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1238화 (1,236/1,239)

1238화

45. 대단원 (6)

드낙은 ‘격’의 분배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골고루 뿌린 신이 넷. 내 입맛대로 뿌린 악마가 둘.’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다. 수수료 30% 먹는 독과점 괴물과 비교해도 더 뛰어난 성과다. 그리고 기존의 초월자까지 합친다면, 9개체가 테라와 연관되어 있다.

‘때가 되었다.’

드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장 먼저 늘 자신의 의견을 반대했던 세파리아스를 찾아갔다.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원 전쟁을 겪은 뒤 드낙의 능력은 날이 갈수록 쭉쭉 상승했다. 이제 그는 ‘테라의 영향권’ 내에 있는 이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게 다른 차원이라도 가능했다. 또한 테라의 생물이 그 차원에 넘어가서 살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확인이 가능했다.

세파리아스는 신제국에 마련된 차원 다리 출입구 옆에 새로이 별궁을 짓고 그곳에서 거주 중이었다. 테라의 지상이 개박살이 난 지금, 태양 차원에서 들어오는 식량은 대단히 중요했고, 이를 초월자가 직접 지키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그는 이전 싸움을 복기하며 칼을 가다듬고 있었다. 무인(武人)이라면 해야 하는 일이다.

바둑을 두는 바둑 기사도 복기를 한다. 심지어 수능을 준비하는 이들도 오답 노트를 만들어 복기한다.

‘싸움은 찰나에 불과한 것.’

그 과정은 책을 속독해서 읽는 것과 같았다. 3회 독, 10회 독 해야 하는 전공서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앞을 위해서라도 잘 체득하려면 싸움 복기가 필요하다.

복서들이 영상을 통해서 계속 돌려보며 상대의 습관을 찾는 것도 이와 같다 할 수 있다.

이 중요한 시간은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시간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햇빛이 들어오는 양지와 그늘진 음지가 공존하는 넓은 마당과 집의 교차점. 물소리가 들리는 못 하나가 있는 곳.

가만히 하루를 보내며 그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자만이 가치를 아는 이 장소의 중심에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인간의 몸을 한 채 검 하나 쥐지 않고, 차분하게 우뚝 서 있다.

동양의 가부좌를 트는 것과는 달랐다.

가만히 서 있는 세파리아스의 근육이 꿈틀꿈틀한다. 복기 행위가 어찌나 현실적인지, 뇌의 념(念)에 따라 근육이 화들짝 놀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평범한 감상으로 거기에 도달하려면 마약, 환각, 꿈. 그런 힘을 빌려야 했다. 혹은 고통도 필요하다. 현실에서 무릎에 성장통이 오면 계단에서 추락하는 꿈을 자주 꾸기 마련이다.

그가 눈을 뜨고 앞에 서 있는 드낙을 바라봤다.

흉심(凶心)이 깃들어있었다.

싸움의 복기는 상대를 죽이는 것.

그런 마음가짐 하나 없이 싸움의 복기를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리얼리티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드낙을 상대로 싸움의 복기를 한 세파리아스를 드낙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어리석은 놈. 세상의 하루는 같을지언정, 10년은 다를 것인데,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세파리아스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드낙 같은 놈이 매일같이 수련에 정진한다면 가히 ‘전 차원’을 아우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복의 길은 세파리아스가 걷고 싶은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드낙은 수련하지 않았다. 그런 놈을 비우기에는 세파리아스가 움켜쥔 게 너무 많았다. 그는 지금도 드낙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지금 해봤자, 소용없지.’

지금의 드낙은 그때의 드낙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변하기 전까지 세파리아스는 그를 설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한 것만 해도 잘한 거지.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불완전했을 때, 차원 침공을 준비하느라 드낙도 나름 노력했다. 하지만 그 목표도 이제는 달성되어서 사라져버렸다.

세파리아스는 그가 이렇게 오기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를 붙잡았던 마지막 손길마저 사라졌다. 드낙이 이제 할 일은 하나뿐이다.

“초월체가 많아졌으니, 난 이제 내려놓을 생각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이제 테라는 그 어떤 차원 침공에도 버틸 수 있게 됐다.”

죽는 사람은 많이 나오겠지만, 드낙이 알 바가 아니다.

