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1화
* * *
전투를 경험해서 진이 빠진 채 도망치는 보어리안을 죽이는 일이 시작됐다. 그건 ‘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예정되어 있었고, 변수는 적었다.
“뜨나아아악! 돌격하라! 우리들의 위대한 신을 위하여 싸우자!”
뿔 쥐가 쥐고 있던 할버드를 높이 들어 올렸다. 이내 전신이 그림자에 뒤덮이며 사라졌다.
“끼에에에엑! 드낙 님을 위하여!”
“우리들의 신을 위하여!”
고블린 병사가 고함을 내지르며 자신이 믿는 신앙을 드높였다.
고블린은 인구수가 많았고, 전투 보조 인력으로 사용되기 좋았다. 대한민국의 예비군 포지션과 비슷했다. 신앙에 크게 심취해 있는 광신도들이기도 했다.
역사를 배우면서 야만적인 고블린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익히 보고 들은 덕분이었다.
쿰척!
고블린들은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덩치가 작았기에 지구력이 조금 더 좋았다. 이 때문에 온몸을 강철로 둘렀으며, 방패와 단검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주력을 깨우치지 못한 고블린들이다.
“우―습다!”
뻥!
보어리안이 거칠게 한 놈을 날려 버렸다. 붕 뜬 고블린 중보병이 형편없이 넘어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체격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고블린이 초등학생이라면 보어리안은 거인이나 다름없었다.
취이익―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갑옷에 내장된 회복 마법이 고블린을 치료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고블린 중보병은 바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럴 걱정은 필요 없었다.
“끼에에에엑!”
다른 고블린이 달려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고블린들의 숫자는 많았고, 그런 물량 속에서 그림자로 이동하는 뿔 쥐들이 보어리안의 힘줄을 끊어내고, 손목을 잘랐다.
좋은 기회를 얻게 되면 목을 베고 지나가기도 했다.
푸푹! 푸푹!
그다음에는 고블린들이 단검으로 사정없이 쑤시면 그만이었다.
피가 바닥을 적셨다.
뿔 쥐들은 보어리안의 다리를 묶는 속박 마법도 자주 사용했다.
“뀍!”
턱이 바닥을 찍었다.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진이 빠졌는데도 어찌나 도망을 잘 치는지 달리기가 제법 빨랐기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찍찍! 이게 바로 뜨낙의 맛이다! 이게 바로 뜨낙의 주문이다! 위대한 주문이다!”
짧고 간결하지만 도망치는 보어리안에게 확실하게 쓴맛을 보여줄 수 있었다.
뿔 쥐가 쓰러진 보어리안의 머리를 밟은 채 무기를 높이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잔뜩 흥분한 고블린들이 더욱 고함을 내질렀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목에 핏대를 세우는 고블린 중에는 벌써 목이 쉰 고블린도 있었다.
파사삭―!
다만 ‘굴라의 힘’인지 주문이 빠르게 상쇄되어서 가루가 되어버렸다.
황제 기사단도 도망치는 보어리안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진격!”
아주 열정적인 지하 연합과는 다르게 그들은 엄정한 군율 속에서 움직였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했다.
흐름 검술을 배울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이를 연습하여 성과를 내는 것도 객체마다 달랐다.
이 때문에 극점 찌르기라는 단 하나의 흐름 검술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황제 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보통 수련 기간은 10년이고, 그 이상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황제 기사단의 수습이 되면 일과 시간 외에 따로 행정학을 교육받는다.
적어도 10년을 나라를 위해서 삶을 바쳤다.
황제 기사가 되지 못한다면, 관리가 되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런 제도가 없어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물꼬를 틀어놓은 것이다.
“진형을 지켜라! 일자진으로 상대한다! 흥분하지 마라!”
“작은 인간! 비켜라! 죽인다!”
큰소리를 치던 보어리안에게 황제 기사의 찌르기가 찔러졌다. 머리를 노렸지만 코가 겨우 닿는 수준에 불과했다.
“끼히…….”
보어리안이 웃으려고 했지만, 그전에 그 머리통이 쩍 나누어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황제 기사단 소속의 기사는 흐름이라 불리는 극점 찌르기를 통해서 한 번의 찌르기로 보어리안의 머리통을 박살을 냈다.
그 어떤 것도 극점 찌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피하는 것만이 유일했지만 ‘세상을 베어내는 찌르기’를 회피하는 것도 어려웠다.
