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9화
* * *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기분은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을 준다.
소위 사회에서 대단치 못한 이들이라도 자식을 자기 입맛대로 다루며 그 기분을 잠시나마 누린다. 물론 그 과정이 안 좋았을 경우 늙어 죽을 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지배욕은 인간에게 큰 쾌감을 선사해 준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거나 따돌릴 때도 그 지배욕의 꼬투리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군대에서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그 자그맣고 하찮은 지배욕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이들이 있다.
그 결과로 희생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어 한다.
드낙의 부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부인들이 지배욕을 드러냈고, 권력을 탐했다. 그들은 족쇄가 풀리기를 바랐다.
“그 말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드낙은 이를 약속했다. 상당한 땅도. 돈도. 회사도 약속했다. 모두 알짜배기 회사들이다. 드낙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일감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 정상에서 그들은 자기만의 가문을 이어나갈 터다.
외척이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
지상이 망해버린 테라에서는 그런 날갯짓조차도 고마운 일이었다. 재건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는데, 드낙이 대충 수습하고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각자 새로운 자리로 흩어졌다. 그들의 자식들 또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드낙의 진정한 후계는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로 정해진 탓이다. 거기에 드낙이 은퇴를 운운하였으니, 기댈 곳은 외척뿐이다.
부인들의 족쇄를 풀어준 드낙은 오션 오크와 마주했다.
가히 빛보다 빠른 행보였다.
“규르소모스. 살아남았다고 들었는데, 대단하다.”
“밖으로 나가 싸웠는데, 집이 무너진 꼴이다.”
그가 자조 섞인 말을 했다.
오션 오크는 ‘녹색 도끼’를 믿는 자들이다. 드낙의 신봉자도 아니고, 세파리아스를 추구하는 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그들끼리 살아남아야만 했다.
전쟁 준비에도 은근히 지원을 못 받았다.
신앙이 다른데 어찌 오크들을 살리는 데 온 힘을 다하여 도와주겠는가? 남의 나라 돕겠다고 자기 나라 전기를 모두 보내주는 꼴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은퇴하기로 했다. 이르지만, 지금이 적기다. 이번 재건에서 공을 많이 세운 자들이 새로운 권력 체계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보자고 한 것인가? 우리 오션 오크는 항구 도시를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다른 곳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
드낙은 안타까운 눈을 했다.
“똑똑할 줄 알았는데, 영 아니구나. 아니면, 죽은 오크들의 넋이 그 눈을 가리고 있는 건가? 내가 은퇴하는데. 아무 공도 세우지 않고 너희 항구 도시만 재건하겠다고? 응? 쯧쯧.”
드낙이 경박하게 침을 튀기며 혀를 찼다.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규르소모스는 눈이 뜨이는 느낌이 들었다.
“…….”
그리고 이내 표정이 절로 심각해진다. 그러든 말든 드낙은 자기 할 말을 해나갔다.
“종족 회의를 내가 왜 만들었냐? 근데 재건이 바쁘다고. 자기들 역량부터 먼저 높이겠다고, 종족 회의에도 참여를 안 해? 지하 연합에서도 버려지고 싶은 거냐?”
“그건…….”
“재건 사업을 경쟁한다고, 너희 오션 오크들은 어쩔 거냐? 지금 다른 종족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서라. 포기해라.”
테라의 자본주의는 지구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배춧값이 낮다고 멀쩡한 배추를 엎어버리는 자본주의는 지구에만 있다. 테라에는 없다. 오션 오크들이 바다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식량? 굳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산물을 조금 먹으면 될 일이고, 머메이드들도 있었다. 충분히 오션 오크를 견제 가능했다.
지금까지 그런 경우가 크지 않았기에 오션 오크들도 몰랐다.
드낙이 준비한 카드를 들춰내니, 대족장인 규르소모스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당장 종족 회의부터 참석해라. 다른 종족과 파트너가 되어라. 그리고 남들과 경쟁자가 되지 마라. 그게 오션 오크가 테라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왜 이렇게 도와주는 건가?”
오션 오크는 드낙에게 신앙을 주지 않는다. 드낙과 종족도 달랐다. 테라에 초월자도 가지지 못했다.
“그래도 이웃사촌 아니냐. 오션 오크는 훌륭한 전투원이기도 하고, 뱃사람이기도 하다.”
나중에 필히 도움이 될 것이다.
뱃일이 얼마나 힘든지 드낙은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젊은 청년들이 가장 싫어하고 하기 싫어하는 일 중 하나가 뱃일이다.
‘그런 뱃일에 최적화된 산악 종족이 있다?’
그게 바로 오션 오크였다.
