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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1179화 (1,177/1,239)

1179화

“먼저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주변 정찰을 하면서 보급품을 주던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적들을 안달이 나게 하려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중의 하나가 지금까지 하던 것을 중단하는 일이다.

주변을 설렁설렁 걸어 다니다가, 적이 나타나면 준비해 둔 보급품을 버리고 후퇴한다.

그 작업을 중단하자는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 어떤 것도 말하지 못하던 이들도 한 번 방향이 정해지자 이것저것 말했다.

“갑작스럽게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줄여나가야…….”

“그렇게 하면 보어리안은 못 알아차릴 겁니다. 딴 놈들이 채간다고 여기고 서로 싸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좋은 방향이지만, 세파리아스가 원하는 그림은 아니었다.

전략은 세워졌고, 원하는 그림 또한 있었다. 결과물이 세워져 있다면 그것을 목표로 달리면 된다.

세파리아스가 이미 밑그림을 그려놓았기에 필요 없는 색칠은 안 할 수 있었다.

“바로 중단하도록 하지. 대신 흔적을 남겨서 진지 공사를 하는 곳으로 유도한다.”

“방향만 잡아놓는다면 능히 따라올 놈들입니다.”

6개월간 진행되었기에 보어리안은 이제 신제국의 약탈 식량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하고 싶지 않아도 진지를 약탈하러 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다른 부락과 협력할 테니, 그간 보지 못했던 부락이 참가할 수도 있었다.

부락 혼자서 먹기에는 어려운 큰 진지를 만들 생각이었다.

“게임을 시작하지.”

세파리아스의 말에 모두 웃음을 지었다.

* * *

“아이, 싯팔!”

“왜 그렇게 얼굴이 죽상이야?”

“인간 새끼들이 꼴 받게 하잖아. 요즘 왜 이렇게 안 지나다니지? 약탈을 해야 하는데.”

보어리안이 성을 냈다.

워낙 잘 먹어서 코에 기름이 번들거릴 정도였다. 신제국이 반년 동안 보어리안을 얼마나 살찌웠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신제국은 반년 동안 착실하게 직선 거목 숲을 요새화했고, 이제는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 시기를 전혀 모르는 보어리안은 밖을 돌아다니는 인간들을 찾기 위해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결코 약탈의 맛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싸우지 않고 약탈품을 챙길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그런 꿀단지 같은 일이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서 사라져 버렸다.

“전혀 보이지 않아. 벌써 일주일이 지났어. 지금쯤 와야 정상인데.”

보름까지 기다리던 보어리안들은 결국 점점 더 활동반경을 넓혔다. 그러면서 자연히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한쪽으로 이어져 있어. 무슨 명령을 받은 것처럼 곧게 향하는데?”

“놈들이 생각을 바꿨군. 하긴 그간 많이 털렸으니까.”

당연하게 여겨졌다.

모두 인간들의 전략이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종종 보어리안끼리 부딪치기도 했다.

“네놈들이 훔쳤지!”

“저놈들이 약탈품을 훔친 약탈자들이다! 우리가 약탈할 것을 가져간 약탈자들을 싹 다 죽이자!”

“개새끼들!”

“굴라! 굴라! 굴라!”

원래 인간들의 것인데도 마치 자신들의 것처럼 굴며 사상자가 나왔다. 서로 피를 보고 물러나게 되었지만,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요사태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보어리안은 탐욕에 젖어서 흔적을 추적했다. 종종 일부러 흔적을 지우는 모습도 볼 수 있어서 의심은 없었다. 오히려 더욱 동기부여가 됐다.

‘이걸 추적하기만 하면…….’

‘엄청난 곡식이 우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인간도 많겠지. 인간 허벅다리는 맛있어. 이번에 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적당한 난이도가 그들을 더욱 재미나게 만들었다.

곧 그들은 숲을 벗어나고, 야지를 지나, 적당한 언덕에 지어지고 있는 거대한 진지 공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상당한 행렬이 있었고, 인간도 많아 보였다.

“꼴깍!”

진지 곳곳에서 지피고 있는 모닥불의 연기는 새하얀 색으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킁킁!”

바람을 타고 맡아지는 옅은 빵 굽는 냄새는 코를 벌렁거리게 하였다.

“저기가 분명해.”

보어리안들이 손으로 코를 거칠게 비볐다.

“너무 많은데?”

아무리 야만인이라고 해도 전투를 자주 겪었기에 승패를 가늠할 줄은 알았다.

