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1169화 (1,167/1,239)

1169화

* * *

초월자와 신제국이 결단을 내렸다. 다른 국가들도 결단을 내렸지만, 유일하게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곳이 있었다.

단순한 예상을 통한 결단이 아니라, 태양 차원을 실제로 관측했다는 소식이 신문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뻗어나갔다.

도시마다 있는 지역 방송국에서 그것을 크게 다뤘다.

모든 지역을 총괄하는 TV 채널은 아직 없었다.

조금은 정보 격차가 있기를 원하는 지배자들이 많았던 탓이다. 아직은 시기상조라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신제국보다 다른 세력이 더 심한 경향이 있었다.

세파리아스는 무적의 권력을 쥐고 있어서 오히려 그런 것에는 관대했다. 또 자신이 철인이었기에 대중으로부터 쓴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되레 작은 부패도 방송국을 타게 되면 바로 세파리아스의 시선을 받게 되니, 부패율을 낮출 기회로 여겨졌다.

신제국은 신황제만 정신을 바짝 차리면 계속 신생국가처럼 팔팔할 수 있었다.

어쨌든, 단 한 곳. 단 한 세력은 아직도 침묵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시선은 하루가 다르게 모이고 있었다.

그곳은 신경을 안 써도 될 정도로 나약한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다종족 연합의 또 하나의 힘이라 불렸으며, 그 여력은 능히 하나의 세력을 담당할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흡혈귀(吸血鬼).

데몬 뱀파이어(Demon Vampire).

아스톨포 샤를로트(Astolfo Charlotte).

탁한 금발과 청안(淸眼)을 지녔으며 묵은지를 압도하는 4800년 묵은 존재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옵시디안(obsidian) 가문을 혈족으로 만들었고, 이제는 그 성세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

혈주술(Blood Witchcraft)로 만든 아티팩트나 마법으로 만든 아티팩트나 연금술에도 손을 대서 사람들에게 판매한 덕분이다. 그것은 실패할 수가 없는 사업이었다.

다종족 연합은 신생국가이며, 행성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구 수준으로 행성을 개발하려면 하루하루, 쉼 없이 일을 해도 까마득했다.

일용직 노동을 하든, 공장에서 일하든, 위험에 노출되기가 쉬웠다.

아무리 교육을 해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장비고, 물약이다.

드낙의 신성력은 상위국에서 상위 인간의 그릇을 확장하고 생성하는 데 사용하고 있어서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세파리아스의 신성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신성력이 담긴 성수를 통해 신제국의 세수를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었고, 그 간극에 연금술사들의 회복 물약이 들어갔다. 비상시에 흘러내리는 고무 같은 것도 가지고 다니는 이들이 있었다.

무엇이 됐든, 아스톨포 왕자와 시조(始祖) 샤를로트는 옵시디안 가문의 뒤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샤를로트는 흡혈귀임에도 일출(日出)과 일몰(日沒)을 지켜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다양한 곳에서 태양이 지고,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게 그녀의 낙이었다.

아스톨포 왕자가 악마의 손에 떨어졌을 때는 그러지 못했기에 더욱 취미에 몰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테라는 평화로웠다.

샤를로트 가문의 시조가 취미 생활을 하기 바쁘다면, 아스톨포는 온실을 가꾸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문 일을 총괄하지만 옵시디안 가문은 문인 가문이다. 행정력 하나만큼은 대단했기에, 아스톨포가 그 덕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시간이 남아돌았다.

아스톨포의 온실은 명성을 아는 이라면 방문하고 싶어 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다양한 콘셉트의 온실은 여성들이 특히나 좋아했고, 그 여성들은 자신의 남편을 닦달해서라도 온실을 방문할 변명거리를 마련했으며, 그렇게 문을 두드리는 데 성공한 여성을 다른 여성들이 크게 부러워했다.

그 속에서 아스톨포는 다양한 이득을 취했다.

이 굴레가 10년이 넘게 이어졌으니, 그 성세는 감히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들이 내는 세금만 해도 몇 개의 도시를 합칠 정도였다.