생명체의 약점은 아주 다양했다. 몸에 흐르는 대동맥을 찌르는 것만으로도 보어리안은 수 분 내로 죽는다. 심장이나 폐도 마찬가지다.
덩치가 크기에 몸통의 장기를 노리는 것도 황제 기사단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더 확실한 머리통을 노렸다. 만약 피한다면 그제야 몸통을 노렸다.
“크아아악!”
“뀌이익! 뀌이이이이익!!”
와해되고, 도망치는 보어리안은 상어 떼에 몰이를 당하는 정어리 떼처럼 마구잡이로 휘둘릴 뿐이었다.
거침없이 검으로 적을 죽이던 세파리아스의 전투용 거대 육신에서 정신체가 삐쭉 튀어나왔다.
―때가 됐다!
정신 파동이 퍼져나갔다. 드낙 또한 이를 들었고, 다른 이들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보어리안도 들었다.
업(業)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짧은 시간 2만에 가까운 보어리안이 죽었다. 보어리안은 덩치도 컸기에 죽어서 만들어 내는 업도 그 양이 큰 편이다.
그런 보어리안이 떼 몰살을 당했다.
‘생각이 있는 초월자라면 나타날 것이다.’
식량을 약탈해서 받지 않은 부락이라고 해봤자 고작 수백의 사상자를 낼 뿐이다. 식량을 먹은 부락도 수천의 군세를 일으킬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2만이다.
말도 안 되는 업(業)이 갑자기 생겨났다.
‘굴라’라 불리는 신이 보기에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굴라시여! 굴라시여! 위대한 굴라시여!!”
보어리안이 울부짖으며 죽어갔다. 하지만 굴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투는 끝났다. 하지만 드낙이나 세파리아스나 답답함을 느꼈다.
“굴라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드낙이 단언했다. 드낙의 말을 세파리아스는 1,500% 신뢰했다. 중립신의 세뇌에 걸려서 통나무 로켓을 쏘던 놈은 못 믿지만, 지금 드낙은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굴라의 힘은 보어리안들에게 적용되고 있었다. 그만한 보어리안이 힘을 냈는데도 힘을 빌려줄 뿐, 나타나지는 않았지. 도망치거나 이 차원에 없는 건 아니다.”
두 명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굴라, 이 새끼도 정상은 아닌데?”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코웃음을 쳤다.
“실로 그러하다. 이번 전쟁으로 인근의 부락은 싹 다 박살이 났을 테니, 군대를 보내서 토벌하고, 영토를 넓힌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정도로 커진다면, 굴라는 뒤늦게 어쩔 줄을 모를 터다.
“덫 전략을 중심 전술 교리로 만들겠다. 어떠냐?”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어리석은 보어리안을 상대로 덫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앞으로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어 보였다. 보어리안은 학습이라는 걸 못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보어리안 정석 전술 교본의 중심 교리로 삼을 만했다.
“하지만 하나로는 부족한데. 못해도 세 개는 있어야지. 그래야 골라 먹는 맛이 있지 않겠어?”
“필요 없다. 쓸데없다.”
드낙의 농담에 세파리아스는 가차 없이 자르고 자신의 전투 육신을 숨겼다. 그리고 평상시에 활동하는 인간 수준의 육신에 정신체를 집어넣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드낙 또한 궁리했다.
‘굴라는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 행성에 2만 정도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까? 아니면 동면에 들어갔나?’
수많은 상상이 펼쳐졌다. 온갖 광경이 시뮬레이션 됐다.
상상 속의 굴라는 주피터가 만들었던 인신들의 단체인 라그랑지언(Lagrangian)의 공격을 받고 큰 부상을 입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온갖 상상을 하던 드낙은 결국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탐정처럼 상상으로 범인을 때려잡는 건 결국 운이다.
드낙은 운에 기대기보다는 단서와 흔적이 나타난다면 이를 통해서 추적할 생각을 가졌다.
지금 굴라의 흔적은 대단치 않았기에 드낙은 크게 나서지 않았다.
대신 드낙은 지하 연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그곳에서는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윽! 이놈들! 죽여라! 내 순결은 결코 건드릴 수 없을 거다!”
보어리안 여전사가 잡혀 있었다.
멧돼지 머리를 하고 있었고, 어찌나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지 무시무시했다.