그들이 어물쩍거리는 사이에 인간 군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했다. 대부분이 보병이었고, 기병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보어리안들은 넘쳐나는 활력과 체력을 통해서 혼이 빠지게 후퇴했다. 튀어나오는 숫자가 가히 천에 달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락이 다 와야 하겠는데?”

그들은 서둘러 돌아가 자신의 부락에게 이를 알렸으며, 족장은 곧바로 장정들을 모았다.

“크게 한번 해보자!”

보어리안들이 집결했다. 다른 부락 또한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고, 그들은 신제국의 군대에 쫓겨나는 똑같은 과정을 거쳤기에, 보어리안들을 모아서 크게 약탈을 할 생각을 가졌다.

“각개격파 당하는 건 아닐지 염려가 됩니다.”

인간 측은 걱정이 앞섰다.

보어리안의 규합력은 생각 이상으로 형편없었다. 서로서로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남의 힘을 빌리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없었다.

“전략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보어리안의 규합력을 너무 과대평가했습니다.”

적어도 하나가 될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놔둬라. 혼란스러워 보여도 결국 도달하는 곳은 같다.”

“그럼 지금 준비시킵니까?”

“무슨 소리냐? 아직은 널널하다.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고, 대신 진지에 대한 방어만 두텁게 해라. 놈 중 어리석은 부락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놀랄 노 자로구만.”

가장 먼저 도착한 부락은 하루를 쉬더니 그대로 돌격할 준비를 했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진지는 백병전을 벌이기 좋았고,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적기사왕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황제 기사단은?”

“이번에 투입되지는 않는답니다. 미리 지하 연합 쪽으로 붙여놨다고 합니다.”

“그럼 오크들도 안 오겠군.”

청기사왕의 말에 적기사왕이 혀를 찼다.

“오러 블레이드는 사용해도 된대? 이놈들, 겁먹어서 안 오면 어쩌려고.”

적기사왕과 청기사왕은 체내에 궤를 달리할 정도로 많은 마력을 품고 있다. 그 마력의 농도를 압축하고, 집적하여 만들어 내는 기술이 바로 ‘오러 블레이드’였다.

당연히 시각적으로 잘 보이기 때문에 보어리안과의 싸움에서는 제한되었었다.

“제한하겠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을 때만 사용하라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부관이 답했다.

“방어 마법으로나 둘둘 말아야겠다.”

“나도 그래야겠어.”

둘은 툴툴거렸다.

아군을 지키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무인이기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것을 더 선호했다.

세파리아스도 모습을 드러냈다. 백병전은 아군의 피해가 커질 수 있었기에 그를 비롯한 기사 계급은 거의 전원이 참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사와 기사는 장비로 구분할 수 있었지만, 그냥 전부 다 회색이라서 중보병과 구분하기는 또 어려웠다.

다만, 부무장이 은근히 부실하다는 것이 기사를 색출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기사들은 롱소드 한 자루 외에는 딱히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 해봤자 롱소드 한 자루를 가지고 있거나, 롱소드 두 자루를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였다.

종족이 달랐기에 그 어떤 정보도, 첩자도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보어리안들만의 착각이었다.

신제국은 아티팩트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보어리안들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땅에 매몰된 아티팩트는 잘 위장되어 있었고, 달팽이 돌기 같은 것이 나와서 주변을 마법 시야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그 정보는 아래의 구리 선을 지나 바로 신제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혹은 나무 속에 숨기기도 했다. 생나무 속에 숨기고, 그 속에 구리나 고무 따위로 만든 선을 쭉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정말로 돌격해 올 생각인데?”

“빅보어도 보입니다. 어떻게 된 건지 제어를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빅보어의 코를 뚫어서 코뚜레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머리에 검은색의 체액 같은 것이 둘러싸여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빅보어는 사물을 분간하는지 잘만 움직이고 있었으며 보어리안의 말도 철석같이 알아듣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검은 체액은 귀로 이어져서 귓속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면갑처럼 보이는 그것에 대한 정보는 없었기에 이번 전투에서 알아봐야 하는 것 중 하나로 지목됐다.

그 외에 적들의 식량이 있는 것도 알아냈다.

“전투에서 패배하면 식량을 찾아갈 생각을 할 테니, 기병으로 요격하여야 한다.”

“아직 주변에는 보어리안이 없다. 충분히 힘을 투사해도 될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놈들을 살려서 보내야 한다.”

부락 하나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그러면서도 부락 하나 이상의 힘을 보여주면 안 된다.

