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8화
드낙과의 교전 덕분에 굴라는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면 드낙은 자신이 성급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시간을 두고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세파리아스와 굴라는 모두 납득했다.
그날로 굴라는 넝쿨을 마치 가마처럼 사용하며 분신 수십을 데리고 신제국의 요새를 돌아다녔다.
염탐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힘의 차이를 알면 굴복할 것이라 여겼다.
그사이에 세파리아스는 드낙으로부터 굴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모습은 인내심으로 똘똘 뭉쳐서 만들어진 동상 같았다.
“안 하던 짓을 했다.”
“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네 생각이 나더라고.”
“뭐라? 저런 아무것도 보잘것없는 덩어리를 보고 내가 생각났다고?”
“실험체로 쓰였다던데? 보면 딱 누가 생각나지 않냐?”
그 말에 세파리아스는 흥미가 동했다. 턱짓하며 더 해보라는 시늉을 했다.
이에 드낙이 최대한 상세하게 알려주자 세파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월자에 대한 분노가 대단하겠군.”
“그래, 인마. 내가 그냥 살려뒀냐?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뻔히 아는데. 그리고 이 세상에는 네가 해방시킬 인간은 없어. 인신이 죄다 죽었잖아. 굳이 학살을 자행할 필요는 없지.”
드낙이 거드름을 피우며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경제! 인마! 엉! 싹 다 죽이면 누가 소비를 하고 생산을 하냐? 보어리안들도 딱 교화시켜서 목축을 시키든 뭘 하든 하게 만들어야지.”
“내가 보기에 보어리안들은 쓸모가 없는데. 전사로 사용하면 모를까.”
“…….”
드낙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그 모습에 세파리아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네놈. 내가 태양 차원을 전부 먹으면 안 되겠다 싶은 거냐?”
“내가 왜? 참, 나, 사람을 뭐로 보고! 보어리안도 전사잖아. 다음 차원 침공에는 훨씬 좋게 쓸 수 있겠지.”
“싫다.”
“싫어?”
“싫다.”
세파리아스가 생떼를 부렸다. 결국 드낙이 살며시 다가갔다.
“그럼 반반 하자. 지하 연합이 보어리안을 품겠다.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면 보어리안 또한 신제국을 돕도록 하지. 어떠냐. 행성 하나를 신제국이 당장 지배한다고 한들, 뭘 얻겠냐? 한계가 있지.”
“이놈이… 완전히 지욕(地慾)에 미쳐 버렸구나.”
땅 욕심이 도가 지나쳤다. 하지만 드낙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 행성 하나 다 개발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겠어? 그럴 바에는 절반으로 줄여서 더 빨리 이득을 보는 게 좋지. 딱 반으로 가르자니까? 겸사겸사 나오는 생산품의 1할 정도는 양도해 줄게.”
“3할도 아니고? 양도? 거기에 세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생산품을 양도한다고?”
도둑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드낙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3할도 충분히 도둑놈 심보지.”
“1할은 그럼 도둑놈 심보가 아니냐?”
“그럼 차원 다리 이용료로 퉁 치던가.”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고민했다. 잠깐 생각했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차원 다리를 만드는 데 도움 하나 줬나?”
“그건 없지만, 간접적으로는 줬을 것 같은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세파리아스는 드낙에게 한 소리를 하곤 고민했다.
“흠.”
제법 진지한 모습에 드낙도 세파리아스의 판단을 기다렸다.
“지하 연합이 보어리안을 받아들인다라…….”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말에도 세파리아스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건 당연한 소리고. 못 본다고 내가 그런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쩝쩝. 얼마나 받아먹으려고?”
드낙이 입맛을 다셨다.
“1회 이용에 동화 3닢은 받아야지.”
‘일산대교도 아니고! X팔!’
일산대교 1.8km를 건너는 데 통행료가 1천200원이다. km로 계산하면 600원이 넘는다. 인천공항고속도로가 km당 189원인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민자도로(民資道路)는 수익성을 내야 한다고 해도 인천공항고속도로도 일산대교와 똑같은 민자도로다.
