정지를 해버린다. 지난 몇 달간 저 년의 눈치를 너무도 많이 본 영향인지 비앙카가 서라고 하자마자 그대로 우뚝 멈춰버린 내 몸이 너무도 야속하기만 했다.
“내가 잠시 생각해봤는데, 별 문제 없는 거 같은데?”
“...뭐?”
“넌 지금 다른 사람들이 네가 내 발을 마사지 해 주는 장면을 보며 오해할 지도 모른다고 말한 거잖아. 그치?”
“...어. 그렇긴 하지.”
“그럼 다른 사람들이 안보면 문제없는 거 아냐?”
그리 말하며 비앙카는 자신의 옆에 놓여져 있던 지팡이를 주워들고 뭔가 중얼중얼 거리기 시작한다.
마법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나지만 비앙카 주위에 솟아오르는 기운에 저 년이 지금 마법을 사용하려고 한다는 것쯤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시발. 저 개 같은 년이 드디어 나를 죽이려 드는 건가.’
역시, 발을 마사지 해달라니 어쩌니는 핑계에 불과했던 것일까. 비앙카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이 던진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내가 거절하게 만드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하자마자 그것을 핑계로 나를 죽여 버린다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붉은 머리를 가진 여자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 마음속으로 유언을 남기며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야, 너 뭐해? 눈 안 떠?”
번쩍.
그 말과 함께 나는 저도 모르게 감았던 두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눈을 뜨자마자 저도 모르게 비앙카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만다.
“...뭐야?”
다행히 비앙카의 손에 불덩이가 맺혀 있거나 번개가 소용돌이 치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뭐야, 나를 죽여 버리려고 마법을 쓴 것이 아니었나.
“눈은 왜 감은 거야?”
“...아니, 네가 갑자기 마법을 쓰는 게 조금 당황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린 것뿐이야.”
네가나를 죽여 버릴까봐 무서워서, 라는 말을 조금 순화하여 내뱉는다.
“풉, 그게 뭐야. 하긴, 넌 옛날부터 겁이 좀 많은 편이기는 했지.”
뭔가 나름대로 납득이라도 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는 비앙카.
“걱정하지 마. 난 그저 다른 사람이 텐트로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결계를 친 것에 불과하니까.”
“...뭐? 그게 무슨-”
“내 발을 마사지 해주는 거.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보지 못하게 결계를 쳤다고. 이제 아무 문제없는 거 맞지?”
“.....”
...정말 정신이 나간 여자다. 나는 이제 이 계집애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리 말하며 비앙카는 양말을 벗더니 자신의 늘씬하기 짝이 없는 다리를 과시라도 하는 것 마냥 한 차례 까닥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남자다 보니 그 아리따운 자태에 저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나는 마음 속 어딘가에서 자존심이라는 녀석을 얌전히 내려놓은 후 해탈한 표정을 지으며 비앙카의 발을 천천히 매만지기 시작하였다. 이 계집애의 소원대로 발 마사지를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비앙카의 새하얗다 못해 석고와 같은 맨발을 마사지 해주기 위해 그녀의 발을 관찰하던 것도 잠시, 나는 그녀의 발바닥 한쪽 구석에 여러 개의 자그마한 물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변명이 아니었나.'
발을 마사지해달라고 요청을 하였을 때만 해도 아프다는 말이 순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아프기는 아팠던 모양이다. 사실, 성녀한테 가서 치유를 부탁하면 한 번에 낫게 될 테지만, 이 자존심 강한 여자는 고작해야 물집 따위 때문에 성녀에게 고개를 숙이기 싫었던 모양이다.
"쯧."
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세차게 차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발에 뭉쳐 있던 부분을 꾹하고 눌러주었다.
"...아, 윽. 카인...!"
혈관이 풀리면서 기분이 좋았던 모양인지 아주 나지막하게 신음성을 흘리는 비앙카. 하지만, 나의 마사지는 이제 시작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으, 윽..."
나는 비앙카의 맨발을 살살 매만지고, 꾹 누르거나, 혹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혈관이 뭉쳐 있다 싶은 부분은 손바닥을 빙글빙글 돌려 최대한 해소를 해주었으며, 발에 상처가 나 있는 부분은 유리 세공품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살짝 다듬어줄 뿐이었다.
어느새 나는 비앙카의 맨발을 매만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마사지에 몰두를 하고 있었다.
"...아아."
...그리고,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분은 훌쩍 넘은 시간 동안 그녀의 발을 만지고 있었다는 점을깨달은 나는 이제 그만 그녀의 텐트에서 나가 볼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도로 다른 여인의 텐트에 오랜 시간을 머물러 있다가는 다른 원정대의 멤버들이 무슨 이상한 오해를 할 지도 모르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충분한 것 같은데? 그만 나가보아도 될까?”
“잠깐, 카인. 기다려.”
아직도 뭔가 미련이 남은 것인지 나가려는 나를 붙잡는 비앙카.
"...왜 그래? 아직 내가 할 일이 남았어? 어디 다른데 마사지라도 해 달라고?"
나의 질문에 비앙카는 평소의 당당한 모습과는 무언가 우물쭈물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나를 향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워."
"...뭐라고?"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고! 다음 번에는 좀 살살하란 말이야!"
비앙카는 개뜬금없이 벌컥하고 화를 내더니 나를 그대로 텐트 밖으로 밀어내었다.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아프기만 하고. 진짜로 싫어. 정말로."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나에게서 휙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텐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빌어먹을 년.'
나의 천금 같은 자유시간을 전부 투자해서 마사지를 해주었건만 돌아오는 것은 원색적인 비난 뿐이라니. 나도 미친 것이 틀림 없었다. 저 계집애가 뭐가 이쁘다고 그리 마사지를 열심히 해주었던 것인지.
"...그런데 내 마사지가 그렇게 아팠나?"
황녀는 내가 마사지를 해주면 몸이 노곤해진다고 칭찬을 해주었는데 말이지. 하긴, 사람마다 민감하게 느끼는 부위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 비앙카의입장에서 보자면 내 마사지가 정말로 아프게 느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열심히 마사지를 해준 대가로 욕을 쳐먹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오늘도 유감없이 비앙카에 대한 증오가 한층 더 깊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나의 텐트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하늘이 이미 나를 낳았는데 어찌하여 또다시 비앙카라는 여자를 낳은 것인지 한탄스럽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