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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1231화 (1,229/1,239)

1231화

세파리아스는 제법 말이 길었다.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대단히 말이 많았다. 이는 그와 마주한 카실레안이 보통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카실레안은 애초에 군대를 이끌지 않고, 홀로 내려왔다. 그것만 봐도 카실레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만신전의 검이며, 수백 년의 전쟁터를 지나, 40년의 차원 항해 끝에 여기에 도달했다.”

“나와 싸우려고 여기에 내려왔겠지?”

그 말에 카실레안이 히죽 웃었다. 세파리아스도 웃음이 삐져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어느 정도 동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파리아스의 뇌리에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쩌면 드낙보다 위험할지도.’

그렇다고 드낙이 약하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는 세월의 문제였고, 경험의 문제였다. 세파리아스가 드낙과 함께한 세월이 몇십 년인가? 그만큼 드낙에 대해서 잘 알았고, 그에 대한 대책도 마련했으며, 놈을 대처하기 위한 수련도 행했다.

반면, 상대는 처음 보는 상대였다.

그 위험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중립신은 어찌 되었지?”

“죽었다.”

세파리아스가 거짓을 말했다. 실제로는 중립신은 한 번 더 죽었음에도 또 부활하여 대신 육체를 훔치려다가 실패하여 도망쳤다. 그런 것까지 상세하게 말해줄 필요성은 없었다.

“그대가 죽였나?”

“편법을 써서 내가 죽이긴 했지.”

카실레안이 더 말하기도 전에 세파리아스가 발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이에 카실레안도 입을 다물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세파리아스의 눈이 조금 흔들린다.

피식.

그 모습에 카실레안이 웃었다.

“왜? 생각했던 대로 안 되지?”

“…어떻게 한 거지?”

세파리아스는 분명 영향무력으로 상대를 베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즉, 카실레안 또한 ‘어떤 경지’에 올랐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 경지의 이름은 무엇이냐.”

카실레안이 말하자 세파리아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상대 또한 경지에 올랐다.

“영향무력(影響武力).”

“무지막지한 이름이도다. …하지만 그런 이름을 쓸 만하다.”

카실레안이 인정하자 세파리아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필멸자와 필멸자의 싸움처럼 격렬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대의 경지는 무엇이냐?”

“만로(萬路). 만개의 길이라는 뜻이다.”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조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뜻과는 달리, 영향무력을 막을 경지로 보이지 않아서다. 그러든 말든 카실레안은 착실하게 입을 놀렸다.

“영향무력은 아마, 보이지 않는 검격을 뜻하는 것이겠지. 위력을 생각한다면 사거리에 제한이 있겠어.”

“…….”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경지라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내가 맨 처음 얻었던 경지는 필승의 경지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싸우면 승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지였지.”

“지금의 경지와 다른 경지라는 것이냐?”

“그렇다.”

엄청난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알려주는 모습에서 세파리아스는 상대가 싸움 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군?”

그 말에 카실레안이 한 걸음 성큼 움직이며, 칼 두 자루를 등 뒤에 있는 무기고에서 꺼내 들었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누구 마음대로? 이런 기회는 흔치 않지. 하찮은 인신들을 상대로 심심해서 죽을 뻔했다. 상대의 신격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시원하게 싸워보자.”

“좋다!”

세파리아스가 고함을 내지르며 단박에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카실레안 또한 달려들었다.

고수의 싸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선수(先手)를 채가는 것이다.

바둑에서도 선수를 두는 흑이 유리해서 현대 바둑에서는 무려 6집 반~7집을 내어주기까지 한다. 그전에는 5집 반을 내어주면서도 흑수필승이라는 말이 돌아다녔다.

바둑에서도 이러할진대, 싸움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선수는 반드시 취해야 했다. 그 어떤 고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기에 싸움은 바둑처럼 집을 양보해서 밸런스를 맞추지도 않았다. 선수필승은 고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며, 하수도 고수를 밀어낼 정도로 강력한 수단이었다.

미리 뚝배기부터 깨지는데 고수고 뭐고 없었다. 물론 그것 또한 예외가 존재하는 법이었으나 서로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고,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존재하는 세파리아스와 카실레안의 싸움에서는 통했다.

