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8화
세파리아스가 보이는 주먹이라면, 드낙은 보이지 않는 칼이었다.
단 두 번뿐이지만, 드낙은 주피터의 정신체를 두 번 양단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악마였다.
정신체라고 해서 모두 다 정신체를 쉽게 양단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드낙이 한 것은 파동 공격술이었다. 말 그대로 정신체의 절단 부분을 미립자의 세계로 끌어들여서 완벽하게 분해시키는 일이다.
그렇기에 절단된 부위가 컸다. 말 그대로 소실되기 때문이다.
드낙이 자른 만큼,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마저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며, 주피터는 영영 그 정신체의 부분을 찾을 수 없다.
정신체의 손실분은 그 자체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드낙은 정신체 도살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위력을 보여줬다.
그건 드낙으로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중립신과의 전투에서 드낙은 완전한 악마가 되지 못했다.
그가 드낙을 불러왔을 때 사용한 루트가 세파리아스가 중립신을 죽이는 결과가 되었지, 그런 일이 있지 않았다면 결코 중립신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드낙은 악마가 되고, 테라를 가꾸고, 막대한 업을 벌어들이고 쓰는 동시에 쌓이면서 압도적인 초월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드낙의 라이벌은 세파리아스였다. 그가 지닌 무력을 기준으로 잡고 있다 보니 주피터가 이런 공격을 받고도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드낙으로서는 주피터 같은 인신과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간을 인간으로 안 보니까.’
주피터는 인간을 가축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코끼리도 지능이 높고 돌고래도 지능이 높다.
‘하지만 결국 선택하는 건 인간이어야 한다.’
그게 지성 종족으로서 가장 굳건한 기둥이다.
만약 인간이 아니라 다른 동물을 우선한다면, 옳다고 볼 수 없다.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서 인간이 만든 울타리에서 인간이 생산하는 것을 먹으면서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제에 동물을 인간보다 우선하는 탓이다.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그게 인간이기도 하지.’
하지만 비이성적인 존재가 인간이었다.
인간은 심지어 망막으로 보는 세계조차도 거꾸로 보고 있다. 뇌가 이를 뒤집어서 똑바로 보고 있다고 여길 뿐이다.
인간은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 진화된 흔적이 많았다.
신체적인 부분만 봐도 인간은 비논리적인 존재였다. 숨구멍과 식도가 한 곳을 지나가는 것만 봐도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이성적이어야 한다. 주피터는 죽어야 하는 인신이다.’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해도 그 죄는 사라지지 않고, 그 경향은 말끔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드낙은 지금 울고 있는 여신의 애처로운 모습이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목을 쳐서 죽이고. 그 시체를 분지르고. 그 신격을 핥아먹어야 하는 것이 드낙이다.
저렇게 싸울 의지를 잃었으니, 죽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독하게 대항했다면 대가리에 못을 박아서 죽일 수도 있었을 터다.
마음이 꺾인 주피터는 그대로 침묵했다.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작은 자비라도 보여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주피터는 세파리아스에게 이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세파리아스가 결국 주피터가 있는 곳으로 오자 드낙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주피터의 정신체가 꿈틀거렸다.
나타났음에도 뒤늦게 ‘관측’할 수 있어서다. 드낙이 손을 튕기지 않았다면 더 늦게 알아차렸을 터였다.
그녀가 비로소 굴복했기에 드낙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흥.”
세파리아스는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무력에 꺾이다니. 초월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로서는 이해가 안 됐다.
자신은 심장마저도 히드라의 독에 녹아내렸지만,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피터의 행태가 혐오스러웠다. 이런 인신이 존재한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인신의 권좌에 오른 것이냐. 주피터.”
그 말에도 주피터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입을 열었다. 닫고 있어 봤자 자신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나는 인신이었도다.
꿈틀.
세파리아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주피터는 그야말로 우연의 산물로 태어난 인신이다. 그런 인신이 그 차원의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게 불합리했다.
동시에 세파리아스의 마음속에는 장대비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올랐다. 그의 길은 옳았다.
세파리아스의 시선이 드낙에게로 향했다.
드낙은 전쟁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질서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아…….”
