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3화
44. 대단원 (5)
드낙은 행성 밖으로 나가서 본인 육체에 들어간 뒤, 대악마가 있는 대해로 한 번에 이동했다. 순식간에 수색해 보니 3시간도 되지 않아서 대악마 두 개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놈들은 정신이 제대로 죽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다른 자아가 모습을 드러내겠지.’
대악마의 육신은 그 자체가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힘이 주인을 잃는다면, 새로운 주인을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그게 힘과 육신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드낙은 가장 위협적이었던 마룡, 아카타베루부터 포식했다. 이내 아카타베루의 육신이 흡수되었다. 모두 먹어 치우지는 못했지만, 일단 몸과 합쳐버렸다. 아스모데의 육신 또한 집어삼켰다.
“꺼윽!”
‘반동이 심하다.’
드낙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바닷속에 풍덩 추락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대악마 둘!’
그들의 육신을 먹어 치웠다. 이를 소화시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는 드낙도 알 수 없었다.
‘격이 높아지면, 나도 대악마가 될 수 있겠지.’
대악마가 되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진다. 테라 행성 자체를 육신으로 보호하는 것도 가능할 거다.
드낙은 곧바로 세파리아스에게로 향했다. 뿔쥐가 행성 내부로 들어온 덕분에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파동으로 이동했다. 물론 종종 주변을 훑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중에 대양의 한가운데에 멈추기도 했다.
바다는 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육지에서 흐르는 피가 바다까지 흘러들었고, 아주 농밀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나 많이 죽었단 말인가.”
대부분이 권속 악마겠지만, 고만고만한 권속 악마들이 죽었다. 적게 죽어도 테라 또한 피해가 막심할 것이다.
드낙은 해안가에 도착했다. 아직도 드워프들이 어기적거리며 바닷물과 흙이 뒤섞인 진흙탕에서 권속 악마 무리와 부닥치고 있다.
‘신경 쓸 필요는 없겠다.’
드워프들은 죽고 싶어도 쉽게 죽지 않는다. 죽고 싶은 드워프는 잠을 자버리고, 자다 보면 세월이 많이 흘러서 죽고 싶은 마음도 결국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드낙은 해안가를 지나 내륙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파리아스를 추적하여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음?’
세파리아스와 쌍벽을 이루며 부딪치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멀끔하게 생겼지만 잘생기지는 않았다.
‘세파리아스와 쌍벽을 이루는 자가 있다니!’
드낙이 깜짝 놀랐다. 그것도 서로 무기를 들고 싸우고 있었다. 그건 드낙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상대의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프로 스포츠의 세계도 홈그라운드는 중요한 어드밴티지로 여겨진다.
원정을 나가면 승점 방식을 조정할 정도다.
드낙과 세파리아스의 싸움은 저렇지 않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경쟁하는 셈이다. 문과와 이과가 서로 자신의 학문이 더 우월하다고 침 튀기며 입씨름을 하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서로의 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평행선을 달리기 마련일 터.
아무튼 드낙과 세파리아스의 싸움이 이와 같다. 서로를 죽일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데 여기서 세파리아스의 대적자가 등장한다고?’
이건 놀라운 일이다.
간사한 드낙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상대를 죽여서는 안 돼. 세파리아스를 견제할 수단이 될 수 있다.’
지금은 드낙도 세파리아스와 검을 나누지 않는다. 대신 검을 부딪치지 않고, 싸울 수 있을 뿐이다.
“멈춰!”
드낙이 외쳤다. 하지만 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 집중했다. 검과 검이 부딪히고, 무릎이 뒤엉켰다가 서로 배를 이용해서 밀어내고 다시 싸우고 있었다. 거기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세파리아스의 영향무력과 카실레안의 상쇄의 권능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개판이네.’
“세파리아스! 네가 더 많이 다쳤으니까. 네가 물러서!”
세파리아스는 드낙에게 전혀 시선도 주지 않고, 입도 꾹 다물어 있었다. 그는 극한으로 집중하고 있었고,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보다 신장이 두 배 정도 낮은 이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어이! 그럼 네가 물러나!”