그는 이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보상은 내려놓는 것이다. 모든 걸 비우는 것이다. 책임이 그를 파도처럼 휩쓸었지만 드낙은 그런 책임을 자신이 짊어질 수 없다고 여겼다. 그건 취향의 문제였고, 기질의 문제였다.

당장 평범한 기질을 지닌 사람 붙들어놓고 대통령을 시킨다면, 그 사람은 한순간에 모든 걸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네가 잘 해야 한다. 공세를 취해서 차원을 정복하고, 테라와 연결시켜야 한다. 양질의 인재를 테라로 데려오는 것도 필요할 거다.”

“…….”

세파리아스는 조용히 드낙의 말을 경청했다.

권력자.

지배자로서의 드낙이 하는 마지막 말이었다.

“파벌을 여럿 만들어라. 하나만 있다면 그들은 가장 먼저 너를 내칠 것이다. 네놈은 검이다. 칼날이 바짝 서 있는 검을 좋아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에 있냐?”

그걸 피하려면 항상 분열을 종용해야 했다.

“종족 회의건 대종족 회의건, 무엇이 되었건 필멸자들을 뭉치게 만들어라. 너한테는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다른 초월자에게는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건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이번에도 뒤통수 처맞고 고꾸라져서는 안 되지 않겠냐?”

이에 세파리아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드낙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을 몇 번이나 빠르게 깜빡이고, 한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은 자신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

“아이러니하다. 가장 강한 내가, 가장 약한 이를 키워야 한다는 게 말이다.”

“흐흐흐!”

드낙이 킬킬 웃었다. 평범한 이들에게 세파리아스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세파리아스의 검에 죽임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초월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언제고 위협이 되는 세파리아스라는 무도한 자를 죽이고, 편안해지고 싶을 것이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놈이 같은 하늘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렵기 때문이다. 드낙은 거기서 예외였다. 그렇기에 그는 세파리아스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종족 의회는 나를 위해서 뿔쥐들이 주도한 것이지만, 그 혜택은 간접적으로 너도 받을 수 있다. 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라. 마지막으로 좀 고개를 굽히고 살아라.”

“뭐라?”

“고개 좀 숙이고 다니라고.”

“…싫다.”

세파리아스의 고집을 본 드낙은 그 나름대로 판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파리아스는 이런 놈이었다.

“그럼 됐다. 앞으로 테라를 잘 부탁한다. 다른 놈들 벗겨 먹을 시 내 얼굴 볼 준비하고. 놀고 싶으면 완전 다른 차원에서 놀아라.”

“넌, 그걸로 만족하느냐? 지금까지 올라선 권력을 모두 포기하는 꼴이다.”

“돈은 많이 챙겼는데? 뿔쥐들도 있고.”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네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인간의 욕구는 계속해서 변한다. 수능 칠 때의 고 3. 수능이 끝나고 나서의 고 3. 대학 입학한 새내기. 사회인……. 모두 같은 자신이지만, 그때그때 원하는 게 달랐었다. 얼핏 보면 조헌병 환자처럼 욕구가 변한다.

드낙 또한 그럴 것이다.

“그때는 그때인 거고. 지금은 지금이고.”

드낙이 쿨하게 대답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지금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있었다. 모든 자유민들이 원하는 행동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그런가? 후회해도 다음에는 네가 올 자리는 없을 거다. 다른 차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네가 버린 권력을 나중에 가서 되찾으려면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소리다.”

“난 위에서 존경받는 삶을 원하지 않아.”

“뿔쥐들한테 그렇게 존경받는데도?”

“천천히 사그라들겠지. 죽은 권력을 추구하는 X신들은 아니다.”

세파리아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미 드낙의 자아는 실현되었다. 그는 완성된 인간이었다. 자신과는 달랐지만 분명 완성되었다.

그저 다른 것을 추구할 뿐.

“좋다. 그대의 추락을 허(許)하노라.”

세파리아스가 드낙의 추락을 허락했다.

“분위기 잡고 있네. 아무튼, 난 이걸로 간다.”

“다른 이들도 만나보고 가라. 혼란이 있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네 부인들. 그들도 해결해라. 하나같이 권력을 탐하는데, 지금까지 네 눈치를 보고 살았다.”

그 족쇄를 풀라는 소리다.

드낙은 고개만 까딱이고 사라졌다.

“흥.”

세파리아스는 눈을 좁히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제는 그 파동 세계라는 것도 체감할 만하다.’

