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1화
41. 대단원 (2)
드낙은 해안가를 바라보았다.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것은 아니다. 테라는 단 하나의 대륙만 가지고 있었기에 간척사업은 필수나 다름없었다.
그 결과물로 섬이 몇 개 존재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방파제가 섬을 두르고 있었고, 그 내부에는 창고들이 즐비하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악마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생각을 마친 드낙이 세파리아스에게로 향했다.
“악마가 안 움직인다. 어떻게 할래?”
“해안가에 자발적으로 모인 군대들을 항해시켜야지.”
조용한 악마 때문에 전투 육신을 숨기고,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 세파리아스가 대답했다. 그의 손에는 찻잔이 쥐어져 있다.
40년은 술에서 차로 취향을 옮길 수 있는 세월은 됐다.
“그게 되겠냐? 그렇게 해서 대악마가 테라에 자기 힘을 쑤컹하고 집어넣겠냐고.”
“...경박한 소리 하지 마라.”
“흐흐.”
드낙이 웃었다. 그 웃음에서 세파리아스는 드낙이 벌써 생각해 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낚시하는데 떡밥 하나 안 뿌리고 물고기를 낚으려고 해? 이건 좀 양심이 없었지.”
“대악마가 물 정도의 떡밥이라면 우리도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남는 장사다.”
세파리아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수작질을 부린다는 건 상대에게 들킬 리스크도 있단 소리다. 그렇게 된다면 놈들은 우리가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지.”
“어허, 이게 어떤 떡밥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자꾸 초를 쳐?”
“그럼 말해 봐라. 내 들어보도록 하지.”
세파리아스가 드낙의 상사쯤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 다만 드낙은 그런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듣기 싫으면 말고.”
바로 일어나자마자 세파리아스가 드낙의 옷깃을 잡았다.
“어딜 내빼려고? 여기서 나가면 혼자서 다 할 수 있겠느냐?”
“너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럼 더더욱 내가 관심을 가져야지.”
“알고 싶으면 돈을 내!”
금화가 척 얹어졌다.
“필요 없어!”
“놈! 나를 우롱하려는 것이냐!”
드낙은 세파리아스의 신경을 북북, 북북북 긁은 다음에 자리에 앉았다.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파리아스는 프라이드가 높아서 놀릴 맛이 났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엄지로 가리키면서 세파리아스에게 ‘대악마 떡밥’을 가르쳐줬다.
“신의 씨앗이다. 중립신 덕분에 쌓을 수 있었던 것이지.”
중립신은 드낙을 키웠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필멸자에게 압도적인 업(業)을 능력으로 치환해서 그 육신과 영혼에 새겨넣었다.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용량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립신은 평범한 신이 아니었다.
그는 인신 중에서 유일하게 대신의 좌에 오른 인신이다.
동시에 드낙 또한 모든 인간 중에서도 중립신의 요구 조건에 해당하여 ‘불려온’ 자였다.
그리고 대신과 대신을 만족하는 필멸자가 서로 모였을 때, 그 간극 사이에 존재하는 반짝임은 세파리아스마저도 불러오게 됐다.
“하지만 신의 봉우리는 너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영혼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잠깐 행성에 들어가 있겠다는 거지. 그것만으로도 대악마는 군침을 삼킬걸? 자신의 ‘힘’을 테라에 집어넣지 않고서는 못박일 거야.”
“흠…….”
세파리아스가 드낙의 전략을 훑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네가 안 나타나면 들킬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생각을 못 하게 해줘야지.”
“어떻게?”
드낙은 이상한 표정으로 세파리아스를 바라보았다.
“대악마가 너와 마주하면 내 생각은 안 할걸.”
“흠.”
세파리아스가 긍정했다.
“대악마와 2:1로 싸우는 건?”
“어렵겠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기대하는 표정이다. 어쨌든 세파리아스는 드낙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거짓으로 점철된 ‘중립신의 안배’를 그럴듯하게 꾸미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그럴듯한 뿌리를 만들어야 한다.
“텅 비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마력의 잔향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끝없이 파고들어 가야 한다.”
지하 수십km까지 뻗어나가고, 악마가 있을 해저까지 도달해야 했다.
“도달하기 전에 먼저 대악마가 움직일 거다.”
지하 연합에 소속된 마법사와 주술사가 점진적으로 동원됐다. 하루아침에 수십만 명을 모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점진적으로 모았다.