드낙이 카실레안에게 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이들은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별수 없이 드낙은 파동으로 변해서 놈들을 사이좋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세파리아스와 카실레안이 서로 노리는 것을 잠깐 멈추고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세파리아스는 공격하지 않았고 카실레안은 반격하기도 했지만 드낙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히죽.
드낙이 30m 정도 뒤에서 웃어 보였다. 이에 카실레안이 눈을 깜빡였다.
‘놀라울 정도로 기민하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대책을 세울 수 있어 보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세파리아스처럼 드낙의 삶을 지켜본 자가 아니었기에 당혹스러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왜 그렇게 죽을 기세로 싸우는 거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물러나라!”
세파리아스는 한창 좋을 때를 방해한 드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하면 더 많은 것을 가늠할 수 있었고, 이를 체득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면 실력이 더욱 늘어날 터였다.
그건 카실레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를 드낙이 따를 리 만무했다. 그는 무인이 아니다.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을 뿐이다.
“인신이라면 악마 쪽에서 온 건 아닐 테고, 마신도 아닐 거다. 아마 만신전이겠지? 세파리아스, 합공해서 죽이자. 너 혼자서 싸웠을 때, 쌍벽을 이뤘으니. 쉽게 죽일 수 있다.”
그 말을 세파리아스가 비웃었다.
“쉽게 죽인다? 말은 쉽다. 하하하.”
그런 드낙을 향해 비웃으며 세파리아스가 자세 잡는 것이 보였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드낙을 통해서 카실레안의 모든 것을 끄집어낼 수 있다면, 할 만하다고 여겼다.
반면 드낙은 세파리아스가 그렇게 나오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가 안 하던 짓을 왜 하지?’
본래라면 꺼지라고 말하든가, 물러나라고 말하든가, 헛소리 그만하라고 말해야 했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드낙은 카실레안과 세파리아스를 중재할 생각이었다.
그게 실패한 셈이다. 이렇게 대놓고 합공해서 죽이자고 말하다니.
그제야 드낙이 카실레안을 자세히 훑어봤다.
남자의 뜨끈한 시선에 카실레안이 얼굴을 구겼다. 결코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그때 드낙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다고 카실레안의 곁에 온 것도 아니다. 그저 목소리만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이놈이 중립신 수준으로 위험한 놈이라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쉭―
아주 미약한 소리가 나자 카실레안이 이에 응수했다. 칼 소리는 나지 않았다. 드낙이 뻗었던 손을 파동과 함께 뒤로 물러난 덕분이다.
“제법인데. 근데 조금 늦었어.”
그 말과 함께 카실레안의 볼에서 작은 피가 송골송골 맺히더니 주륵 흘러내렸다. 그 이상으로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아주 미약하게 긁고 지나간 셈이다.
드낙이 충격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카실레안을 보며 히죽 웃었다.
‘녀석. 프라이드가 높은가 보네. 하긴, 세파리아스와 싸워서 쌍벽을 이룰 정도면 얼마나 프라이드가 높을까.’
“가라! 세파리아스! 몸통박치기!”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움찔했다. 그 또한 ‘게임’이라는 문화를 체험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X켓X스터 골드 버전을 가장 좋아하고, 벌써 3회 차 플레이를 하고 있을 정도로 광팬이었다.
“네놈!”
세파리아스가 드낙을 보며 고함을 지르자마자 카실레안이 세파리아스에게 달려들었다.
‘포기할 수는 없지.’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포기한다면 자신은 죽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데. 왠지 실력을 잘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다시 드낙의 몸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드낙은 곧바로 카실레안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건 암살자라 할 수 없다. 대신 세파리아스와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맞추는 일이었고, 서로가 서로를 은근히 밀어내기도 했기에 합을 맞추려면 시간이 걸렸다.
‘안전한 길을 걸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드낙에게 세파리아스가 일갈했다.
“이놈은 익숙한 공격에는 그 어떤 공격이라도 쉽게 막아낸다. 지금 전력을 다해라!”
“그런 권능이 있다니!”
“경지다!”
드낙의 외침을 세파리아스가 바로 정정했다. 이에 드낙이 합을 맞추려는 걸 포기하고, 카실레안을 노렸다.