‘선수를 잡는 놈이 유리하다.’

‘선수를 잡아야 주도권을 잡는다.’

첫 주도권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AOS에서 킬 하나를 연거푸 따내며 스노우볼을 굴리는 것이나, 전략 게임에서 시작 빌드로 이점을 가지는 것도 모두 주도권 싸움이다. 주도권은 곧 먼저 선택하는 것.

선수를 잡는 것과 똑같은 의미였다.

‘소용없다고 해도, 상대의 권능이나 경지를 막을 수는 있겠지.’

세파리아스가 영향무력을 최고조로 사용했다. 그 얼굴에 핏발이 서린다.

동시에 카실레안 또한 자신의 경지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만로(萬路).

카실레안의 경지는 총 21번의 변화를 거쳤다.

그가 수백 년 동안 만신전을 대신해서 전쟁을 벌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극히 드문 확률로 변화를 거친 셈이다.

만 개의 길이라는 뜻대로 카실레안을 공격하는 방식이 그가 아는 것이라면, 그 위력이 심하게 감소하는 게 만로였다.

당연히, 카실레안은 ‘세상을 베는 경지’를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세파리아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기만이다.

‘전투는 기만이다.’

얼마나 상대를 속이느냐에 따라 우군의 피해를 줄이고, 적군을 더 많이 죽일 수 있었다.

을지문덕 장군이 일부러 상대에게 일곱 번 패해 일곱 번 후퇴한 것이 아니다. 모두 그를 기만하기 위한 준비였다.

한국인 출신의 전술가인 카실레안이 어찌 을지문덕의 전술을 배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항상 대군을 상대로 소군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 한반도의 무수히 많은 전술가와 전략가들이 많았다.

카실레안은 태어나서부터 노동자 계급이었기에 그는 항상 약자였고, 한반도의 피맺힌 싸움에 깊이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런 간사하고 사악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것 또한 약자의 권리이기도 했다. 나약한 자들은 이를 용서하라고 말하겠지만, 카실레안은 심지가 굵어서 용서란 말도 몰랐다. 꿀처럼 달달한 복수를 원했다.

‘실제로는 권능이지.’

경지를 통해 권능의 부족한 점을 충당하고, 권능을 갈고닦은 것이 카실레안이다. 권능을 쓸 일이 적은 것도 중요했다. 만신전에서의 전쟁은 만로의 위력을 크게 높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어지간한 공격은 만로에 막혀 10분지 1의 위력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혹은 100분지 1로 줄어들 때도 있었다.

‘대신으로 향하는 권능.’

상쇄의 권능이야말로 카실레안의 권능이었다. 초월적인 현상과 힘을 무(無)로 돌리는 권능이었다. 세파리아스의 공격은 권능으로 상쇄하고, 경지로 막은 것처럼 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향무력이 더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권능의 그릇은 어마어마해서 카실레안의 그릇을 모두 채우고도 남았다. 다른 권능을 집어넣지도 못했다. 오래된 인신이 수십 가지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제한까지 있기 때문이다.

‘아마 중립신도 권능의 그릇을 채워서 대신이 되었겠지.’

전초극의 권능이 어떤 제한이 있는지 몰랐지만, 카실레안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립신이 여기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뒤로 제쳐둘 만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카실레안이 세파리아스와 부딪쳤다.

서로의 경지와 권능이 부딪치며, 스파크가 튀었다. 이전과는 달리 세파리아스가 모든 힘을 끌어 올렸기 때문에 상쇄 현상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하하!”

세파리아스가 크게 웃었다. 카실레안의 기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련이 아니라, 실전이며. 상대를 죽이고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싸움이었다. 그 또한 권능을 사용했다.

이름도 단순했던 파괴의 권능을 버리고 새로운 권능으로 삼은 것이 세파리아스였다. 그는 가벼운 권능보다는 무거운 권능을 원했다. 파괴의 권능도 그중 하나였지만, 이상하게도 세파리아스의 그릇을 채우지는 못했다.

그릇을 채우는 권능이 있고, 그릇을 안 채우는 권능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드낙도 이를 알았지만 대충 넘어갔다. 무겁다고 무조건 좋은 권능이 아니다.

