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5화
27. 결단
카실레안의 판단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신전은 하등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는 만신전을 위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협박을 당한 게 아니다.
‘원수가 되지는 말아야지.’
큰 은혜를 입었고, 적어도 현대에서 필멸자로서 살았던 때보다 지금이 낫다.
수많은 격전을 치르며 카실레안의 격은 한없이 높아졌으며 그의 권능 또한 깊어지고 다양해졌다.
‘성장한다는 건 상황이 언젠가는 바뀐다는 말이다.’
자신이 성장하느냐, 안 하느냐.
자신의 자본이 성장하느냐, 안 하느냐.
자신의 가족이 성장하느냐, 안 하느냐.
그 모든 것.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지금의 상황을 버틸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로 차량을 진입시키지 못하게 하는 갑질에 양반 노릇 하고 싶어서 뇌가 절어버린 아파트 주민들에게 한 소리 들으며 무거운 짐을 옮기는 택배 기사라도, 자식이 한 살, 한 살 먹어가는 걸 지켜보면서 버틸 수 있었다.
무엇이라도, 변화가 있다면 인간은, 감성을 지닌 존재는, 비이성적인 존재는, 버틸 수 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늪에 빠져서 그 무엇도 할 수 없게 된다.
사이클 선수만 빠져나올 수 있는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죽게 될 터였다. 그건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카실레안은 자신에게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아직 만신전에 적을 두고 있었다. 자신에게 변화가 아직은 있었기에 벗어날 이유를 못 느꼈다.
‘은혜니, 원수니, 이제는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만신전에게 공헌한 바가 컸다. 적어도 만신전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카실레안은 그들에게 더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있었다.
대신 전장에 나가주는 것만으로도 그 은혜를 다 갚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카실레안이 만신전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지구로부터 받은 수많은 것들 덕분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문화’다.
아무리 초월자가 되었다고 해서 영화나 드라마를 안 보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남아돌았기에 더 많이 보는 편이다.
카실레안은 이 문화라는 놈 때문에 만신전을 못 버리고 있었다. 만신전이 아니라 지구의 문화를 못 버리는 셈이다.
‘그렇기에 제한된 상황이지.’
싸운다는 것.
그것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카실레안은 사실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그는 전술의 신이며, 치고받고 싸우는 것에 있어서는 최강의 존재다. 만신전도 여기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만신전이 탄생시킨 최강의 인신이다.
그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만신전은 상대를 너무 쉽게 보고 있어.’
이를 개선하기에는 늦었다. 테라에 대한 정보를 다시 만신전에 알리고 만신전이 판단한 다음에 다시 카실레안에게 와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지.’
불가능을 쉽게 거론하는 건 썩 좋은 전술가의 표본은 아니다. 하지만 카실레안은 이미 중간지점에 도달하려고 하고 있었다. 너무 먼 차원 항해가 시작됐다.
‘만신전은 이 원정에 통제를 잃었다.’
그다음에는 만신전의 영향력이 이 원정군에 강력하게 퍼져 있지 못하다는 점에 있다. 당장 지구 출신 인신들이 파벌 놀이, 정치놀음, 카실레안 견제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무경험자들.’
초월자의 싸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잡신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초월자이기도 하지.’
그게 문제였다. 세 살 어린애에게 리볼버를 쥐여준 셈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위험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 꼴을 10년간 지켜본 카실레안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최대한 조율을 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새파란 젊은 놈들이다. 카실레안의 무서움을 듣기만 했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카실레안은 호구나 다름없었다.
오직 좋은 일만 하는 개호구다.
그들은 전쟁을 앞두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카실레안이라는 잔혹한 전술의 신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지구에서 자라고, 인신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카실레안에 대한 정보를 거름망에 한 번 걸러서 보여주는 만신전도 문제였다.
전쟁이 오직 ‘빛’의 길로만 승리한다고 여기는 자들은 정말 세상 편하게 산 놈들이다.
정규병도 약탈과 노획, 강제 징병과 징발을 반복한다. 애꿎은 양민은 정말 손쉽게 털려버린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지만 결국 카실레안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위화도 회군처럼, 회군하여 만신전의 뚝배기를 깰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실을 다져야 한다.’
