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7화
“악마를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행성의 방패가 되는 일입니다.”
전사는 검도 방패도 될 수 있었다. 하물며 악마 또한 검이고, 방패고 될 수 있다. 또한 파괴자가 수호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외적을 토벌하는 검으로서, 썩어빠진 나라를 새로이 건국하는 것과 같았다.
“쓰임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이앤타 또한 악마의 길을 걷고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까지 악마가 된다면 인간 출신은 모두 악마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크레시미르는 개인이 아니다. 그는 공인된 사람으로 타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국회의원은 죄를 몇 번 저질러도 어떻게든 복귀를 하지만, 연예인은 음주 한 번에 나락까지 갈 정도로 엄격한 법이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에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하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드낙은 자신에게 명분이 없음에도 무식하게 나갔다. 이에 결국 크레시미르가 설득하기 위해 이어서 말했다.
‘내 밑천을 모두 드러내도 설득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저는 권속 악마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마 또한 능히 신처럼 정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악마의 악마 세계를 마주했으니, 그럴 마음을 품을 만했다.
“악마 세계를 말하는 것이더냐? 권속 악마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고 싶은 대로 만든다고 해도 나중이 골치 아프다.”
미국으로 건너간 가물치처럼, 생명이란 건 그렇게 쉽지 않다. 드낙조차도 지성을 지닌 권속 악마를 다스리는 데 왕을 세 명 두어서 다스리게 했다.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
그러나 이를 건드리는 건 심사숙고해야 했다.
“저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저는 제 자손들 또한 반마 혹은 악마로 만들어 이를 다스리도록 할 생각입니다.”
그 말에는 깊은 세월이 깃들어 있었다. 드낙은 잠깐 감탄하며 말을 내뱉었다.
“몇 년을 생각하느냐?”
“이미 테라는 안정되었고, 더 이상의 외적 침입은 예상되어 있지 않습니다. 최근에 발행된 보고서에 나와 있듯이 운석 마수는 행성 하나를 통째로 소모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까? 마신 또한 그런 짓을 자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평화의 시대에 긴장하며 무리하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기회는 언제나 위기와 함께 오기 마련이다.
“말을 돌려서 말할 줄도 알고, 잘 자랐긴 잘 자랐구나.”
드낙이 웃었다.
“300년에서 500년을 주기로 하나의 권속 악마를 만들 생각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산업을 도맡아서 할 것이며, 항상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길을 택하도록 관리를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 말에 드낙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저는 아버지처럼 삼위변종악마를 둘 수가 없어서요.”
경지를 깨우치지 못한 크레시미르의 전투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껏 해봤자 반마 그것도 하급 정도 수준의 인재들을 아래에 둘 것이다. 그 이상이 되는 이들도 손에 꼽을 터다.
“좋다. 한번 해봐라. 다만 다른 차원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차분하게 지내라.”
“예.”
크레시미르가 물러갔다. 신격을 획득했음에도 발데마르는 자기 자식에게 신격을 주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매정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시간은 아직 넉넉했다.
‘나는 기다리는 법을 몰랐지만, 너희들은 알았으면 한다.’
다이앤타는 애초에 드낙을 찾아오지도 못했다. 그녀는 인복을 타고나지 못해서 직접 일을 했기에 대부분의 일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반면 크레시미르는 따르는 자가 많았음에도 그들을 경계하는 모습을 ‘권속 악마’를 통해서 보았으니 더욱 걱정할 것이 없었다.
“크레시미르에게는 더 많은 업(業)을 먹이고…….”
드낙이 아련한 눈빛을 했다.
‘이제 때가 되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었다.
드낙은 자신의 딸 중에서도 가장 친숙한 다이앤타에게 찾아갔다.
“하아!”