새하얀 백색의 ‘바짝 메마른 나무’가 지하 공간에 마련됐고, 그곳에 마력과 주력이 스며들어 갔다. 뿌리가 서서히 땅을 파헤치며 지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곳에서 그런 행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드낙은 그런 곳에 자신의 신성력을 묻혔다.
중립신이 키운 반신이 드낙이다. 대악마는 무언가를 분명 느낄 수 있을 터다.
여물지 않은 신의 꽃잎.
그 봉우리를 탐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멘틀을 파헤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금 지하에 뿌리려는 신성력에 대악마는 분명 관심을 가질 것이다.
드낙은 충분히 이를 뿌린 뒤에 그대로 행성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의 육신이 허물어진다.
이를 뿔 쥐들이 받아서 그 육신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그 어떤 곳에서도 드낙의 육신을 건드리지 못할 곳으로 향했다.
어둠으로…….
어둠으로…….
깊은 곳으로…….
행성에 스며든 드낙은 자신의 ‘신의 봉우리’의 꽃잎이 팔락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었지만 이를 움켜쥐었다.
괴이한 감각이었다.
촉감 따위 없었고, 그저 ‘그런 기분’만을 주고 있었다.
‘행성에 녹아들면 안 돼.’
잡아먹힌다.
불길한 기분마저 들었다.
‘중립신도 했던 일이다. 나라고 못 할 건 없다.’
드낙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행성의 업(業).’
독특했다.
드낙은 경험으로 이를 쌓아 올리고, 사냥꾼으로 추적하며 그 비밀을 훑기 시작했다.
아주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으며 깨우치는 바도 적지 않았다.
‘중립신의 기억도 조금조금 들어온다. 행성에 각인되어 있다.’
행성의 각인.
드낙은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의 정신이 각인과 마주했다.
시체가 행성에 떨어지고, 그 몸은 썩고 문드러져 퍼져나갔다.
먼지는 행성에 남았고, 산과 강. 바다에 퍼져나갔다.
“…….”
끝없는 세월의 감각은 드낙조차도 두려워서 기억의 각인을 손에서 놓게 될 정도였다. 그만큼 이 행성은 오래된 행성이었다.
오래된 행성인 만큼 막대한 업이 행성에 녹아 있었다.
‘행성의 업은 상당히 많다. 중립신 놈. 이 엄청난 자원을 왜 사용하지 않았지?’
업이 ‘각인’되어서 자신에게 경험을 보여줄 정도로 대단했다.
‘이 업을 이용해서 행성 크기를 키우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우주선으로 치자면 보조 추진제 같은 개념으로 썼을 것 같았다. 다만 중립신의 모든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드낙은 자신이 어떻게 중립신을 죽였는지, 어떻게 그걸 성공했는지 어안이 벙벙할 때가 많았다.
‘생각해 봤자 결론을 낼 수 없다.’
중립신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드낙은 ‘테라의 각인’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아를 유지한 채 각인을 모을 수 있었던 건 드낙의 격이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 각인을 통해서 ‘가짜 껍질’을 만들 생각이었다.
각인 중에서 중립신의 향이 나는 것을 찾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드낙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그는 사냥의 달인이며, 사냥꾼의 재능을 지닌 자다.
드낙은 중립신의 향이 담긴 각인을 여럿 모아서 길게 펼쳤고, 껍질이 완성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기에, 대악마가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곳에 자신의 신체를 떼어내서 담았다. 드낙의 팔에서 조용히 근육과 피부가 갈라지며 꽃이 피었다. 꽃잎을 펼치지 않은 봉우리는 드낙의 심성과는 다르게 새하얀 백색이다.
이 꽃이 전부 피어나면 인신이 될 수 있다. 드낙이 만약 이를 희생할 줄 안다면 다른 이에게 양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껍질을 숨기는 방법은 간단했다. 드낙이 가짜 껍질을 들고 도망 다니면 된다.
상대는 결코 닿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는 못 할 터다. 아슬아슬하게 잡힐 듯 말 듯 계속 눈에 보일 것이다.
* * *
아카타베루는 해양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소아귀로 이루어진 섬이 둥둥 떠 있었고, 그 아래로는 악마의 피가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그 피는 그저 흩어지기만 하지 않았다. 나무줄기처럼 변해 갔고, 자신의 세력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산호에 들러붙어서 산호의 영양분을 빼앗아 먹었다.
