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화
* * *
“테라는 승리할 것이다.”
이는 당연한 진리다.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과 세파리아스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결국에는 테라가 승리할 것이 눈에 뻔하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나가서 싸운다? 우스운 일이지.”
“열성교는 기어코 움직일 것입니다.”
“그렇겠지.”
아주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우리는 그저 인내하면 된다.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께서도 그리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희생하는데, 우리만 희생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건 당연한 소리다.
혈맹(血盟)이라는 것은 같이 피를 흘려야지 성립이 된다. 피를 흘리지 않은 놈을 혈맹 소속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미 소속되어 있어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40년 동안 지하 연합은 지상과 돈독한 교류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사실상 교역으로 얻는 이득도 많았다. 단순히 물건만 교류하는 게 아니다. 인적자원도 움직인다.
고블린 청소부가 대표적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기계 하나로 처리하는 건 힘든 일이다. 사람이 꼭 필요했다. AI고 나발이고, 개간하고, 개발해야 할 땅이 많은 테라였기에 사람이 절실했다.
“우리 혼자만 피를 안 흘릴 수는 없지.”
공교롭게도, 운석 타격으로 인해서 지상 세력 중 피를 안 본 자가 없었다. 그런데 지하 연합만 피를 안 흘리고 그저 대기하며 대피소 역할만 한다면, 전쟁 이후 은근히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
황당하게도, 이는 알아서 지하 연합도 자기 목을 조를 필요가 있단 결과가 된다.
불합리하지만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였다.
“그럼… 방관하자는 건가?”
“방관하면 의회의 체면이……!”
“그건 그렇지. 찍찍.”
대장 쥐 또한 그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하 연합이 커질수록 당연하게도 의원의 수가 늘어났다.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기도 했다. 하원의 경우에는 지역 유지와 같은 말이기도 했다.
“열성교의 행동은 괘씸하다. 하지만 우리 대신 피를 쏟아내 준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자금을 지원하고, 오크와 협력해서 배를 띄워서 바다로 항해하도록 해라. 또한 우리 또한 군대를 파견하여 후방에서 보급을 집어넣는다.”
“열성교가 보급을 관리하면 전쟁에 나서는 그들의 수가 적어질 테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나?”
“예. 공문을 내려서 전쟁에 참여할 이들을 ‘모병’한다면 열성교가 대답할 것이고, 청년들이 나설 것입니다.”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서 배우지 않은 이들은 분명 크게 찬동할 것이다. 전쟁을 낭만이라 노래를 부르며 좋아할 터다. 훈련 또한 받았음에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피를 뿌리지 않는 훈련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투 강철 인형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그게 있었다면 두더지 인간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겠지.”
“마력도 많이 필요한 게 전투 강철 인형이다.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아.”
매년 막대한 마력 자원을 소모하는 건 지하 연합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차라리 다른 종족에게 전투력을 할당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
끝도 없이 하늘 위로 아파트를 쌓는 것과는 다르게 지하 연합은 지하를 뚫고, 용적률을 높여야 한다.
무지막지한 공사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똑같은 층수를 올려도 지상과 지하는 완벽하게 다른 세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지상과는 다른 길이다. 쓸데없는 불평을 왜 의회에서 하는 거냐? 찍찍!”
대장 쥐가 헛소리를 하는 의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의원은 바로 위축됐다. 대장 쥐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좋아! 모든 것이 결정됐다. 모병해서 싸울 이들을 자진해서 뽑는다면 그들이 죽더라도 우리가 욕을 먹지는 않겠지. 그들이 선택한 일 아닌가?”
“거기에 그들이 죽는다면 우리 또한 피를 같이 흘린 혈맹이 되는 것이니, 우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열성교의 불만 또한 가라앉겠지.”
수많은 이득이 있었고, 이를 떠들기 바빴다.
전쟁이 벌어지면 자연스럽게 돈이 풀리게 마련이다. 그것도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대장 쥐가 킬킬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이는 침묵했고, 자연스럽게 전부 입을 다물고 대장 쥐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찍찍! 우리는 그 누구보다 앞서나가야 한다!”
“…….”
“…열성교의 움직임은 자극적이지. 놈들은 ‘지상’에도 여럿,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 그놈들이 움직이는 걸 본 지상 놈들은 뭐라고 생각하겠느냐?”
“지하 연합이… 참전한다.”