차원 다리 또한 건너는 데 막대한 통행료가 부과될 것은 뻔했다.
차원 문을 유지해야 한다는 둥, 헛소리도 명분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너무 심한데.”
“심하면 네가 차원 다리를 만들든가.”
“그건 좀.”
그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또 이미 건설되어 있는 차원 다리를 또 건설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만큼 서로 나눠 먹게 된다.
돈가스집 옆에 돈가스집을 차리는 셈이었다. 장사가 잘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로 앙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간 경쟁도 좋겠지.”
드낙이 툭 내뱉었다.
“태양 차원은 굴라가 있어서 행성이 고루 비옥하다. 그런 곳은 농업과 목축이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프랑스에서 자급자족을 못 한다는 개소리를 들은 기분일 것이다.
“흠.”
“겸사겸사 차원 다리도 확장하고, 식량 행성으로 싸아악 고쳐보자 이 말이야. 그러면 좀 좋냐? 인구가 아무리 증가해도 먹고 살 만하겠지.”
“뉴 에이지 시티로도 만족을 못 했느냐?”
“야. 어떻게 만족하냐? 먹는 건 말이야. 싸면 쌀수록 좋은 거야.”
한 달 식비가 10만 원이라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먹는 것에 흥청망청 써도 한 달에 10만 원 정도라면? 그것만큼 행복한 시대가 없을 것이다.
“옥수수. 옥수수가 좋겠다. 그걸로 가축을 키워서 고기를 보내는 거지. 차원 다리를 이용하는 데 곡물을 보내는 건 좀 그렇잖아? 비싼 고기를 보내야지.”
“고기라…….”
세파리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행성 전체에서 곡물을 키우고, 가축을 키운다면? 그걸 도축해서 보낸다면? 고깃값이 지금보다 1/3은 될 거다.”
현대로 치자면 소고기 한 근이 3천 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눈이 돌아갈 만하겠다.”
“현대 과학기술을 끝없이 받아들이고 있잖아. 그걸로 전투 식량을 만들 수도 있겠지. 아주 싸게.”
인간은 먹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량 가격을 끝없이, 말 그대로 끝없이 낮추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 독일도 해낸 일이다. 그곳은 고기 한 근에 3천 원도 안 한다.
“식량 행성이라…….”
세파리아스가 고민했다. 썩 나쁘지 않은 일처럼 여겨졌다.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보어리안을 끝없이 죽이는 세상을 만들겠다. 실전적인 훈련을 위해서.”
그 말에 드낙이 인상을 썼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럴 수는 없다.”
“뭐, 한 번 해본 소리다. 그렇다면 굴라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삼자대면이 이루어졌다.
“마음대로 해라.”
* * *
굴라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혹은 포기를 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반쪽짜리 신이다. 이 행성에 속박된 초월자였으며,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었다.
“다만 보어리안은 이 행성에서 살게 해줬으면 한다. 그들로부터 업을 계속 먹다 보면 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많이 약체화가 되어서 자유의 몸을 얻게 되겠지만 그런 미래라도 얻고 싶어 하는 게 굴라였다.
‘중립신과는 다르다.’
비교하는 것도 못 했다. 중립신이라면 뭐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굴라는 역량이 되지 않아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행성에 자신의 역량 절반을 투입한 중립신은 행성에 속박된 인신은 아니었다.
결국 굴라의 역량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소리였다.
‘왜 배신을 당했는지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삼자대면을 하는데도 포기할 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었다.
‘하찮은 인신이다.’
이런 인신을 이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바보일 정도였다. 세파리아스는 굴라가 이 행성에서 살아가며 행성을 비옥하게 해줬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좋다.’
굴라가 하는 꼴을 보니, 행성에서 빠져나올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보어리안으로부터 업을 받고 있다고 해도 영영 못 나올 것 같았다.
업이 많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적어도 굴라는 정말 실력이 없는 인신이었다.
그게 되레 세파리아스가 자비를 베풀도록 만들었다.
“좋다. 대신에 행성 땅은 계속 비옥해야만 한다.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다.”
