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6화
* * *
‘장관이다.’
드낙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몸에서 그림자가 구름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에 의해 수많은 정보가 드낙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신체 온도는 48°C를 넘어섰다.
제대로 과부하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모든 단백질이 분해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드낙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이 육신은 반마급 육신으로 평범함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정신은 아니다.
‘문제가 되지는 않지.’
예전에 세뇌를 경험한 커리어가 드낙에게 있었다.
그의 정신력은 한층 더 강해졌다.
고난을 견디고, 나아가라고 말하는 꼰대 놈들은 소주병으로 후려치고 싶은 게 청년들의 마음이지만, 고난을 겪은 이는 그 고난을 추억과 함께 아름다운 한편의 그림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이를 남한테 권하는 건 꼰대라도,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데에는 고난만 한 게 없었다.
‘재수 없게도 테라 대륙 위에 떨어졌다. 그것도 인간들이 자리 잡은 곳으로 길쭉하게 그어졌다.’
그곳으로 수많은 권속 악마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대단히 높은 고도에서 떨어졌지만,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그건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세계와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그 속에서 알게 모르게 중력의 변화가 존재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하늘에 있는 악마 세계와 지상에 있는 테라를 농밀하게 명확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었다.
길이 없는 공간에 길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부유하는 것처럼, 천천히 보이지 않는 길을 내려가는 것 같았고, 혹은 미끄럼틀을 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상은 착실하게 변하고 있다.’
드낙은 쉽게 그 ‘끝’을 상상할 수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악마 세계와 그 아래 땅에 있는 테라는 보이지 않는 길로 연결된 것처럼 서로 쉽게 왕래하게 될 터다.
중력을 거스르는 현상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악마 세계 또한 세계이며, 테라 또한 세계이다. 그 두 개가 서로 교접하면서 물리학을 송두리째 뽑아냈다.
그 광경을 드낙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정보의 질이 달랐다.
농밀하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 순간을 놓친다면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
드낙을 위해서 다른 대악마가 자신의 악마 세계를 이끌고 테라에 꼬라박는 경우의 수는 한없이 낮다.
악마 침공을 막아야 했지만 드낙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저 물리법칙이 어긋나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그건 천금으로도 주지 못하는 경험이었다. 그 속에서 드낙은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 영감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쉬울 따름이다.’
드낙은 아쉬웠다.
세계와 세계의 부딪힘은 ‘세계를 속이는 경지’와 ‘세계를 베어내는 경지’와 닮아있었고, 그에 영향을 충분히 끼칠 수 있어 보였다.
성장의 발판이 될 텐데, 드낙은 깨우치지 못했다.
‘더는 미룰 수도 없다. 대악마를 찾아서 죽여야겠다.’
드낙은 세계와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현상에서 비로소 눈을 돌렸다.
그가 파동으로 변했다. 그림자 구름을 통해서 이미 악마 세계의 충분한 정보를 모아놓은 상태였다.
늘어진 엿가락처럼. 혹은 치즈처럼. 권속 악마가 테라를 향해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건 떨어진다는 개념과는 다르게 지나칠 정도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다.
수많은 테라의 질량 병기와 마법 포격이 이어져서 피해가 생겼지만 그건 대부분 소아귀에 그쳤다. 소아귀를 화살 막이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카운터를 잘 쳤다. 이건 테라의 패배다.’
소아귀는 훌륭한 방파제이며, 아주 싼 소재였다. 악마 세계, 최고의 가성비 하급 권속 악마다.
이들은 더 높은 등급의 권속 악마를 지키기 위해서 죽어갔다. 그들이 원하든, 그들이 원하지 않든.
드낙은 그들을 지나쳤다.
권속 악마들은 테라의 힘으로 능히 막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차원과 차원의 농밀한 합일(合一) 현상 속에 숨어있는 아카타베루다.
‘난 너의 존재를 느낀다.’
확실하게 피부에 와닿았다. 촉이 왔다.
드낙은 악마 세계의 중심으로 향했다. 아카타베루는 가장 안전한 그곳에 있었다.
물론 드낙은 그런 이론적 확신보다는 감각적으로 이를 확신하고 있었다.
굳이 머리를 써서 악마 세계의 중심 밖에 자리 잡을 이유도 없다. 이를 꿰뚫는 건 가히 불가능에 가깝다.
권속 악마의 육(肉)은 모두 악마의 힘이 깃들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악마 세계를 밖에서부터 무너뜨리지 않고, 안으로 쳐들어간다면 아카타베루와의 힘 대결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
‘표면적이 넓어야 더 많은 힘을 단기간에 방출할 수 있다.’
그건 초월체도 예외는 아니다. 덩치가 크면 클수록 더 큰 힘을 방출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악마 세계 중심부에 똬리를 튼 아카타베루는 가히 무적에 가깝다. 자신의 권속 악마를 비틀어 죽여 그 힘을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종족에게 악마의 피를 내어주는 것과는 다르게, 권속 악마는 그 자체로 악마에게서 잉태되어 나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얼마든지 소모성 아티팩트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드낙은 중심부로 이동했다.
파동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현실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아카타베루의 정신 파동이 느껴진다.
―이, 미친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어라? 나, 들킨 건가?”
드낙이 순수하게 물었다. 자신을 찾아낸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무언가가 벼락처럼 드낙을 노렸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회피했다. 그건 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피막이었다.
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갓 태어난 가축 혹은 인간의 탯줄에 엉기성기 엮어져 있는 얇은 무언가가 넓혀진 것 같은 기분이다. 태반이라 말할 수도 있어 보였다.
다만,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대단히 날카로웠다.
휘이익!
심지어 악마의 힘이 깃들어 있어서 위협적이었다. 유령이건 무엇이건 간에 피해를 입었을 터다.