“그렇지. 그렇다면 우리가, 찍찍! 우리가 뭘 해야 하겠느냐?”
“열성교를 억지로라도 짓눌러야 한다!”
대장 쥐가 이정표를 건네주자 곳곳에서 뻥 뚫린 고속도로로 진입한 자동차처럼 입김을 크게 내뿜으며 발악하듯이 목소리를 냈다.
“열성교를 짓누르면 의회의 체면도 높일 수 있다. 이건 큰 명예야! 놈들, 제대로 짓눌러줄 명분이다! 지상 종족은 안달이 날 것이고 그들 스스로 지하 연합이 나서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대가를 받고 전쟁에 나서게 된다!”
태엽이 돌아가듯이 딱딱 떨어졌다.
지하 연합은 그렇게 침묵했다. 열성교를 때려잡고, 짓누르는 데 집중했다. 당연히 이 소식은 지하 연합에 피난한 이들의 입을 통해서 지상으로 퍼져나갔다.
드낙과 세파리아스도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뭐, 나쁜 생각은 아니지.”
전쟁은 돈이 된다. 6‧25전쟁 덕분에 일본은 경제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인의 피로 쌓아 올린 금자탑이다.
이번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얻었던 이득만큼 지하 연합 또한 가만히 앉아서 큰돈을 얻게 생겼다.
‘열성교의 활동력을 억누르는 시간만큼 큰 이익을 얻게 되겠지.’
―드낙. 지하 연합의 제어에 실패했더군.
세파리아스의 정신체가 드낙의 앞에 섰다. 그를 추적한 것이 아니라, 지상의 위험 요소는 최대한 정리한 뒤 드낙은 세파리아스와 같이 해안가에 주둔하고 있었다.
“걱정 마라. 결국 지하 연합은 군대를 보낼 테니까.”
―네가 용인한 일인가?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태양 식민지를 가진 신제국이 할 말은 아닌데?”
―태양 식민지는 신제국만 지배하고 있는 곳이 아니다. 테라의 모든 세력이 적당히 같이 지배하고 있지 않나.
“그걸 같이 지배라고는 할 수 없지. 애초에 출입구는 네가 지배하고 있고, 입장료도 받고 있잖아.”
공공시설이 많았던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드낙에게 있어서 차원 다리 이용료는 굉장히 비싸다고 여겨졌다.
이를 통해서 신제국은 막대한 전쟁 자금을 마련하고 있었다.
―수습은 마무리 단계에 오고 있다. 지하 연합을 움직여라.
“어련히 잘하겠지. 그리고… 나한테 생각이 있는데 들어볼래?”
―…말해 봐라.
“테라, 성장하는 거 멈췄잖아. 그걸 저 악마 세계로 충당하는 게 어때?”
―뭐라?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세파리아스는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반면 드낙은 그가 예상하지 못하는 걸 예상했다.
그것만으로도 드낙은 그보다 위에 있었다.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세파리아스는 실로 오랜만에 봤다.
드낙은 킬킬 웃으면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줬다.
“악마는 테라를 오염시킬 생각이지. 그럼 테라 행성에 업(業)이 비집고 들어갈 거다. 변화가 있을 텐데, 그 변화를 우리 쪽에서 제어하는 거다. 부작용이 있긴 하겠지만,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오염이라는 것도 사실 웃기지. 이미 테라에는 ‘악마’가 있는데 말이야. 권속 악마도 돌아다니고 있지.”
잘 융화가 되어있었다. 융화되지 못하는 권속 악마는 애초에 드낙이 출산하지도 않았다.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악마를 이용해서 테라를 키운다라… 확실히 행성이 커지면 좋겠지.
초월의 힘으로 커지는 행성은 분명 큰 이득이 있었다.
자기장의 변화로 인하여 지축이 크게 흔들리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법도 했는데 그런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초월적인’ 일이다.
“간척사업도 해야 하고. 테라에 대륙이 하나뿐이잖아.”
―흠… 위험하긴 해도 기회가 되긴 하겠어. 근데 권속 악마들의 침공은 어찌 막고? 머메이드들이나 오션 오크들은 싫어할 것 같은데.
“악마들을 바로 죽이는 건 내 생각에는 어리석은 생각이야. 아카타베루와 싸워보고 알았어. 그놈들 ‘경지’에 도달한 놈들이 아냐.”