“행성 절반을 뚝 떼어서 보어리안과 지하 연합이 살아가도록 하고, 나머지 절반은 신제국이 관리한다. 나머지 세력은 재주껏 사업하면 될 것이고.”
드낙이 정리했다.
이에 그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정확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굴라,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는 나와 싸워서 여기로 왔긴 했지만 나는 한 번 품은 사람은 그놈이 날 배신하기 전까지는 계속 함께할 생각이다. 적어도 너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짧다. 그 어떤 것도 약속해 줄 수 없다.”
그 약속 자체가 거짓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니, 좋네.”
“흐흐흐.”
드낙이 웃었다. 그리고 굴라의 분신과 굳세게 악수를 했다.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굴라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강철 인형의 전투력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넝쿨로 강철을 찌그러뜨리려면 굴라가 직접 나서야 했다. 반면 상대는 그저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하다.
그것만으로도 실로 불합리한 싸움이었다.
“식민지 이름은?”
“태양 식민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굴라는 삶을 더 연장받았다.
세파리아스는 막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드낙은 세파리아스를 견제하여 반절의 영토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차원 도로 통행비는 착실하게 지급해야 했다. 사업성에서 본다면 이게 신제국에게 더 큰 이득이 될 것이다.
물류량이 자신들의 역량을 2배는 초월할 것이다.
* * *
마력 자원 보급이 불안정했지만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 등의 스틸 로드들은 태양 식민지에서 작전 수행을 더 하게 됐다.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서, 또 실력을 겸하기 위해서기도 하다.”
굴라는 보어리안에 대해서 큰 애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들이 죽으면 업을 얻기 때문에 그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대신 지나친 학살은 지양했으면 한다는 뜻을 표했다. 굴라에게 신앙을 바치는 주종족이기 때문이다.
지하 연합이 가지게 된 영토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보어리안은 당당히 지하 연합의 소속으로 들어갔고, 그 순리를 따르지 않은 이들은 살해당했다.
살아남는 보어리안이 있으면 굴라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죽어도 굴라는 이득을 보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도 굴라는 주피터가 사라진 이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채 버둥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 나약함이 세파리아스와 드낙이 굴라를 살려두게 만들었다.
“보어리안 선별 작전이라……. 신제국도 자국 병사들의 피해를 생각하는 건가? 외할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다이앤타의 말에는 깊은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제국도 보어리안을 포섭하고 지하 연합으로 보내는 일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스틸 로드들에게 맡겼다.
신제국 또한 스틸 로드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 숫자가 상위국보다 적은 두 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한 명은 ‘임시직’이다.
“그런 말 마라. 누가 들으면 신황제께서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다고 하실 것이다.”
“흥.”
다이앤타는 콧소리를 내며 크레시미르 왕자의 말을 무시했다.
“우리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경험을 쌓으면 된다. 이것도 하나하나가 다 경험이야. 언제까지 그분들의 뒤만 쫓을 수는 없다.”
크레시미르가 야망을 드러냈다.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지금도 많은 역량과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크레시미르는 만족을 몰랐다. 그건 다이앤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목표는 신의 반열에 오르는 것.’
정확히는 악마로서의 권좌에 앉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드낙으로부터 피를 받아서 반마의 격에 올랐기 때문이다.
신성력과 온전한 업을 받아먹으며 인신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드낙이 먼저 선수를 치듯이 그들에게 자신의 피를 베푼 것이 컸다.
“여기는 본래 굴라가 지배하는 차원이지만 그놈은 반푼이야. 권력도 야망도 꿈도 없는 초월자지. 아니, 초월자이기는 하나? 신격이 반쪽이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이를 회복하지도 못했잖아.”
상식 이상으로 아둔한 초월자였다.
“너… 동생아, 너 설마?”
지나칠 정도로 몰입하는 다이앤타를 보며 크레시미르가 혹시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다이앤타가 빙그레 웃었다.
“왜? 이렇게 넓은 땅이야. 내 이름으로 된 사업체 하나 만드는 건 어렵지 않겠어?”
이름만 사업체지 작은 국가나 다름없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