물고기가 뜯어 먹기도 했는데, 반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산호’를 대체하며 산호가 있지 못하는 수온 너머로도 퍼져나가며 해양 자원을 부흥시키기 시작했다.
“장기전을 준비해라.”
아카타베루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결국, 드낙과의 교전에서 손해를 본 건 아카타베루였다.
‘이대로는 패배한다. 역시 중립신이 묻힌 차원이다.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건 일반적인 초월자의 싸움이 아니었다.
격과 격의 부딪힘.
힘과 힘의 부딪힘.
모든 것이 금방 결판이 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부딪혔을 때, 승자와 패자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인신들은 자신들만의 세력을 쉽게 꾸릴 수 있었다. 단체를 만들고, 서로 화합할 수 있었다.
힘의 차이가 있으면 서열을 나눌 수 있다.
힘의 사용에 효율성이 있어도 절댓값을 이기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마주력 같은 괴이한 힘을 동시에 다룬다면 몰라도.
‘아스모데(Asmode)…….’
배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중간에서 뜻을 함께하지 않고 사라졌다. 자신의 몫을 챙기고.
서로 충분히 다시 힘을 합칠 수 있어 보인다.
‘믿을 수 있는 건 더 큰 힘이다.’
알 수 없는 공격법도 ‘힘’과 ‘업’으로 충분히 짓누를 수 있었다.
다만 지금 아카타베루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일대 공간을 한순간에 싹 다 비틀었음에도 드낙을 죽이지 못했다.
“붉은 용 한 마리를 보내라. 그리고 이 뇌를 건네줘라. 그렇다면 아스모데는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아카타베루가 소아귀의 머리통을 건넸다. 머리통만 있었는데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대단히 악마적이다.
붉은 용이 이를 입에 집어넣고 날아올랐다.
아스모데는 붉은 용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적어도 아카타베루가 죽기 전까지는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속일 필요가 있어.’
아스모데의 계략은 테라의 주인에 의해서 아카타베루가 죽고 아스모데는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금 가만히 있는 것이기도 했다. 우주 공간에 자리를 잡고, 대기했다.
꽈악.
“끼에에에에엑!”
소아귀가 비명을 지른다. 이내 머리통을 아스모데가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고, 곧 정보가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
그 머릿속에는 드낙과의 전투가 담겨 있었다.
아카타베루의 공간 지배의 힘으로도 잡을 수 없었다. 심지어 아카타베루는 끝도 없이 공격당해서 근 32만 명에 달하는 육신의 힘을 잃었다.
초월자이며, 대악마가 아니었다면 소모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몇 마리의 대악마를 집어삼킨 대악마가 아니었다면 전투는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
“이거,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은데.”
아스모데는 섬뜩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전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승리하면 모든 것이 들어온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카타베루의 옆으로 악마 세계를 옮기기 시작했다. 우주에서 또 하나의 악마 세계가 테라와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무려 3개의 세상이 한곳에 모이는 셈이다.
업(業)이 넘실거린다. 퍼져나가고, 또 퍼져나간다. 호수 속에 떨어진 돌처럼 거친 물결을 토해냈다.
“왔나? 아스모데. 결국 욕심을 버리지 못했구나.”
아카타베루는 즐거운 듯했다.
“돌고 돌아서 이렇게 됐네. 일단 놈과의 전면전은 피해야 해. 행성 전쟁부터 치르며 놈의 힘을 깎아내리자.”
필멸자의 숫자를 줄이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마신의 개입이 적절했다. 운석이라니, 놈답다. 그 덕에 우리는 시간을 얻었다.”
“그 괴이한 힘을 사용하는 초월자도 바로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을 봤을 때, 한계가 분명한 것 같다.”
그들은 수많은 가정과 추측을 늘어뜨려 놓았지만, 결국 서로 타협하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실로 악마다운 결정이다.
아카타베루는 상대의 동태를 살피기보다는 중립신의 안배를 찾기로 했다. 그건 아스모데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위험보다 중립신의 시체를 찾아서 먹고 도망치는 게 더 좋은 선택이다.
‘느껴진다.’
두 마리의 대악마는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행성 내부에서 ‘중립신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흐흠. 흐흐……!”
절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중립신의 시체는 내 것이다!’
드낙의 가짜 껍질은 충분히 그 효과를 보여줬다.
두 대악마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행성 내부에 더욱 많은 악마의 힘을 집어넣도록 만들었다. 그것 모두가 테라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양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