암컷임에도 당당하게 전사로 올라갈 정도였고 신체 스펙으로만 따져도 상위 0.1%에 속했다.
비단 일반 수컷 전사도 포획했다.
“잘 생포해 왔다.”
드낙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 여전사가 침을 꼴딱 삼켰다. 느껴지는 기세가 전혀 없는데도 알 수 없는 섬뜩함을 주는 인간이었다.
“반항이 거칩니다. 찍찍.”
보통은 고블린이 해야 할 일이지만 보어리안의 강함을 생각해서 뿔 쥐가 배치됐다.
유동적인 인적자원의 유동적인 배치가 지하 연합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했다.
“고문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드낙이 고개를 저었다.
“터프한 놈들이다. 힘은 이미 보여줬고, 고문할 필요는 없다. 마음을 무너뜨리기 전에 육신이 죽게 될 것이다.”
드낙은 그들의 언어부터 차근차근 알아볼 생각을 가졌다.
‘무식한 놈들에게는 먹을 것이 최고지.’
“이놈들에게 초콜릿 맛을 보여줘라. 그래도 안 통한다면… 치킨 맛을 보여줘라.”
“헉.”
그 말을 들은 뿔 쥐가 제법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치킨의 명성이 아까웠다. 적어도 회유가 되었을 때, 치킨을 주고 싶어 했다.
“그럼 그렇게 해라. 나도 치킨을 미리 놈들에게 주는 건 아깝다고 생각한다.”
드낙은 뿔 쥐의 그런 의견을 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치킨을 늦게 맛본 보어리안은 더욱 치킨을 먹고 싶어 할 것이다.
‘미리 염장이 되어서 나오는 닭고기는 못 참지.’
세파리아스도 염장 닭고기는 못 참는다. 그는 이미 정신체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도 굳이 먹고 자는 육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에서 신이 되었기에 식욕과 같은 욕망을 계속 누리고 싶어 했다.
잠을 자는 것도 육체가 있어야 한다. 정신체는 잠을 잘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굳이 잠을 청하고, 새벽에 일어난다.
그건 드낙도 마찬가지였다.
드낙은 악마의 권좌에 어울릴 거대한 악마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당장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비효율적이기에 하지 않았다.
‘악마로서의 강함보다는 세상을 속이는 기술 자체가 지금은 가장 강하고 효율도 좋으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의 육신 일부를 파동 세계로 낚아채서 사멸시킬 수 있는 게 드낙이다. 자주 보고 자주 표적하여 수련하는 세파리아스나 막을 수 있었다.
‘나도 내 전용 악마 육체를 만들기는 해야 하는데…….’
고민이었다. 아직 정확한 콘셉트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덩치를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대로 행성에 꼬라박으면 아마겟돈처럼 행성을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수 있을 터다.
다만 그 육신을 유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육체에 들어가는 유지비는 크기가 클수록 많아지게 마련이다.
‘장단점이 있다.’
드낙의 목적은 다종족 연합이 테라 행성을 모두 개발하는 것에 있었다. 그 목표를 위해서는 자원을 초월자인 드낙이 깎아 먹으면 안 된다.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배추를 엎어서 배춧값을 높이겠는가?’
유통의 유통의 유통으로 소고깃값을 높인다고 해서 살림살이가 좋아지는 건 아니다.
독일의 고깃값이 한국의 절반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목에 핏대가 서게 마련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드낙은 막대한 자원을 유통과 생산에 투입했다.
‘그런데 내가 악마 육체를 크게 만든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구리 브레스를 통해서 자기 밥벌이는 하는 게 코퍼 만티코어다. 육체를 키우면 그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악마 육신은 지금 있는 육체를 가공해서 만드는 것이 낫다.’
생각은 그랬지만 드낙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나중에 더 나은 방법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태양 축적 권능처럼 벤치마킹하기 좋은 것이 악마 쪽에서도 나타난다면 실천할 생각이다.
“보어리안 또한 특색이 있는 종족이다. 야만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전사로서의 재능이 있지. 고블린들은 손재주가 뛰어난데도 중보병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지하 연합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능히 귀화시킬 수 있지 않겠나?”
“실로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임진왜란 때 일본인 군대가 귀화한 것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신제국은 보어리안을 죽일 생각을 했다. 반면 지하 연합은 보어리안 또한 지하 연합 종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