그렇다면 인신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굴복시켜야 했다. 우주 낙원과 우주 원정군 모두를 카실레안의 발아래에 둬야 했다.
그건 작은 내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카실레안은 자신이 있었다.
‘300:1. 어렵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현재 테라 원정군은 다섯 개의 파벌로 쪼개져 있었다.
그중에 중립 파벌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공을 세워서 만신전에 들어가겠다는 심보로 가득했다. 만신전에 못 들어가도 지구에 남아서 삶을 보내고 싶어 하는 인신으로 가득했다.
‘10년간 잘 지켜봤다.’
놈들은 하나같이 입으로만 털고 싸워도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다. 제대로 된 싸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
카실레안은 이를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가볍게 싸울 마음은 가지지 않겠다.’
적당한 주먹다짐? 어린애들이나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면 한 번 부딪치면 끝장을 봐야 한다.
어리숙한 성인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리면서 어정쩡하게 싸움을 끝내다가 나중에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몇 년을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일벌백계 같은 인정을 베풀지 않겠다.’
300명의 인신 중에 고작 세 명을 죽인다고 해서 초월자들의 태도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았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필멸의 업에서 벗어나 불멸의 업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죽인다.’
말 그대로 인신을 살해할 생각을 가졌다.
그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은 카실레안 아래에 굴종하지 않을 터다.
거기에 카실레안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절반 이상을 죽인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150명의 초월자를 죽일 생각을 가졌다. 그래야 남은 150명이 카실레안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분명 테라 원정 전쟁에서 톡톡히 활약할 수 있을 터였다.
‘만신전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이제 그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
테라 원정군 사령관으로 지목된 순간부터 만신전이 카실레안에게 어느 정도로 의존하는지 알 수 있었다.
‘300명의 인신 모두, 신병이나 다름없으니까. 만신전도 쉬이 넘어가겠지.’
그들은 꽃을 피웠다고 해도 온실 속에서 키운 꽃일 뿐이며, 밖에 놔두고 관리를 하지 않으면 썩어 문드러져 시들어버릴 꽃들이다.
온실 속 화초는 어차피 전쟁에서 많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에는 여기서 절반을 죽여서 카실레안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 좋았다.
‘다섯 파벌 중에 가장 강한 놈부터 건드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강하다는 것만으로도 카실레안에게서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
‘빅토르 파벌의 빅터.’
그나마 가장 카실레안이 좋게 평가하는 이다. 이것 또한 상대적 평가일 뿐이다.
카실레안은 가장 먼저 대가리를 터트릴 놈으로 갈까마귀 파벌의 버트랜드를 생각했다.
‘간사한 새끼들이지.’
카실레안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인신은 아니었다.
간사하다는 건 지능적이란 소리다. 누구는 좀도둑이 되는데 누구는 연쇄살인범이 되어도 잡히지 않는다. 그 차이는 지능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는 말단 공무원에서 30년 평생을 살지만, 누구는 단 8년 만에 자신의 업적을 드높이며 거대한 사업체의 사장으로 우뚝 선다.
운이 따라줘야겠지만, 지능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간사하다는 건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그건 충분히 나쁘게 여겨진다.
‘적에게 해야 할 일을 아군에게 하고 있으니까.’
뚝배기를 가장 먼저 깨버려야 할 놈들이다. 만약 손해보다 이득이 많았다면 간사해도 옆에 뒀을 터지만 이득보다 손해가 컸다.
장자 지방이라 불리는 모사들이 그러하다. 그들의 비상한 머리는 절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이득을 군주에게 건네준다.
그 과실을 보고 있자면 살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갈까마귀 파벌이라 불리는 이들의 수장, 버트랜드는 손해가 더 큰 놈이다.
그런 놈은 죽이는 게 카실레안 입장에서도 좋았다.
마음을 먹자마자 카실레안은 바로 움직였다.
먼저 무장을 했다. 만신전의 수많은 인신이 자신들을 위해서 싸워줄 전술의 신을 위해서, 전쟁의 신을 위해서 만든 전신 갑주였다.
카실레안은 만신전의 선택을 받아, 카실레안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반신(半神)으로서의 삶을 제법 오래 산 적이 있었다.
