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0화
* * *
다종족 연합에는 몬스터로 죽는 이들이 많다.
다치는 이들도 있었고, 저주를 받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런데도 몬스터들이 살아남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 재료가 특출난 탓이다.
무엇보다 아직 다종족 연합은 행성 자원을 100% 사용한다고 볼 수 없었다. 현대 지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지구라는 행성이 가지는 자원을 100% 활용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그건 다종족 연합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지성 종족이 점유한 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성 종족은 모여서 살게 마련이고, 변방에는 언제나 괴물들이 살 수 있는 곳이 득실거렸다.
억지로 나서서 그들을 구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땅이 어느 공사의 것인데 그들이 아닌데도 땅을 사는 꼴이다.
그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다. 당장 활용되지 못한 땅을 주먹구구식으로 청소한다면 내년에 괴물을 사냥해서 얻는 수익과 마법 재료는 바닥을 칠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몬스터 구제에 대한 명확한 ‘권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3할이 세금이요, 4할은 실버 아머의 운영 자금으로 들어간다. 그건 나라가 7할을 가져가고 귀족의 자제에게 3할만 주겠다는 더러운 심보로 보였다.
“받아들일 리가 없는데, 받아들인 이들이 있다는 거지. 이게 무슨 의미인가?”
루-부의 모습에 문관이 다급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손을 부르르 떨었는데, 분노를 억누르는 모습으로 보이고, 다혈질 기질이 조금 있는 것 같았다.
“공금 부분은 사실 실버 아머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실버 아머는 신제국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 운영은 사실상 실버 아머가 집행합니다.”
“뭐라?”
괴이한 말이었다. 그래서 루-부는 설명을 요구했다.
“실버 아머는 신황제 폐하로부터 나왔지만, 그것의 하나부터 열까지 결정하는 일은 실버 아머가 행한다, 이 말입니다.”
“…….”
“실버리 어셈블리(Silvery Assembly).”
은빛 의회.
“그것이 실버 아머 내의 새로운 정치 체계입니다. 오직 실버 아머 내에서만 효력을 가집니다.”
대단히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세파리아스는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을 모르는 듯했지만, 그는 초월자다. 그리고 그 어떤 초월자보다 무서운 힘을 지녔다.
드낙과 세파리아스는 중립신의 대계에서 사용됐다. 절대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고, 본래는 대계가 완성됨과 동시에 업(業)이 되어 녹아 사라져야 했지만 살아남았기에 그 이상으로 초월자의 권좌에 올렸다.
다른 초월자들이 봤다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을 터다.
“은빛 의회…….”
“실버 아머에 속한 이들 모두가 그 의회의 의원이 되는 건 아닙니다. 오직 국경 수훈 메달(Frontier exploit medal)과 증명서를 신황제 폐하로부터 받은 이만 가능합니다.”
“내가 데려온 수행원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단 소리군.”
“예. 다만 그들의 가슴팍에 엠블럼이나, 깃발을 들 수 있게는 할 수 있습니다.”
수행원에게도 실버 아머만의 무언가를 내어줘야 한다.
“그 공금,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 있나?”
“실버리 어셈블리에서 결정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허.”
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권력이다. 실버 아머의 활동반경은 변경, 전체에 있었다.
대한민국을 예로 든다면 수도권 외의 모든 곳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울 경찰이 부산에 내려와서 깡패 새끼를 체포하는 격이다.
이와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신제국에서 발생하려고 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정말로 이것을 용인하셨나?”
상상 이상의 권력이다.
루-부는 그런 곳에 발을 들였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서 결국 그런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예. 백색 병영의 가장 중심에는 대정원이 있습니다.”
“굉장히 넓었지.”
“그곳의 중앙에 폐하께서 내리신 선언문이 존재합니다. 그곳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그 사본입니다.”
“누가 많이도 물어봤나 본데.”
그 말에 문관이 어색하게 웃었다.
실버 아머 같은 강력한 권한을 지닌 탐스러운 과실을 먹기 전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는 건 권력자의 속성이다. 지역 유지들도 훌륭한 권력자들이었다.
선언문을 읽은 루-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구구절절 늘어놓긴 했지만 확실한 구문이 존재했고, 논쟁이 될 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가서 신황제의 손바닥이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다.