늦은 새벽까지 일을 한 그녀는 더는 예전의 악마 같았던 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성군이라 할 만했다. 새벽까지 일하는 상사는 있어도, 새벽까지 일하는 보스는 매우 드물다. 크레시미르와의 경쟁이 아니었다면 다이앤타는 죽어도 그런 보스가 되지 못했을 터다.
“잘하고 있느냐?”
“아빠. 여기엔 또 웬일로 오셨어요?”
그녀가 불편한 기색을 어김없이 드러냈다. 다른 곳에 있을 사람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불안감이 엄습했을 것이다. 드낙은 일을 잘하면서도 갑자기 일을 쉬기도 하고, 하던 일을 떠넘기기도 했다.
싫증이 난 탓이다.
그런 걸 다른 사람을 통해 여러 번 익히 들었으니, 그녀의 표정이 안 좋아질 만하다.
“됐다. 일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은 아니라, 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와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에 드낙이 크레시미르에 대해서 말해줬다.
“음… 전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지금 당장 테라의 재건에 전심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크레시미르와는 여건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달랐다. 그런데도 다이앤타는 불평 하나 하고 있지 않았다.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면, 나한테 한마디라도 하지 그랬느냐.”
“오라버니는 그런 소리 한마디 안 하고, 인재를 찾았는데요.”
재벌가에서 말 한마디 하면 자식에게 좋은 사람을 붙여준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그마저도 운에 맡기거나, 스스로 찾아다녔다. 크레시미르가 그러했으니, 다이앤타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그걸 딸의 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인재란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고, 운이 따라줘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강 밑을 보듯이 살필 수도 없으며, 갈대처럼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너에게 사람을 내려줄 생각이다.”
“전 됐습니다.”
“고집은 그만 부려라. 인정하는 것도 발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그 말에 다이앤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앞에 놓인 커피를 거침없이 마셨다. 카페인을 새벽에 마시는 상여자가 바로 그녀였다. 야근의 끝을 바라본 여자는 분명 인정받을 만하다.
“제가 오라버니보다 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일단 운이 없지. 지지리도 없어.”
그 경박한 말에 다이앤타가 울컥했다. 하지만 그보다 실력이 없단 건 아니라서 소리까지 지르지는 않았다.
“인정하고 나면 그 단점을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고, 역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다못해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도 할 수 있지.”
“…어디 떠나시는 건 아니죠?”
“내가? 내가 이 좋은 테라 땅을 두고 어디를 가겠느냐?”
드낙이 웃으며 이를 넘겼다. 하지만 다이앤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가만히 계셨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이것저것 참견도 하고 그러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오늘처럼 작정하고 오신 적은 한 번도 없었죠.”
그 말에 드낙이 빙그레 웃었다. 여전히 감이 좋았다. 아마 그것 덕분에 다이앤타가 홀로 크레시미르의 길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사업과 선택. 그걸 직감적으로 실패하지 않고, 외줄 타기를 하며 크레시미르를 필사적으로 쫓았을 거다.
그 직감이 지금에 와서 드낙이 이상한 것을 또 꾸미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너도 이제 산에 올랐으니, 날아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무엇을 제게 주시려고요?”
다이앤타가 눈을 반짝였다.
“크레시미르가 악마의 길을 걷는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거기에 그놈은 지금까지 항상 자신을 증명해 왔다.”
거기에 크레시미르는 드낙의 핏줄이기도 했다. 다이앤타 또한 그의 핏줄이었다. 다른 이보다 우대를 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대악마 두 놈을 내가 먹어 치웠다.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크레시미르는 갑자기 악마가 되겠다고 했지.”
그 말에 다이앤타의 눈이 빛났다.
‘이런 내막이 있었구나.’
악마 침공의 가장 큰 먹거리는 ‘대악마’ 그 자체였다. 그걸 누가 먹었는지에 대해서 떠드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수군거리며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평범한 사람이 떠드는 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진짜 목소리가 있는 자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목소리를 내는 자들.