그때의 삶은 카실레안에게 아주 중요한 경험을 건네줬다. 동시에 만신전은 수많은 전쟁 데이터가 존재했다.
카실레안은 그 깊은 곳까지 들어갈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 만신전이 만든 최강의 장군이다. 그 장군의 경험치 축적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치부까지 보여줬다.
중립신(中立神), 엘 마르토 카사다민.
그에 대한 것. 그와 함께했던 전쟁. 그런 것마저도 카실레안은 경험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카실레안은 자신의 육체를 지닌 인신이 됐다. 그것도 그냥 육체가 아니었다. 반신급의 육체였으며, 데몬 프린스와 비견될 정도로 고농도로 업(業)이 축적된 육신이다.
중립신은 육신을 잘 사용하는 대신(大神)이었다. 자주 육신을 갈아치우기는 하지만, 전투에 육신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신체는 한계가 있다.’
행성을 관리하고, 차원을 가꾸는 데 적합한 것은 정신체다. 하지만 전투는 다르다. 명확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게 좋았다.
그중에서도 카실레안은 중형급 인간 육신을 좋아했다.
중형급이란 2.5m 이상의 덩치를 지닌 것들이다.
너무 큰 덩치는 싫어했다. 화력 투사에 무력한 탓이다. 60t짜리 탱크를 100t짜리 이족보행 병기가 발로 걷어차면 탱크는 멀쩡하고, 이족보행 병기의 다리가 박살이 난다.
카실레안의 육신은 3.25m로, 전투를 거듭한 카실레안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크기였다.
당연하게도 그 육신에는 전초극의 권능 같은 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카실레안의 경우, 싸움의 달인이다. 지금까지 부딪쳐서 한 번도 1:1로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런 카실레안에게 ‘전투용 권능’은 쓸모가 없을 정도다.
다만, 상대의 권능이나 초월의 힘을 방해하는 권능이 있었다.
등 뒤에 있는 원형 고리는 카실레안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며 그가 원하는 무기를 사출하여 카실레안의 손에 딱 잡히게 설계가 되어있다.
무기의 종류는 실로 다양했다.
대구경이라 할 만한 긴 총도 있었고, 장창부터 편곤, 짧은 쌍단검에 종류별, 형태별로 또 다른 방패도 존재했다.
무기고 고리(Armory Ring)는 그 자체로도 후방을 방어해 주고 있었다.
육신은 전신 갑주 외에도 밖에 외골격(Exoskeleton)이 하나 더 자리 잡고 있었다. 뭉툭하게 튀어나와 있는 앙상한 외골격은 전신 갑주와 똑같은 흑색이었고, 무광택이었다.
매우 실전적인 색감을 지니고 있었다.
외골격의 소재는 티타늄 합금을 사용했다.
당연하게도 티타늄은 은빛을 띠기 때문에 무광택의 흑색은 도색을 한 것이다.
카본을 쓰지 않아서 무겁긴 하지만, 되레 카실레안은 이 육중함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싸울 때 체중은 중요한 지표다.
체중은 늘었지만, 외골격은 무게를 지탱해 주기 때문에 되레 움직이기 편했다.
이 때문에 3.25m의 체고만 보고 덤벼드는 놈들은 순식간에 짓눌러서 박살이 난다.
체고에 비해서 체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둔중하다.
적의 허를 찌를 수 있다는 점에서 카실레안은 ‘무게’를 택한 셈이다.
인간의 몸에서 정신체가 빠져나와서 그 몸에 깃들었다.
눈을 뜬 카실레안의 앞에 격납고가 열리는 것이 보였다. 전신 갑주는 우주에서 활동하기 편했다. 발아래로 액체 연료가 분사되며 폭발적인 운동량을 토해냈다.
동시에 관절에 두툼하게 돌출된 곳에서 세 개의 분사기가 움직임을 보조했다.
카실레안은 그대로 뻗어나가 인신(人神) 버트랜드가 있는 우주 낙원으로 향했다.
상대는 금방 자신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인가? 카실레안.
거침없는 반말이다. 이에 카실레안은 무응답으로 대응했다.
―카실레안? 접근하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
―카실레안, 멈춰! 멈춰!!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내 우주 낙원에서 미사일이 쏟아져 올라왔으며 대인 마법이 그를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