드낙은 확신할 수 있었다.
중립신이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세파리아스도 죽이려고 했는지 말이다.
‘우리 둘은 이레귤러다.’
중립신의 부활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반동이 드낙과 세파리아스였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죽어야 할 정도로 괴이한 존재였다.
“대악마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이건 기회야. 그 뭐지? 성공한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삼잖아. 이게 그런 거지.”
―…어리석군. 하지만 해볼 만하다.
성공만 한다면 테라는 ‘중심 차원’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할 것이다.
“해안가에 잔뜩 준비를 해둬.”
―우주 공간에 있는 악마들은 그대로 방치한다. 놈들은 아직 움직이고 있지 않으니까.
아스모데의 군대에 대해서도 방침을 정했다. 서로 생각하고 있는 게 비슷했다.
“일이 터지기 전에 놈들은 바다에 떨어진 아카타베루와 이야기를 나누겠지.”
―그게 네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고.
“테라를 악마화시켜서 그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되는 건 그들에게 좋은 일이지만, 악마의 업을 받아먹은 테라는 우리 또한 쉽게 이용할 수 있지.”
―네가 악마니까.
“난 아직 인신의 꽃을 피우지 못했으니까, 더욱 저 대악마 두 놈이 테라에 업을 투여하도록 해야 해. 지금이 그 순간이고.”
―잘 될까? 딱 봐도 대악마끼리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보름 정도 두고 보다가 우주에 있는 대악마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놈부터 친다. 놈들 모두 죽이지 않고, 끝없이 피를 도려내서 테라에 힘을 뿌리도록 할 생각이다. 어떠냐? 내 생각이.”
―…좋은데?
드낙의 잔혹한 말에 세파리아스가 크게 동의했다.
대악마 두 놈을 사로잡아서 끝도 없이 피를 토하게 해서 행성에 녹인다. 그리고 테라의 크기를 키운다.
테라에 투자한 건 드낙만이 아니다. 신제국 또한 엄연히 세파리아스가 투자한 곳이다.
“기다려 보자고. 놈들은 뭘 해도 뒈질 테니까.”
드낙이 웃음소리를 냈다.
―너… 다른 걸 또 꾸미고 있군?
“그래. 지켜보라고. 대악마 놈들, 정신 못 차릴걸.”
드낙이 음습하게 말했다.
* * *
테라에 사는 필멸자들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운석 마수는 마신의 짓인 게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분노가 마신에게만 향한 건 아니다.
당장 자신들의 고향에 떨어져 내린 악마들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대악마들에 대한 명칭이 공개됐다.
악마라는 단어를 욕하기에는 테라에는 권속 악마와 악마가 살고 있었다.
“아카타베루!”
“아기를 잡아먹는 대악마!”
“사악한 대악마!”
지하로 대피한 이들에게 소아귀가 공개한 날에는 그 분노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늙은이라도 무기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갈 정도의 분위기가 흘렀다.
당연하게도 그 분노만큼이나 열심히 일하게 됐다.
[오늘 생산하는 미사일 하나가 내일 죽을 아카타베루의 피 한 줌!]
공격적인 슬로건이 공장에 붙었다. 공장은 반파가 되어있었지만, 그래도 일하는 곳이 있었다.
대충 치워진 잔해 사이로 강철로 이루어진 철마가 다그닥 소리를 내며 마차를 이끌고 장비를 털어낸다.
화물차가 여기까지 들어오지 못해서 그런 야만적인 운송 수단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세파리아스의 탓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다.
드낙의 경우 운석 마수를 입자 단위로 부수어서 흰 가루로 만든 반면 세파리아스는 결국 ‘베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차이가 이런 광경을 만들어 냈다.
운석을 갈랐다고 해도 운 좋게 파편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작은 파편이라도 속력이 워낙 빨라서 건물 하나 우습게 박살 낼 수 있었다. 재수 없게 건물의 주 기둥을 무너뜨리는 일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세파리아스가 아니었다면 더 끔찍한 피해를 낳았을 터다. 표면만 박살 내는 질량 병기와 마법 포격으로는 운석 마수를 결코 막을 수가 없다.
“끙! 끄으앙!”
7살짜리 어린이들이 모여서 한쪽에서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러했다.
그들 모두 이 전쟁의 피해자였다. 그들의 눈에는 동심(童心)이 아니라 살심(殺心)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