‘나중에 반드시 오크들은 뱃사람으로 큰 이득을 본다.’
남이 안 하는 일을 생업으로 사는데, 당연히 큰 권력을 잡게 될 터다.
“잘해라. 잘해. 제발 잘해라. 나중에 가서 따돌림당하고, 다른 종족한테 잡아먹히지 말고. 테라는 반드시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한다.”
드낙이 연거푸 그를 독려했다. 이에 규르소모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조언대로 하겠습니다.”
드낙은 손을 휘휘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 은퇴하니까, 이런 소리 하는 거다. 다른 뜻은 없다.”
드낙은 규르소모스와 함께 항구 도시를 둘러봤다. 수많은 맨션이 들어서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를 짓기에 아직 기술이 숙련되지 않았다.
경험 있는 오크 건축가가 죽어서 고층 아파트를 현재 못 짓는 것도 이유였다.
이후로도 드낙은 수많은 지배자를 만났고, 하나씩 조언해 줬다.
하나같이 명줄을 길게 늘어뜨리는 데 탁월한 조언이었다.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드낙은 자신의 은퇴를 공표했다. 지배자들이 언질을 받았기에 혼란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드낙을 칭송하고, 그 업적을 기렸지만, 재건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은퇴하는 모습에 불만을 토해내는 이들도 있었다.
“힘이 있는데 그 힘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써야 하거늘.”
어떤 남자가 그런 소리를 하며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만약 자신이 초월자가 된다면 저렇게는 살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드낙 님을 아무도 막지 않는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그럼 네가 찾아가서 말하든가.”
“뭐?”
“못하지? 병신아. 그럼 입 닥쳐. 네가 뭘 알아?”
“죽어!”
술집에서 싸움이 나기도 했다.
* * *
드낙은 자신이 은퇴할 곳으로 향했다.
아직 젊었고, 애초에 늙어 죽지도 않지만, 그는 은퇴했다.
‘모두 날 이해하지 못하겠지.’
누가 이해할까?
최고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모 나라의 대표도 종신 집권을 위해서 악을 쓰고 있다.
권력이란 건 그런 것이다.
모두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드낙은 아니었다.
‘의미 없다.’
차원 전쟁도 끝났다. 초월자도 많았기에 또 다른 차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그가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됐다.
‘나만의 요람을 만들었다.’
더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수천, 수만 년이 흘러도 테라는 유지될 것이다.
수많은 초월자가 감당하지 못하는 때가 온다면 그땐 자신이 나서면 된다.
‘내 재능은 진짜다.’
드낙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이 흐릿해졌다.
‘파동의 경지 다음 단계가 벌써 시작됐다.’
드낙이 원하지 않아도 그의 경지는 뜀박질하고 있었다.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경지였다.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는 은퇴하기 위해 구매한 1만 평의 땅에 살아가게 됐다.
길은 사 차선 도로로 제법 넓게 만들었다.
남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물품은 택배를 받아서 생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로 태평한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은퇴하는 드낙을 위해서 앞으로 살 곳도 택배 가능 지역으로 해준다고 했다. 물론 택배비는 더 많이 내야 했다.
오로지 드낙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택배 한 건당 웃돈을 얹어줘야 했다.
‘제주도에서 택배 시키는 거랑 비슷하네.’
지방에서 생산된 물산은 서울로 모이고, 그다음에 다시 지방으로 향한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한다. 돈이 모인 서울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만큼 사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드낙은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보면 된다.
사 차선 길을 만드는 공사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드낙은 마법을 써서 이를 해결했다.
아스팔트도 결국에는 흙.
특정한 주문을 통해서 능히 이를 깔 수 있었다. 나무를 치우는 것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다른 권력자라면 비웃었겠지.’
1,000조 자산가가 밭일하겠는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드낙은 하고 있었다.
‘울타리도 쳐놓자.’
1만 평 부지에 울타리도 만들어서 경계선을 만들었다. 위협적으로 보일 생각이 없었기에 투박한 울타리면 족했다. 동물들이 오고 갈 수 있도록 관련 길도 만들었다.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가능했지만, 만약 경고판을 해놓았는데 들어올 경우엔 법으로 처벌을 하면 그만이다.
동물 길을 만들고 난 다음에 드낙은 땅의 지반을 높였다. 완만한 언덕이 더욱 높아졌다. 끝에 가서는 가파른 절벽이 완성됐다. 그곳에 서서 드낙이 바닷가를 바라봤다.
‘높은 곳에서 보니까 더 좋다.’
아무것도 안 하고 수십 분을 멍하게 있던 드낙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집을 짓고 정원을 만들었다. 그곳에 못도 하나 만들고, 이후엔 개나 고양이 따위를 데려왔다.