“윽!”
카실레안은 섬뜩한 기분에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세파리아스가 돌진했고, 측후방으로 드낙이 귀신같이 움직이며 사정없이 카실레안의 몸에 칼자국을 냈다.
다만 드낙은 공격에 필사적이지 않았다.
‘죽이면 안 돼.’
간사하기 짝이 없는 계략을 세워둬서다. 이를 안 카실레안은 세파리아스에게 보다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곤 드낙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죽이지는 못하겠다. 너 같은 놈이 하나 더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거짓말을 숨 쉬듯이 하는구나!”
결국 세파리아스가 물러났다. 신성력으로 계속 상처를 치료했지만, 그 효율이 평상시의 -90%에 달했다. 카실레안의 무구에 치유 억제와 관련된 인신 무구가 있어서다.
인신 무구란 인신을 녹여서 만든 무구를 뜻했다. 만신전의 가장 잔혹한 짓 중 하나였다.
세 명의 초월자는 그렇게 얼떨결에 서로 타협하게 되었다. 싸움을 중단하고, 거리를 둔 채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드낙 또한 그의 이름이 카실레안이라는 걸 알게 됐다.
동시에 만신전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잘만 하면 우리 쪽 초월자로 만들 수 있겠어.’
“만신전 쪽에 머물지 말고, 우리와 함께하는 게 어떠냐? 우리는 이미 두 명의 초월자가 한 차원에 있을 정도고, 앞으로도 더 많은 신들이 탄생할 것이다. 인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의 신들도 탄생한다.”
드낙이 다종족 연합에 대해서 떠들어대었다. 카실레안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를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한 연합이었다.
먼저, 카실레안은 전략가가 아니며, 전술가다. 그는 전략에도 공부를 많이 했지만 평범한 수준에 머물렀다.
그런 그가 보기에는 다종족 연합은 실로 훌륭한 전술적 가치를 지닌 단체였다.
‘지하 종족이라, 만신전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지상 종족만이 살아가는 지구는 어찌 보면 절반을 포기한 것과 같았다. 반면에 테라는 지하 종족이 존재해서, 지하에서도 살아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지상 종족이 필요 없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즉, 똑같은 조건으로 봤을 때 테라가 더 대단하다는 소리다. 그뿐만이 아니라, 해양 또한 개발되고 있었다.
‘만신전은 아니지.’
“산호 지대야말로 해양 보고의 근본인데, ‘내’가 그걸 잘 알고, 수온을 일정 수준으로 높여서 산호 지대가 이제는 대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나중에 가서는 모든 지역에 산호 지대가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바다는 해양 생물들로 가득해질 것이다.
‘놀라운 일이지.’
드낙은 테라를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카실레안은 거기에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세파리아스가 카실레안에게 말했다.
“테라에 적당한 세력을 남겨두고, 차원 다리를 건조하여 다른 차원을 침공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테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실제로 나는 또 하나의 차원을 정복했다.”
“그게 정말인가?”
“맞다. 태양 차원이라 불리는 곳인데, 그곳의 절반을 세파리아스가 가지고 있지. 그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절반은 그저 필멸자들의 세력이 난잡하게 자리잡혀있을 뿐, 내가 직접 관리하는 게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한 차원의 주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걸 용인했다는 것이 대단했다. 내막은 몰라도 다른 조건이 분명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천천히 대화를 해보자고. 이제 악마침공도 전부 끝났고, 마신도 운석을 때려 박아서 침공을 끝냈잖아. 그리고 만신전의 마지막 원정까지 도착했으니. 더는 이런 위협이 없겠지.”
드낙은 그렇게 말하면서 세파리아스의 어깨를 툭 쳤다.
“둘이 생각이 맞는 것 같으니. 잘해보라고.”
드낙은 그 길로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드낙의 기운마저도 느낄 수 없게 되자 카실레안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대가 지닌 것을 일단 모으는 게 좋겠지.”
카실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주 낙원을 최대한 모았다. 인신들은 모조리 죽거나 도망쳤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우주 낙원만 멀쩡하면 된 것이다.
약 80여 개의 우주 낙원이 대해의 상공에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