그들은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언론이란 곳에서도 재건 사업에 대해서 떠들고, 이재민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그 가장 큰 먹거리가 드낙에게 있을 것이 틀림없기에 애초에 떠들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을 엄청난 것인 것처럼 떠드는 X신은 없었다. 대한민국이 투표를 하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엄청나다고, 매일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냥 미친 사람일 뿐이다.
“그랬군요. 저는 몰랐네요.”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일에 치여 살았다고.”
그런 인간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벌레와 같은 삶이다. 여유는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심지어 꿈을 좇는 이조차도 때로는 여유가 필요하다. 태양에 가려진 별을 봐야 할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법이다.
“결국 오라버니는 지금의 힘을 위해서 악마의 길을 선택했군요.”
“내가 줄 수밖에 없다고 여겼겠지.”
건방지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크레시미르는 그만큼 잘 해왔다. 그런 자를 대우하지 않으면 머리가 깡통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급하게…….”
모든 것이 끝났고, 재건을 한 다음 테라의 방위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똑같은 것에 당해주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열병기를 마주한 냉병기처럼 다른 것으로 대체되며 발전할 뿐이다.
“테라는 이제 안전하고, 또 방위 체계도 계속 발전할 거예요. 무엇보다 테라와 만신전 기술의 융합이 가장 기대돼요.”
다이앤타의 말에 드낙도 수긍했다.
“크레시미르는 감정이 있고, 그는 이 전쟁을 고스란히 마주했다.”
잔혹한 심성이 ‘근본’인 다이앤타와는 달랐다. 교육받아서 사회에서 활동하는 다이앤타와 법 없이도 살아가 수 있는 크레시미르는 기질 자체가 다르다.
다이앤타가 이번 전쟁을 겪고, 마음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한 건 사람의 목숨을 깊게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가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말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십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법이다.
학살자, 항우 또한 영웅은 영웅이다. 시대가 흐르고, 나라가 바뀌면, 학살자도 영웅으로 추대받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학살을 저지른 조조도 그러할진대, 지금 시대에 영웅으로 부르지 못하는 이도, 결국 세월의 흐름 속에 빛을 낼 날이 올지도 몰랐다.
크레시미르와는 반대로 난세에 활약할 수 있는 것이 다이앤타였다.
“그럼 결론은 오라버니가 악마가 될 것이니, 저도 악마를 시켜준다는 말씀이세요?”
그녀가 펜을 놓고 일어났다. 일을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
“기쁘긴 한데, 너무 급하신 거 아닌가요?”
다이앤타의 물음에도 드낙은 능숙하게 굴었다.
“급하기는. 이번에 얻은 신격만 4개다. 이를 신제국에도 주고, 지하 연합에도 주고, 카실레안에게도 주고, 엘프에게도 줬다. 이처럼 마음껏 베풀었다. 악마의 권좌는 내 마음대로 써도 괜찮지 않겠느냐?”
드낙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너희 둘이 안 받는다면 누가 받겠느냐? 후보자가 있느냐?”
“상위국 쪽에 주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요.”
“너와 상위국이 완전히 관계가 없는 건 아니니 괜찮다.”
세리안도 이해할 것이다.
다이앤타는 이내 기쁨을 밖으로 표출하며 드낙에게 안겼다.
“잘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아빠.”
“지금까지 지켜봤다. 벌써 수십 년이 흘렀다. 넌 잘할 거다. 대신, 크레시미르가 하는 것을 항상 참고하도록 해라. 네 오빠는 참고하기 딱 좋다.”
“네. 그럴게요.”
그녀는 자신의 부족함을 결국 받아들였다. 악마의 권좌가 들이 밀어졌는데, 인정하지 않는 건 너무 손해였다.
드낙은 그렇게 자기 아들과 딸을 초월자로 만들었다.
어려움은 없었다. 반대도 없었고, 더 많은 초월자가 필요했기에 빠르게 진행됐다. 테라는 그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