드낙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런 한숨 따위로 방관하는 자세를 보여주었기에, 세파리아스의 결심을 반대하지 못한다.
“태양의 차원이 있는 좌표는 진실이더냐?”
―진실이다.
팔짱을 끼고 있는 드낙에게 주피터가 연거푸 시선을 줬다가 세파리아스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게 세파리아스를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파리아스는 자신의 권능이나 힘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주피터는 그에 대해 모두 답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나는 살 수 있는가?
이에 두 명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주피터가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불멸자로서의 삶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도망?’
우습다. 정신체가 갈라지고, 소실될 것이 분명했다. 그건 미증유의 공포였다. 알 수 없는 힘이었다.
‘무력하도다. 무력하다, 무력해…….’
잠깐의 꿈이었다.
* * *
주피터의 처형식은 거창하지 않았다.
퍼포먼스를 부리고, 정치 쇼를 일으키기에 주피터의 정신체는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며, 인간을 현혹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그녀의 삶은 조금 더 연장됐다. 태양 차원의 좌표가 관측될 때까지 며칠 안 남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태양 차원의 좌표가 관측된 뒤에 주피터는 사멸했으며 그녀가 남긴 것은 신격에 불과했다.
“관측에 성공했습니다! 새로운 차원입니다!”
6개월 동안 꾸준히 차원 다리를 건조한다면 능히 차원 간 이동 다리가 완성된다. 신제국의 첫 성과였다.
다른 행성에서 식량만 가져와도 다종족 연합은 더 크게 부흥할 수 있었다.
더 많은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였지만, 그걸 정말 이해하고 앞으로 나서는 지도자는 드물었다. 한국만 해도 산재한 문제가 많지만, 이를 해결하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차라리 차이나타운을 곳곳에 세워서 중국인들의 돈을 타 먹는 것이 권력자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아니면 말고.
“태양 차원이 관측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신격의 처리다.”
주피터의 신격은 ‘태양신’의 신격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당장 인신이 될 수 있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죽음을 맞이한 탓이다. 마음이 부서졌기에 손쉽게 그 명줄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드낙은 고민 끝에 연합 도시에 지배자들과 차원 통신을 통하여 화상 채널을 개설했다.
통신은 아직 효율이 높지 않아서 저화질이었다. 못해도 3G까지 통신을 발달시켜야 했는데, 기술이 이를 넘어서지 못했다.
중계기가 가장 문제였다.
기술자들이 부족했고, 교육의 방식도 축적이 잘 되어서 잘 발달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드낙 님.”
수많은 이들이 인사를 건넸다. 드낙은 허허 하하 호호 웃으면서 이를 받아줬다.
모두 전쟁 준비로 바빴다. 신제국에 전쟁 물자를 판매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막대한 군대가 진입하게 될 것이다. 따라 만들기 쉬운 화포도 넉넉하게 챙겼고, 마법 건축물도 마찬가지로 쌓이고 또 쌓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자원을 투사할지 두려운 감정을 지닌 이들도 존재했다.
드낙은 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테라는 벌써 몇 번의 침공을 받았다. 그것 하나하나가 테라의 행성 자원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조금 더 면밀하게 테라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적어도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과 자신의 유희를 위해 사용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려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세파리아스의 일에 참여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러라고 권력을 분배했다.’
“태양신의 신격을 누구에게 줄지 정하는 자리다.”
후보자들은 많지 않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엘프는 받고 싶지 않아 했다.
마력을 지닌 엘프는 책임도 적고, 시간은 많은 존재가 됐다.
한량 같은 삶을 벗어나고 싶은 엘프는 없었다. 그들 모두가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마저도 여유가 더 많았다.
엘프는 분명 한계를 초월하게 되었고, 더는 고정된 종족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성향은 아직도 고여 있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이 때문에라도 그들은 내정을 보살필 인재라 할 수 있었다.
‘배신은 꿈도 못 꾸니까.’
후보자는 하나같이 인간이었다. 인간 초월자가 두 명인 현재 다종족 연합의 입장상 그들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인간들은 죄다 반마(半魔)의 격을 얻지 않았나. 후보에 넣을 수 없다.”