그런 막대한 돈을 세금으로 낸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만인들이 그들의 사회적 의무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동시에 다른 물건보다는 옵시디안의 물건을 구매하는 편이었다.

옵시디안 가문은 세 명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수천 명이 넘어섰다.

흡혈귀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막대한 돈으로 피를 구매했다. 부랑자 혹은 저소득층의 피는 옵시디안이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피였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신청 안 하면 굶어서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복지체계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저소득층은 옵시디안 가문 덕분에라도 추가적인 수입원을 얻을 수 있었다.

기업이 저소득층에게 직접적인 돈을 주는 셈이었다.

다만 피를 파는 행위가 일반화가 되어가면서 점점 평범한 사람들도 옵시디안 가문의 헌혈 집을 두드리고 있었다.

돈은 돈이니까. 이 때문에 점점 피의 단가가 내려가고 있었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소득계층의 사회이동에 필수나 다름없었던 것이 옵시디안 가문에게 피를 파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자식 뒷바라지를 성공시키며, 흐뭇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노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성공 신화도 이제는 옛말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회는 여물어가고, 그 과실은 무거워졌으며 체구가 나약한 이는 그 과실을 따는 것도, 들고 가는 것도, 지키는 것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어진다면 사회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드낙이나 지배자들은 이것을 재조정하지 않았다.

‘지금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도둑놈 새끼도 아니고.’

옵시디안 가문의 헌신은 진짜다. 그들은 흡혈귀고, 인간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무엇보다 드낙과 세파리아스가 용인했기에 그들은 다종족 연합 내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했다.

* * *

아스톨포는 포도주가 담긴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포도주에 공기가 들어가며 단맛이 강해지고 있었다.

‘시조께서는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 나 또한 마찬가지고.’

샤를로트 가문은 아스톨포 한 명뿐이었다. 샤를로트 혈계(血系)는 정말로 멸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금 부흥했다. 이것만으로도 시조는 기뻐하고 있었다.

샤를로트만 살아남아 봤자 그녀는 그 피를 뿌려 흡혈귀를 만들 수 없었다. 아스톨포가 살아남아야만 했다.

샤를로트의 가계도는 다시금 거칠게 심장 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현상 유지가 좋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뱀파이어는 어디에 놔둬도 빼어난 활약을 한다는 점이다.

“그게 내가 온 이유지.”

드낙이 다리를 꼬아서 책상 위에 턱 올린 채로 말했다.

아스톨포가 포도주를 마셨다. 썩 좋은 맛은 아니다. 10년을 노력했지만, 양조장의 실력은 더디게 올라가고 있었다.

좋은 맛을 내려면 더 많은 세월을 쌓아야 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아스톨포 왕자를 보며 드낙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지금 하는 것만 해도 자신은 죽지 않는다, 이거지.’

실제로 그러했다.

옵시디안 가문의 사회공헌은 그 어떤 기업보다 뛰어났다. 대상(大商)이라고 소리치는 놈들치고 자기 돈을 진짜로 공헌하는 경우는 없었다. 다 친인척이 해 먹는다.

한 끼를 무료 급식한다고 해도 친척이 그 도시락을 만드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다.

한국 군대가 가장 좋아하는 비리 스타일이기도 했다. 병사 상대로는 얼마든지 뺨을 후려쳐도 괜찮았다. 국가의 노예는 곧 군 간부의 노예가 아니던가?

크게 해 처먹을 수 있었다.

그런 놈들에 비하면 아스톨포는 천사였다.

‘흡혈귀도 좋지.’

마력을 지니고 태어나지 못한 인간이 유일하게 팔아먹을 수 있는 게 피였다. 옵시디안은 존재 자체로 인간들에게 이득을 주고 있는 셈이다.

“그 많던 제안을 다 거부했다고.”

“예. 신제국부터 오크까지 연락을 주더군요. 깔끔하게 무시했습니다.”

“오크마저?”

그건 조금 놀라운 소식이었다.

“서 오크들은 주술사 전력이 대단치 않습니다.”

그 말에 드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옵시디안의 혈주술도 주술이긴 주술이다. 주술사가 부족하니, 옵시디안의 주술 아이템과 물약을 사용하면 된다는 식이다.