상당한 퍼포먼스였다.
루-부가 고개를 끄덕이자 문관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수많은 것을 논했고, 하나하나 군침이 가득한 이권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모든 것이 신제국의 황제로부터 나왔음을 명시했다.
루-부 코워드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그날로 실버리 어셈블리 의원이 됐다. 동시에 열정적으로 활동했는데, 신황제의 조칙(詔勅)이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실버 아머로서의 첫 번째 임무였다.
[괴물을 잡아서 신제국에 새로운 검과 방패가 나타났음을 만인에게 알려라.]
모든 실버 아머가 이를 행하려고 했지만, 그게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경력이라…….”
백색 병영의 외벽에는 각자의 초상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비를 막기 위해서 검은색의 대리석이 지붕을 이루고 있었고, 그 내부에 자리잡혀 있었다.
매일 청소를 하는 탓에 깔끔했다.
낙서를 막기 위해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었으며, 순찰병도 제법 됐다.
이를 구경하려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초상화 아래에는 경력이 적혀져 있었다. 어디서 뭘 했는지를 적은 것이 아니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만 적어놓았다.
그게 불을 댕겨놓았다.
이번 일도 분명 경력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단순히 명예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신황제가 실버리 어셈블리의 의원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무슨 임무를 내려줄지 모른다.’
실버 아머의 의원에게 변방의 땅을 관리토록 할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의 권한을 줄 리가 없었다.
루-부 코워드는 가문에 대한 건 이미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 누구도 ‘실버 아머의 이권’을 자기 가문에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자신들은 떨이다.
심지어 루-부 코워드조차도 떨이였다. 그는 코워드 가문의 혈족이 아니다. 그저 능력을 인정받아서 코워드 가문원이 되었을 뿐이다.
‘언제 끈이 떨어질지 모른다.’
이 때문에 실버 아머 내부에서는 마음이 맞는 이들을 서로 물색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종 화원으로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루-부 코워드는 일약 스타나 다름없었다.
변방에서 그의 무위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하여 시작부터 많은 이들이 접촉할 수 있었고, 입맛대로 고를 수 있었다.
그 덕에 루-부의 무리는 가장 먼저 준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신제국으로부터 내는 세금은 1년 뒤다.’
앞으로 1년 동안 얻는 수익은 모두 자신과 실버 아머의 공금으로 들어간다. 이때 바짝 움직여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 가문 없이도 실버 아머를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곳은 변방 귀족 중에서도 버리는 패로 쓸 만한 이들이 와있었다.
성공한 이들은 애초에 실버 아머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문으로부터 멀리 가야 하고 일을 해야 한다. 아직 놀고 싶은 적자들은 여기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코워드 가문 또한 그러했다.
도시의 지배자이니, 굳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아서다.
그러니 의외로 실버 아머는 신생 세력이나 다름없었다. 서로 죽이 잘 맞았다. 하나같이 가문에서 썩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해 왔다.
“숲 하나를 몰이해서 싹 다 죽일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젊은 피로 이루어진 실버 아머는 서로 말도 편하게 했다.
“그럴 인원이 안 되잖아.”
“숫자가 적어도 상관없지. 힘이 있는데. 무려 상급 전신 갑주라고.”
혼자서도 제법 성과를 낼 것이다. 그들은 논의 끝에 소수를 돌리고, 집중 타격을 하기로 했다.
숲에서도 능히 전력 질주가 가능한 ‘강철마’를 사용했다. 마력을 사용하는 놈이지만, 산악을 타고, 숲에서 확실하게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오프로드를 한 번 달려본 사람은 험지가 얼마나 험한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기사는 더더욱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지형을 무시하는 것이 강철로 만든 말. 강철마였다.
모든 실버 아머가 강철마를 사용하고 있었다. 신제국의 배려였다. 더는 변방의 반란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한 마음이 느껴졌다.
두두두두두!
숲에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밤에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서로 합을 맞추지도 않았고, 수행원들은 서로의 얼굴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습하는 건 어리석었다.
장비빨만 믿고 나대는 건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했고, 그 정보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검문소 앞에 선 이 평범한 아저씨가 쓰리 스타? 이딴 현실이 있게 마련이다.