그 피막 같은 것은 빠르게 갈기갈기 찢어지더니 둥둥 떠다녔다.
드낙은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이 들킨 이유를 알아차렸다.
‘대단히 농밀한 공간이다.’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고래의 위장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아카타베루가 드낙을 알아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농밀한 공간에 이질적인 것이 들어왔으니, 당연했다. 드낙은 표면적으로 현실적인 물리법칙에 속하는 질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체중은 확실하게 이 공간에 존재했다.
―중립신을 따르는 초월자냐? 중립신을 대신해서 싸운다고 한들, 너에게 무슨 영광이 있겠느냐? 크크크! 이미 그는 죽지 않았더냐? 그 시체를 나에게 준다면…….
아카타베루가 지껄였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명확하게 존재하던 드낙의 존재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앞에 버젓이 보이는데, 사라지고 있다.
이내 이 농밀한 공간에서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드낙은 아카타베루의 눈앞에 있었다.
마룡의 형태를 지닌 아카타베루를 보며 드낙이 입을 뗐다.
“대악마라는 놈이 드래곤 흉내나 내고 있네. 왜 여기에 온 거냐?”
아카타베루는 드낙이 갑자기 위험해 보여, 회유하려는 마음을 접었다.
―죽어라!
온갖 것들이 단번에 토해지더니 공간이 우그러들었다.
‘독특한 방식이다.’
육신을 허공에 만들어 내고, 그 육신에 담긴 악마의 힘을 이용해서 단번에 초월적인 현상을 발현시켰다.
‘육체 공간 파괴’라 이름을 지을 수 있어 보였다.
그건 가히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드낙이 아카타베루의 악마 세계 중심부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모든 곳에 아카타베루의 힘이 담겨 있었다.
이곳은 아카타베루의 몸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위장 속에 드낙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 장소엔 많은 악마의 힘이 결집되어 있었고, 그 힘은 아카타베루만의 것이었다.
소리 없는 죽음.
공간이 비틀리며 파괴되는 광경 속에서도 드낙은 평온했다.
‘세계에 관측되지 않는’ 드낙을 죽이는 건 그 어떤 초월적인 힘이라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틀리고 파괴되며 이차원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수복되고를 반복하는 공간을 아카타베루가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크흐흐, 하하하! 이게 바로 나의 힘이다! 공간을 지배하는 대악마, 대악마를 잡아먹은 대악마! 그게 바로 나다. 내가 바로 마룡이니라!
그가 크게 웃었다. 파괴적인 일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놈이라도 이 여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에 준하는 힘을 사용해야 했다.
―회피는 불가능!
그의 아가리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군침이 안 돌 수야 있나.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쾌감이 쩌릿쩌릿하게 척추를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아카타베루의 얼굴이 굳어졌다.
쩍.
그러고는 두개골이 반으로 쪼개지며, 폭발하듯이 뻥 하고 터져 버렸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공간이 엉망이 되어 아카타베루조차도 제대로 관측하는 게 불가능했다.
드낙은 파격적인 파괴 속에서 살아있고, 반격까지 했다.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개골이 박살이 났음에도 아카타베루의 정신 파동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게 대악마.”
―그래. 이게 대악마다. 죽을 수가 없는 존재다. 그 어떤 초월자보다 불멸에 가깝다.
마룡의 잘린 머리에서부터 재생이 시작되었다. 주변 대기에 퍼져 있는 아카타베루의 악마 힘만으로도 쉬이 가능했다.
‘재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빠르다.’
호X맨 머리 갈아치우듯이 머리가 생겨났다.
“대악마는 이런 식으로 싸우는군.”
―그래. 절망스럽지?
드낙의 머리 위로 소아귀가 소나기처럼 내렸다.
공간에서 사라진 아감의 힘이 다시 충만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목이 떨어져 나간 소아귀였다. 머리가 잘렸음에도 짧은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어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악마의 힘을 공간에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권속 악마를 사용한다.’
악마 세계의 존재 이유가 또 하나 밝혀졌다. 주변 대기에 충분히 자신의 힘을 퍼뜨리기 위함이다.
드낙 또한 몸에서 피 안개가 피어올라 왔다. 피가 증기가 되어 퍼져나갔는데, 아카타베루의 방출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크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 뭐냐, 그 꼬락서니는. 어떻게 악마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웃던 아카타베루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드낙이 다시 파동으로 움직여서다.
현실 세계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공간에도 이질적인 부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크롸롸롸!
아카타베루는 숨어있는 드낙을 찾기 위해 숨결을 내뱉고, 공간을 부쉈다.
하지만 드낙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마룡의 가슴에 큰 구멍이 뻥 뚫렸다.
―날 죽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언제까지 이런 기적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건 참으로 볼 만하겠구나!
드낙은 아카타베루를 죽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리라는 걸 크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달리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표면적을 넓혀서 대악마의 싸움을 하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 되겠지만…….’
문제는 테라의 종족들이 그만큼 죽어 나갈 것이라는 점이다.
‘그냥 파동으로 끌고 가서 박살을 내는 수밖에.’
동시에 드낙은 악마 세계의 중심부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건 상관없이 순식간에 구멍이 뚫리며 새하얀 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카타베루와 드낙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멈춰 섰다. 드낙은 순식간에 중심지에서 벗어났다.
대기권에 모습을 드러낸 드낙의 눈이 어떤 것을 목격했다.
또 하나의 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보자마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그것은 그저 큰 운석이었다.
반질반질한 검은색 윤기를 내는 운석은 하나가 아니었다.
끝도 없이 늘어서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낙은 선두에 있는 운석의 ‘눈’이 떠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수(魔獸).’
그저 직감적으로 그것이 마수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