“지연전을 펼쳐야 한단 소리다.”

하루 동안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었다.

* * *

보어리안 부락은 그대로 돌격했다. 그들은 검은색의 액체로 머리가 뒤덮인 빅보어를 앞세우고 진격했다.

“가즈아아아아아!!”

한 부락의 군세는 3천에 달했는데 그간 6개월간 많이도 먹여서 가능한 숫자였다.

놈들은 그간 약탈한 식량으로 빅보어도 두 마리나 가지고 있었다. 몸길이가 8m에 달하는 빅보어는 그 덩치도 어마어마했다.

“뀌이이이이익!!”

어지간한 성벽은 그냥 고꾸라뜨릴 수 있어 보였다.

“죽여불자아아아아!!”

“죽여라! 죽여라! 죽, 죽, 죽죽! 죽여라! 죽여라!”

보어리안들의 군세는 대단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2m에 달하는 큰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 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곳에 빅보어가 들어섰다.

움푹!

하지만 부딪히기도 전에 발이 크게 빠졌다. 지반이 무너지며 빅보어가 대가리부터 떨어졌다. 깊이는 깊지 않았지만 돌격력을 단번에 잃게 됐다.

“꾸어어엉!”

빅보어가 버둥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지만, 마법 바람 때문에 인간들에게 불지 않고, 보어리안들이 있는 곳으로 흘러갔다.

“사격!”

화살이 하늘로 솟구쳐올랐다가 아래로 쏟아져 내려왔다. 날카로운 화살은 모두 철로 되어있었다. 그 화살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후두두둑!

이글거리는 화염은 화살을 벗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크아아아아!”

보어리안들은 불타오르면서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굴라! 굴라! 굴라!”

그들의 신을 외쳤다. 검은 겹가죽으로 인해 통각을 느끼지 않았다. 타오르면서도 계속 내달릴 수 있었다.

꽝!

하늘에서 날아온 투석기에 맞아 보어리안이 날아갔다. 돌덩이는 몇 바퀴나 굴렀고, 수많은 보어리안이 휩쓸렸다.

어떤 투석기는 빅보어와 부딪치기도 했다.

쿠구……!

“끄어어으엉!”

돌덩이에 맞은 빅보어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어깨가 골절되며 힘을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죽도 단번에 상해 있었다. 둔기나 다름없는 투석기의 공격은 특히나 골절상을 입히기 좋았다.

“꿀라, 꿀라, 꿀라!”

혀가 반쯤은 잘린 늙은 보어리안이 그런 빅보어에게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신의 이름을 논하였다.

이에 빅보어가 콧김을 내뿜으면서 사지를 발발발 떨더니 눈을 부릅뜨고 일어섰다.

박살 난 어깨는 고쳐지지 않았지만 절뚝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법 불화살 지역을 지난 이들은 그제야 백병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장애물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들어갔다.

캉!

“기다리고 있었다!”

“지연전―을 펼쳐라!”

인간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들은 지연전이 목표였기에 지연전이라는 말을 계속 되풀이하며 병사들이 흥분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을 잘 상기할 수 있도록 했다.

기사들과 중보병이 보어리안을 일선에서 저지하고, 병사들은 창을 들고 있다가 보어리안을 찔러서 저지했다.

“크아아악!”

보어리안이 답답함에 발악하며 병사의 창을 움켜잡았다. 창날을 잡아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이에 병사는 창을 잡아당겼다가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뀌익?”

멧돼지 머리의 불타오르는 보어리안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져서 굴렀다.

우직하게 버티는 사이에 진지의 후방에서 기병이 나와서 적 부락의 식량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중기병처럼 보였지만 달리는 속도는 경기병이나 다름없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강철마가 내달리고 있었기에 마력이 계속 충전되는 한, 계속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었다.

“기름을 뿌려라!”

기병은 적 후방에 잘 마련되어 있는 식량에 기름을 뿌렸고, 이를 막으려는 보어리안은 그냥 들이박아서 날려 버렸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통짜 강철로 만들어진 강철마의 체중을 생명체가 이길 수는 없었다.

화르르르……!

순식간에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기병은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다시 우회하여 전략적 후퇴를 감행했다.

후방에서 불이 피어올랐지만 보어리안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뒤를 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드낙은 코웃음을 쳤다.

‘진짜 무식한 놈들이군.’

드낙이 주문을 읊으며 지원에 나섰다.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그 누구도 드낙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만큼 은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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