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1206화 (1,204/1,239)

1206화

* * *

여름이다.

태양 식민지에 여름이 시작된 건 큰 의미를 부여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태양 식민지의 여름 도중에 시작된 현상은 의미가 있게 되어버렸다.

드낙조차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무슨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나!”

열대우림도 아니고, 우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비만 계속 내리고 있었고, 서늘했다.

문제는 그게 벌써 한 달째라는 점이다.

세파리아스와 드낙 그리고 굴라가 한자리에 모였다. 굴라는 여전히 넝쿨을 엮어서 만든 분신으로 정신 파동을 통해서 대화했다.

그는 정말 인신답지 않은 평범한 존재였다. 한 번 넘어지고 난 다음에는 결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금수저가 10번 사업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것과는 반대로 평범한 사람은 한 번 사업 실패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굴라는 후자에 속했다.

그 덕에 그는 살아남았다.

―이건 그냥 으레 있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굴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책 읽어보지 않은 놈처럼 구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고사하고 객관적 판단조차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자기 주관대로 나불거리고 있었다.

“빨랫감이 가장 문제다.”

“푸히힛!”

세파리아스의 말에 드낙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신제국의 황제. 인류가 잉태한 최고의 변수.

그런 인물이 빨랫감 걱정이라니? 웃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빨랫감이 왜 문제지?

굴라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그러든 말든 이야기는 진행됐다.

세파리아스도 농담을 한 것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초월자가 되고 나서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농담도 하게 된 것이 세파리아스였다.

“평범하지 않은 우기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고 있다.”

그건 정말 무서운 소리였다.

대한민국처럼 작은 땅에서 ‘전국적 호우(豪雨)’는 그럴듯하게 고개가 끄덕일 만하다. 하지만 큰 대륙에서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하면 그건 이미 재난이나 다름없었다.

그 재난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형이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실제로 경사가 좀 있는 곳은 나무도 못 버티고 무너져내리고 있다.”

“제재소는?”

“피해가 심하지. 고립된 이들을 데려오는 데에 많은 마법 자원을 탕진했다.”

비행 마법을 통해서 구출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런 종류의 개발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헬리콥터도 없으니까.’

공중을 돌아다니는 것이라곤 무지막지한 데스 스타나 우주 전함 그딴 것밖에 만들지 않았다. 군사적인 것들만 만든 셈이다.

그게 이번에 발목을 잡았다.

구출하는 데 비행 마법을 통해서 가서, 사람을 데리고, 깡으로 다시 날아올라 산이나 언덕 숲에서 벗어나야 했다.

“광산 또한 문제다. 수장된 이들이 제법 돼.”

골드 러시에 직접적인 타격이 들어갔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기에 비탈길을 올라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정도로 ‘대비’를 하지 않았다.

경제가 타격받는 것보다 양질의 태양 빛을 받을 수 있는 금 수급량이 줄어든다는 것이 더 마음 아팠다. 드낙도 별수 없는 권력자였다.

이런 피해는 우기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더 잘 알아봤어야 했는데.”

드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설마 태양 식민지가 이 정도로 환경이 다를 줄은 몰랐다.”

전국적. 말 그대로 전 행성이 우기에 휩싸였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을 줄은 몰랐다.

해발고도가 낮은 곳은 수장도 될 것 같았다. 실제로 마을이 수장될 것 같아서 이재민도 생겨나고 있었다.

재산 피해가 얼마나 될지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지금이라도 필요한 구역으로 진출하여 물길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부른 까닭도 이 때문이다.”

드낙은 그 말에 동의했다.

굴라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넝쿨로 적당히 물을 막아두면 되는 건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굴라, 너는 야생의 보어리안들을 살펴라. 그들의 수가 많아야 너의 힘도 증가하지 않겠느냐?”

행성을 절반으로 뚝 가른 것이 굴라와 신제국이다.

“물길을 만드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최대한 야생의 보어리안들을 구하는 데 사용해라. 그래야 보어리안 숫자가 많아지지.”