더는 자신에게 파동으로 재미를 보지는 못할 것이다. 세파리아스는 가만히 있다가 결국 급하게 사람을 불러 명했다.

“드낙이 은퇴한다. 그를 위한 역사서를 편찬하고, 배포할 준비를 해라. 5년간 필수교과목으로 지정하겠노라.”

드낙의 인생에 세파리아스도 빠질 수 없다. 이는 그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선례를 남길 때 가장 욕을 많이 받는 법이지. 미안하다, 드낙아. 신제국에서 욕 좀 받고 가라. 가는 길에 꽃만 받고 가면 남은 자들이 섭섭하지 않겠느냐?’

세파리아스가 드낙이 사라진 곳을 보며 미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 번 올라선 산의 정상에서 내려올 때, 굴러떨어지는 흙과 돌을 맞지 않는 자가 없다. 그래도 이렇게 작게 받으니, 드낙은 실로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 * *

드낙은 자신들의 부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레이시아 플래티넘은 전쟁 이전에는 복지와 예술에 힘을 썼고, 지금은 예술가들의 입에 풀칠을 해주고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복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막대한 재단은 다양한 세력들이 주는 후원금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중에서 15%는 개인 후원금이었다. 개인 참여가 굉장히 낮았는데, 그만큼 살기 팍팍해서다.

돈 있는 자들이 적었고, 있더라도 전쟁 직후라 돈 쓰는 마음이 위축되어 있었다. 소비 심리가 없는데 후원 심리라고 있을까? 없었다.

그 덕에 플래티넘 재단은 심히 위험한 수준이었다. 레이시아는 자기 이름으로 부채도 많이 달아놨다. 드낙이 이를 모르는 까닭은 그녀가 이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서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드낙 카드를 쓰면 한 방에 해결되지만 그것마저도 빚이다. 그러니, 이자를 더 채워 넣어야 했다.

커피를 앞에 두고 레이시아가 피곤한 기색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예전 같은 열정이 없어 보였다.

‘지쳐있네.’

“눈 밑이 검은데, 괜찮아? 커피라도 좀 마셔.”

“고마워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최근 재건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니신다고 들었는데…….”

사람 힘들게 살아가는데, 일은 안 하고 왜 여기에 왔냐는 식이다.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었잖아. 현재로서는 조급해 봐야 소용없어. 이제는 시간이 지나야지.”

효율성이라는 게 있다. 부동산도 세월로 업어가는 것이지, 상승장에서 난리를 피우려면 전업을 해야 했다. 드낙이 재건을 돕는다고 무작정 좋은 게 아니었다.

‘댐 몇 개 만들어줬으니, 알아서 잘해야지. 어디서 감히?’

“내가 괜히 일 때문에 왔을까? 내 아내 얼굴 한 번 보러왔지.”

드낙과 레이시아는 오랜만에 사담을 나누고, 수십 분이 흐르고 나서야 드낙이 본론을 꺼냈다.

“세파리아스에게 다녀왔다. 난 내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부인들에게 하지 말라고 말을 많이 해놨는데, 이를 되돌리려고. 다른 이들에게 사업을 도와달라고 할 생각이다. 그걸 물으려고 여기 왔다.”

“다른 부인들에게도 그 말씀을 하실 생각이군요.”

외척에 도움을 받은 게 많다. 하지만 외척이라고 제한받은 것도 많았다. 그 제한이 풀리게 된다. 또 드낙이 물러나기 전에 보상해 주기 위함이다.

“…….”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답은 나중에 줘도 된다.”

그다음 드낙은 세리안 불파겐과도 마주했다. 그녀는 여전히 권력과 사람을 아래에 두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다.

“받아들일게요. 전 저만의 나라를 얻고 싶어요.”

“공국이라도 괜찮겠느냐?”

“네. 하지만 평야에 있었으면 해요.”

세리안은 철면피였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러지 말고 해안가를 끼고 있어라. 배는 언제고 화물의 중심이다. 항구의 지분만 가지고 있어도 망하지 않는다.”

세리안이 크게 기뻐했다. 그녀는 정말로 드낙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수많은 이권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드낙은 공국의 이득과 세리안의 미래를 생각하여 수많은 것을 안배해 줬다.

그 중심에는 뿔쥐가 있었다. 세리안은 초월자이며, 공왕이 될 사람인데. 거기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로도 그 외 수많은 부인을 드낙이 만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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