“왜 이렇게 못생긴 거냐.”
드낙은 못생긴 고양이를 보며 히죽 웃었다. 아무도 찾지 않은 고양이를 자기 반려묘로 만드는 것.
최고의 기쁨이다.
개는 군견으로 쓰였던 은퇴한 개를 데려왔다. 훈련된 개라서 다루기 매우 어려웠다.
“또 산책하러 가자고? 오냐. 한 번 해보자.”
군견 출신이라 그런지 어찌나 체력이 많은지. 다른 개들보다 몇 배의 산책을 해야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까무러치고 바로 반납했을 터다. 하지만 드낙은 이 또한 하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넌 철식이다. 가자, 철식아.”
“왈왈!”
드낙은 산책으로 철식이의 체력을 개박살을 내서 떡실신 시켰다. 코를 골며 자는 놈의 배를 좀 만져주다가 저녁을 먹었다.
사용인을 3교대로 고용했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저녁을 허하게 먹으면 반드시 야식을 먹는다. 그런 지옥문을 열지 않으려면 점심을 적게 먹고 저녁을 많이 먹어야 했다.
건강을 챙기라며 소식을 권장하지만, 그놈들은 모두 마구니다. 저녁에 적게 먹으면 야식을 먹게 되기 때문이다. 악독한 귀신들이다.
‘두껍다.’
두툼하기 짝이 없는 고기를 보며 드낙이 흐뭇하게 웃었다. 소스도 세 종류나 됐다. 이 정도면 황제 스테이크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식사를 마무리하고 드낙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용인들은 이미 모두 퇴근했다. 밤에 드낙을 지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깊게 잠들었는지 드낙은 꿈을 꿨다.
그 꿈에서는 다이앤타가 나타났다.
“아빠, 은퇴했으니. 이제 저도 제 마음대로 할게요.”
“마음대로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오랫동안 생각해 온 거예요. 이제 저도 결혼을 하려고요? 제 나이가 몇인데요.”
꿈속의 드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앤타의 나이가 벌써 오십이 넘었다. 그녀는 반마의 격을 얻으며 불로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결혼은 막지 않으마. 근데, 상대가 누구냐?”
꿈속의 다이앤타가 짧게 답했다.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었다.
“도렌이요.”
“뭐! 누구라고?!”
드낙은 자신도 모르게 꿈에서 깨어나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고는 꿈이라는 걸 알고 안도했다.
‘다이앤타한테 부족한 건 전부 도렌한테 있잖아?’
거기에 도렌도 미혼이다.
‘설마?’
드낙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가 이내 침착했다. 이건 꿈일 뿐이라고. 그는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다음 날, 곧바로 다이앤타를 찾아갔다.
“은퇴하신 분이 웬일이세요?”
다이앤타는 여전히 집무실에 있었다. 초월자에 올라서면서 자신만의 ‘세력’ 혹은 ‘국가’를 만들어야 했기에 사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너, 결혼 생각 있냐?”
“…은퇴하시니까. 이제는 딸 결혼까지 챙겨주시려고요? 됐어요.”
“벌써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거야?”
“제 나이가 몇인데요. 하나 정도는 있어요.”
“누구? 도렌은 아니지?”
“…….”
다이앤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나이가 이제 오십이 넘었다. 이런 참견은 원하지 않는 참견이다.
“이스핀? 이스핀이냐?”
“그 사람은 이미 가정이 있잖아요!”
그녀가 발끈했다.
“거기에 제 나이를 생각하세요. 이성을 만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예요.”
“그건 그렇긴 한데… 도렌은 아니지? 걔랑 너랑 나이 차이가 얼만데!”
“그냥 가세요. 도렌도 아니니까.”
드낙은 결국 성과 없이 나오게 됐다.
‘자식 일 때문에 뿔쥐를 닦달할 수도 없고.’
드낙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이후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보니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검은색의 롱 원피스에 주름이 잡혀 있었고, 허리를 묶는 허리띠도 일색이다. 밝은 갈색의 작은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복지 재단은 어찌하고?”
“다른 사람한테 넘겼어요. 직접 맡아서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쉽게 넘겨줬나 살짝 걱정했는데 오히려 홀가분했어요.”
레이시아의 대체제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 세상에는 그녀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녀의 일을 대신할 이들이 많이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일에 대한 열정이 팍 식어버렸다.
“들어가자.”
드낙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가볍게 잡고 당기자 레이시아가 드낙의 품으로 들어왔다.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녀는 드낙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 그림 속에 당신을 그려보고 싶어요.”
“얼마든지.”
드낙이 환하게 웃었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