그들은 모두 훌륭한 업(業)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들은 결국 문명화가 되겠지만, 그전에 착실하게 죽어야 할 터다.

그게 굴라가 원하는 일이며, 세파리아스가 원하는 일이었다. 초월자들이 원하는 일이다.

비문명인은 도축 당하는 삶 속에서 서서히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문명인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 보어리안만 남게 될 터였다.

그들은 알라를 모시지만, 대단히 세속적인 인간이 된 아랍의 관광도시에 사는 종교인처럼 변할 것이다.

한국은 멀어서 아랍에 계시는 알라는 모른다며 삼겹살을 야무지게 먹던 그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군대도 움직일 것이냐?”

비 오는 날 작전이라니. 정말 미친 소리가 아닐 수 없었지만 그런 걸 해야 할 정도로 예상치 못한 위기였다.

매년 장마가 시작되는 걸 알고 지금에서야 움직인다면 그건 정말 느그 육군이지만, 태양 식민지의 경우는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위기다.

그 차이가 존재했다.

“당연히 군대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해야지.”

말은 인명 구조를 내비쳤지만, 그 속내가 다르다는 걸 드낙은 순식간에 간파했다.

‘재산 피해를 막는 게 더 급선무지.’

사람 목숨? 우습다. 그런 하찮은 명줄은 ‘내 것’만 중요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재산이다. 산업이고. 인명은 그저 겉으로 최대한 으뜸으로 세워야 하는 가치에 불과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였다.

“내가 남쪽에서부터 시작하지. 거기가 가장 엉망이야.”

드낙은 가장 힘든 곳을 골랐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소시민들에게 지극히 깊이 공감하고 있다.

“그럼 내가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지.”

―난 보어리안들을 챙기겠다. 예전에는 하지 않은 일인데…….

그가 말을 흐렸지만, 어쨌든 할 생각을 가졌다. 이제는 정원을 가꾸어야 할 때다.

이는 굴라가 세파리아스와 드낙 같은 초월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친구는 서로 취미가 맞아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가 소원해지게 마련이다.

결혼한 친구와 결혼하지 않은 친구가 서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과 같았다. 이를 억지로 이어나간다면 분명 그 결과는 썩 좋지 않을 터였다.

세 명의 초월자가 움직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은 굴라였다.

굴라는 행성 전체에 자기 넝쿨을 뿌려두었다. 드낙이 박살 낸 곳이 있었지만, 그곳은 이미 수복을 끝내놓았다. 그는 태양 행성에 가장 많은 넝쿨을 보유한 자였다.

쿠구구구!

물이 젖은 흙이 붕괴했다. 쏟아지는 토사물이 지하로 떨어지며 지하수가 해일처럼 휘몰아쳤다. 모습을 드러낸 넝쿨은 물길을 만들며, 빗물을 다른 곳으로 유도했다.

사람이 없는 곳. 보어리안이 없는 곳. 그곳으로 인도하며 하나의 길을 만들어 나갔다.

굵고 큰 넝쿨이 둑처럼 기능하기도 했다. 물이 차오른다.

산과 계곡의 양측 면에 넝쿨로 된 벽이 생겼다. 그곳으로 물이 좀 흐르긴 했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수몰될 위기에 처해서 위로 올라가던 보어리안들이 굴라의 이름을 외쳤다.

“굴라! 굴라! 굴라!”

그 모습에 굴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또한 인신이다. 지금은 반쪽짜리에 불과했고, 행성에 묶인 몸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인신이었다.

드낙은 마법을 통해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돌이나 바위 따위를 소환하거나, 흙을 운반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산과 산의 사이를 타고 미친 듯이 흐르는 물길 때문에 지붕 위로 올라가 드낙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이들도 있었다.

드낙은 덩치가 커져 있었는데, 거침없이 그곳의 산을 깎아서 위태로운 곳을 통째로 막아놓기도 했다.

콸콸콸콸!