“오크 전사들의 핵심이 유출되어서 만들어진 것이 서 오크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차원 전쟁에 진심으로 임할 것입니다.”

신제국은 오크 전력을 용병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병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세파리아스는 태풍처럼 공세를 이어나갈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막대한 힘이 필요했다. 벼락처럼 뻗어나가 상대 초월자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흐음…….”

드낙이 고민했다.

아스톨포의 ‘현상 유지’는 분명 도움이 된다. 여기서 더 나가도 그가 싫어할 것이다. 만약 그를 움직인다면 드낙은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책임이 싫어서 권력의 분배를 하지 않았던가?

‘언제 또 일하는 게 싫증이 날지 모르고.’

일하는 것이 취미가 되다 보니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꺼려졌다.

“신제국에게 전쟁 물약 보급을 제안하겠습니다. 단가를 조금 낮춰서 여유를 두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전쟁 물약 보급이라…….”

“테라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물약이라는 걸 명시하고 싶습니다.”

드낙이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타협안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네.’

전쟁에서는 보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보급 물품의 단가가 낮아지면 자연스럽게 더 많은 보급을 준비할 수 있고, 여유마저 생기게 된다.

“그렇게까지 전쟁이 싫은가?”

“그런 것보다는 시조께서 지금이 좋다고 하셔서…….”

드낙은 자신이 회유할 이를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조라고 해도 검에 불과했는데, 상상 이상의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샤를로트와 말을 해봐도 괜찮겠나?”

“저에게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초월자시여…….”

이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파동이 울리며 그가 모습을 감췄다.

공기의 떨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스톨포는 그것이 파동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또한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드낙은 물어물어 샤를로트 시조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큰 저수지에서 삼 일째 지내며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워낙 미인이라 주변에 아재들이 득실거렸다. 나이가 많아도 남자는 여전히 남자였다. 그녀가 입은 검은 드레스는 제법 노출이 심했기에 남자들의 눈길이 저절로 향했다.

그녀는 남성들의 호르몬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고 있는 셈이다.

낚시고 나발이고 넓은 저수지 한 곳만 득실거렸다.

‘가기가 꺼려지는데.’

드낙은 이 평화를 깨야 할지 고민했다.

특히 이 일을 더 이어나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전쟁은 기회다.’

그 기회에 이들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이 그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드낙이 나선 까닭은 전쟁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적게 입기 위해서였다. 그마저도 아스톨포가 싸게 보급을 하겠다고 확답을 줬으니, 목적은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드낙은 모습을 감췄다.

* * *

“우리도 참가해야 합니다.”

드낙이 한 번 흔들었을 뿐인데도 흡혈귀들은 크게 흔들렸다.

흡혈귀들은 대부분이 젊은 축에 속했다. 사실 오래된 흡혈귀라고 해봤자 아스톨포와 샤를로트뿐이다. 거기에 샤를로트는 죽은 흡혈귀였다.

참전파에는 옵시디안 혈족은 없었다. 그들은 문인이기에 전쟁을 싫어하는 경향이 심했다.

반면 옵시디안이 아니라 다른 혈계도에 있는 이들 중에는 무인도 있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주먹이 간지러울 때가 있다.

“참가하고 싶은 이들은 참가해도 된다. 하지만 어디에 속할지는 정하고 하나 되어서 참가해라.”

아스톨포 왕자는 이 또한 막지 않았다. 흡혈귀의 숫자는 수천을 넘어섰고, 흡혈귀 가문만 수십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출난 이들 열 명이 샤를로트의 가문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고고하게 아스톨포의 곁에 머물 뿐이었다.

1,000명의 흡혈귀가 결탁했다. 참전파에 있던 이들 모두가 참전했으며 그들은 서 오크들의 용병으로 참가하기로 했다.

서 오크에게 주술을 다루는 흡혈귀는 희귀도가 있었고, 다른 곳보다 더 큰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오크의 피는 별미 중의 별미지.”

“오크 피는 못 참지.”

오크에게 속하며 오크들의 피를 보급받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500명이 더 참가했다. 피의 미식가들이라 불리는 변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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