권능은 초월자가 되어야만 가질 수 있었고, 악마들도 소유 가능하지만, 대체로 악마들은 권능을 쌓지 않는다. 이미 육체가 초월적이기 때문이라, 더 들어갈 그릇이 없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가벼운 권능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세파리아스는 상대가 권능을 사용한 것을 깨닫자 그 또한 권능을 사용했다. 카실레안과는 다르게 세파리아스는 철저한 무인이었다. 적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더 높은 경지가 더 중요했다.

‘상대가 권능을 사용하는데, 내가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휘익―

카실레안의 쌍검이 순식간에 세파리아스의 검에 흡착됐다. 양 검은 기민해야 했는데, 상대방의 검에 들러붙으려고 하니. 이미 그 의도를 잃은 것과 다름없었다.

반드시 선수를 채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권능이었고, 동시에 무거운 권능이기도 했다. 한 곳에 상대를 흡착시키는 권능이었다. 드낙은 그 권능을 보고, 무림 도사같이 근엄하게 ‘흡차결(吸遮訣)’이라고 헛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카실레안이 단번에 손을 놓고, 박투로 들어갔다. 선수권을 주지 않겠단 뜻이다. 동시에 무릎으로 검 손잡이 끝을 치고, 왼 주먹으로도 쳐서 쌍검이 순식간에 속도를 높이더니 세파리아스를 노렸다.

쐐액―!

단번에 쌍검의 속도가 높아졌지만 빠르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두 개의 롱소드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세파리아스도 한순간에 부러뜨릴 수 있었다. 그런 것이 앞으로 더 나아가서 공간에 자리 잡았으니, 세파리아스의 운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흠칫.

무식하게 몸을 밀고 들어갔다가, 갑옷이 무처럼 쪼개지자 세파리아스가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결코 평범한 무기가 아니었다.

팡! 텅!

단번에 카실레안의 주먹이 세파리아스를 때렸다. 하지만 왼 주먹은 허공을 팡 하고 쳤고, 오른 주먹은 무기에 맞았다.

세파리아스는 뒤로 가며 흡수의 권능으로 쌍검을 허공으로 올렸다. 카실레안이 이를 양손으로 하나씩 잡고, 고함을 내지르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권능과 맞대결을 한 격이니, 힘의 소모가 적지 않았다.

‘이러면 내가 손해다.’

이런 식으로 싸우면 결과가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카실레안이 계속해서 당겨지는 쌍검을 손에서 놓았다. 쌍검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가 등 뒤에 매달린 원반 형태의 무기고에서 단창을 한 자루 꺼내 들고, 원형 방패를 왼손에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세파리아스가 입을 뗐다.

“권능을 사용하지 않고, 실력으로 한 번 겨뤄보는 건 어떠냐?”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다. 세파리아스와 직접적으로 손을 섞는 건 드낙도 하지 않는 짓이다. 단 1초 만에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싸움처럼 이끌어나갔다. 심지어 부딪히고 나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세파리아스가 군침을 흘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 말에 카실레안은 답 대신에 단창을 빙글 돌렸다. 그곳에서 권능의 파동이 일어나더니, 세파리아스의 몸에 중력을 가했다.

“짧은 단창으로 장거리 공격을 생각하다니. 놀랍도록 유연하도다!”

영향무력으로 권능을 베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러기 전에 팽팽 돌아가는 단창으로 계속해서 중력의 권능이 쌓여갔다.

심지어 그 권능은 테라의 중력을 이용하기까지 했다.

“하하하하!”

세파리아스가 흉포하게 웃었다. 7m에 달하는 몸이다. 애초에 중력 자체를 심하게 받는 육신에 중첩되니, 그 압력을 감히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중력 단창을 꺼내 들었으니, 그가 기뻐할 수밖에 없다.

‘생전에는 엘프 기사가 나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초월자가 되어서 나를 기쁘게 하는 무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자가 세월이 흘러 여기에 나타났구나. 역시 내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차원 침공.

오로지 차원 침공만이 세파리아스에게 살아갈 이유를 줄 수 있었다. 강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게 분명하다.

‘대단하다!’

중력 속에서도 움직임에 한 치의 불편함도 없었다. 무의 경지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카실레안이 원형 방패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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