물길이 바위를 타고 흐르며 새로 생기며 다른 곳으로 뻗어나갔다.

태양 식민지의 우기(雨期)는 대단했다.

군대마저도 발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비가 너무 많이 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쌓고 또 쌓아도 부족하다고 여겼고, 빗소리 때문에 두려워서 잠을 청하지 못하고 밖을 계속 확인하는 병사도 있었다.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 끝도 없이 비가 내렸다.

그 속에서 전투 강철 인형들은 우직하게 작업에 임했다. 다른 군대와는 현격히 다른 위험 임무도 진행하기도 했다.

비는 한 달 만에 진정되었다. 다만, 수습이 된 건 아니었다.

매년 장마와 태풍으로 피해를 보면서도 예산을 운운하며 농민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위대한 대한민국처럼은 안 되기 위해서라도 드낙은 대책 방안을 논했다.

“이제 민심을 다스려야 한다.”

세파리아스가 다음에 할 일의 방향을 잡았다.

피해를 입었다. 뺨을 맞은 격이다. 지배자가 뺨을 때린 건 아니지만, 대중들은 지배자 욕을 할 것이다. 나라님이 안 보이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하는 법이다.

초월자라고 다른 건 아니었다.

공이 있다면 과가 있다.

그 어떤 이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구국 영웅 나폴레옹 또한 공이 있고 과가 있다. 관우조차도 공이 있고 과가 있다.

대중들은 뺨을 맞았고, 특히 태양 차원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배신감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배신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구호 물품을 주는 건 당연하고.”

그게 빠지면 안 된다.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집을 해줘야 한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집은 비싸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다. 동시에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국가가 해줄 일은 아니었다.

그건 대단한 출혈이다. 남의 세금으로 남의 집을 지어주는 꼴이다.

누구나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해야 한다.”

드낙이 우직하게 밀고 들어갔다.

“태양 식민지에는 나무도 많잖아. 왜 안 된다는 거야? 집을 짓는 숙련공이 많지 않다고? 그렇다면 견습공에게 기회를 주면 될 일이지.”

조금 저급한 집이 되겠지만 그래도 집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또 테라는 아직도 과학기술에 숙련된 이들이 부족했다.

이번 기회에 ‘건축업’을 드높이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태양 식민지는 인구 밀도가 너무 낮아. 도시를 형성하거나 큰 마을을 만들 겸 이재민을 모을 필요가 있어.”

오히려 좋은 미래를 위해서 집을 한 곳에 몰아서 지을 필요성도 언급했다.

그건 세파리아스가 혹할 만했다. 그가 직접 토벌할 정도로 태양 식민지의 치안 상태는 지역별로 천지 차이였다.

“좋다! 한 번 해보자.”

세파리아스가 결국 배팅했다.

드낙은 그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것을 얹기를 원했다. 세파리아스가 이 정도로 으뜸으로 나왔으니, 자신 또한 무언가를 내놓아야 했다.

손을 튕기며 드낙이 이목을 모았다.

“…전에 농담으로 던졌던 빨랫감. 내가 제습기와 선풍기를 태양 식민지에 보급하도록 하겠다.”

“굳이?”

세파리아스는 썩 좋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에 드낙이 답을 알려줬다.

“가정의 평화는 아내로부터 나오는 법이지. 빨랫감은 대부분 여자가 도맡아서 하거든.”

제습기와 선풍기는 능히 가정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적어도 잔소리가 하나는 줄어들게 될 터다.

여자들을 만족스럽게 한다면, 대중들의 불만 절반은 어느 정도 사라지게 된다.

세상의 절반은 남자고. 세상의 절반은 여자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은데.”

그럴듯했다.

드낙은 그렇게 제습기와 선풍기 공장을 태양 식민지에 제공했다. 이를 관리할 사람을 뽑고, 다양한 지역유지와 세력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물심양면 그를 도왔다.

하나둘씩 제습기와 선풍기를 받기 시작하면서 테라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짜는 언제나 옳았다.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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