“그건 디아볼로스… 아니, 아니, 백색 빛 엘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드낙은 한사코 거부했다. 때가 되어서 악마가 되라는 소리다.
‘인간은 악마의 권좌에 앉는 게 더 좋다.’
세파리아스 또한 동일한 의견이었다.
인간은 악마의 권좌에 앉는 게 사실 더 적합하다. 엘프는 인신에 어울렸다.
결국, 회의라고 했지만 사실상 드낙과 세파리아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되었다면 회의는 무의미하다.
“단, 태양신이 된다면 태양 빛의 권능을 세워야 한다. 태양 빛을 강철 태양에 집중시키는 권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드낙은 거기서 막대한 업을 생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조건을 달자 다른 이들도 이번은 넘어갈 생각을 가졌다. 딱 봐도 재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엘프들은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위험하지 않아 보이는데?’
‘권능을 잘 만들면 놀면서도 태양 빛을 유지하면…….’
“제가 하겠습니다!”
너도나도 손을 들어 올렸다.
엘프에게 허락된 차원 화상 채널은 하나였는데 벨룸 퓨에르 18인이 모두 모여있었다. 서로 얼굴을 들이밀기 바빴다.
‘이런 개자식들을 봤나!’
도시도 가지지 못한 채 드낙이 주는 업을 우걱우걱 억지로 먹어 치우며 악마가 아니라 엘프신이 되는 과정을 밟고 있던 용기의 에르하르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어떻게 너희들이 이럴 수 있느냐! 엘프신이 되어도 내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으면서!”
“어허, 지금은 경우가 다르지 않나. 에르하르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엘프신이 두 명이 된다면 더 일 처리를 하는 데 좋지 않겠나.”
“그건 맞지.”
“너는 너대로 업을 쌓고 있으니 된 것 아니겠냐.”
“너는 태양신이 아니라 엘프신이 되어야지.”
곳곳에서 한소리를 하며 에르하르트를 압박했다. 애초에 벨룸 퓨에르 18위의 에르하르트가 짬 처리당하듯이 신이 됐고, 이제는 누구나 신이 될지도 몰랐다.
드낙이 하는 꼴을 보아하니 혼자서 신좌를 독점할 것 같지 않았으며 알게 모르게 엘프들이 업을 쌓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엘프들 사이에서는 업 소매 넣기 범죄가 일어났던 적이 있을 정도로 초월자가 되는 걸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됐다.
‘태양신이 된다면 적어도 어디에 끌려갈 리는 없다.’
충성경쟁이고 나발이고, 자기가 편하게 사는 게 중요했다. 심지어 드낙조차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총사령관. 총사령관께서 나오시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 더 중요하고 그런 신이 되셔야지요.”
총사령관 칼리스투스에게 다른 벨룸 퓨에르들이 불만을 표시했다.
권력욕이라는 권력욕은 부리면서 벨룸 퓨에르 중 1위를 해놓고 갑자기 태양신이 되는 데 열을 올리다니? 행동에 일관성이 없었다.
“내가 괜히 태양신의 신격을 얻겠다는 게 아니다. 누구라도 먼저 신이 되어야 다음 엘프신이 더 쉽게 신좌에 오르지 않겠는가.”
“그럼 에르하르트보다 먼저 하셨어야…….”
“일관성이 없으시오.”
결국 칼리스투스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이에 다른 엘프들이 만족했다.
두 명의 벨룸 퓨에르를 제외한 열여섯 명의 벨룸 퓨에르가 고민을 한 끝에 7위인 건설의 엘리아킴이 태양신의 신격을 얻기로 했다.
건물에 조예가 있는 만큼 권능을 쌓는 데도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질 것이고 실력이 안 좋아도 실력을 쌓는 데 누구보다 빠를 것이다.
드낙이 허락했다.
사실 드낙은 누가 됐든 상관이 없었다.
‘죄다 자기 일을 잘하니까.’
그놈이 그놈인 셈이다.
태양신의 신격을 받은 엘리아킴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드낙이나 세파리아스처럼 바로 각성하지는 못했다. 수준이 모자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