실버 아머는 거침없이 달리며 생각한다.
‘보인다.’
소리가 시각화되어서 들어오고 있었다. 몇 번 연습했지만 그래도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인간은 소리를 듣지, 보지 않기 때문이다.
파동처럼 울렁이는 곳으로 들고 있던 투창을 날렸다.
나무 뒤편에 숨어서 숨을 헐떡이던 원숭이처럼 생긴 괴물의 가슴에 투창이 그대로 박혔다. 이를 강철마를 타고 지나가면서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짜릿하다.’
정보의 우위. 그것이 보여주는 시야는 압도적이었다.
파다다다다닥!
거친 날갯짓 소리가 들리며 하늘 위로 괴물 새들이 날아올랐다. 주둥이는 대단히 길고, 뾰족했다. 새빨간 눈동자에 흉흉함이 깃들어 있었다.
적촉새(Red point bird)다.
저 부리로 만든 창은 평범한 사람이 쏴도 명중률이 7할을 넘기고, 숙련된 이가 쏘면 9할을 넘긴다는 귀신 같은 명중률 상승의 힘을 지니고 있다.
당연하게도, 적촉새 또한 그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놈들은 빠르게 날갯짓을 했다. 마치 벌처럼 허공에 호버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빠른 날갯짓이 가능했다.
그 속에서도 명중률은 높아서 원하고자 하는 곳에 부리를 찔러넣을 수 있었다.
“찾아 막는 화염 방패!”
시동어에 은빛 전신 갑주가 반응했다. 동시에 하늘에서부터 별빛이 떨어져 내렸다.
미리 사용해 둔 별빛 타격이다. 보름에 한 번. 오늘만큼은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크워어어어!”
배불리 먹고 삼 일째 잠만 자던 트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음창.”
정확하게 무릎에 창이 깊게 박혔다. 놈은 그것으로 끝이나 다름없다.
재생되어도 창을 뽑아야 했는데, 재생이 일어난 상태에서 창을 뽑는 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마법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하지만 전투 상황이 끝날 때까지는 유지될 것이기에 걱정은 없다.
쾅!
분노에 찬 멧돼지의 돌진이 있었지만 강철마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나무조차도 부서뜨리는 강철마다.
순식간에 숲을 흔들어 놓았고, 뜻밖에도 괴물과 야수가 날뛰는 곳에 도적들도 소탕할 수 있었다.
숲이 들썩이자 나온 놈들을 표적으로 삼았고, 본거지까지 쾌속으로 찾아낼 수 있었다.
“진입한다.”
“싹 다 죽이자!”
피를 잔뜩 묻힌 이들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루-부는 가장 선두에 섰다. 그는 맹장 기질이 다분했고, 그 누구도 그를 막아내지 못했다.
“내가 바로 샛굴의 두목……. 컥!”
제법 악명을 날린 놈도 투창 한 큐에 가버렸다. 보고도 피할 수 없을 만큼 타이밍이 어긋나 있었다.
도적 떼를 사로잡고, 노예로 부려지던 이들도 구출해 냈다.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수백 명이 실버 아머에 의탁했다. 수십 명의 도적들은 포승 되어서 실버 아머의 본거지인 백색 병영으로 끌려갔다.
당연히 그들이 구출한 이들도 함께였다.
되돌아온 이들은 수십 명의 도적을 재판에 넘겼다.
포상금도 받았다. 범죄자에 대한 증거가 명확했고, 증언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부린 노예들의 증언에 따라 그 피해액을 모두 보상할 때까지 감옥에서 풀려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덕에 포상금은 대단히 많았는데, 노예 중에는 원치 않게 아이를 낳은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그 아이를 보는 눈앞에서 부숴 죽이기까지 했다. 그 정신적 충격을 받은 노예에게는 막대한 배상금을 내야 했고, 그 배상금은 당연히 범죄자가 죽을힘을 다해서 일해서 갚아야 했다.
15년 넘게 도적들을 위해서 밧줄을 꼰 노인은 돈 대신에 집과 국가 연금을 적게나마 받게 되었다. 대신 국가는 범죄자의 인적자원으로 생기는 이득을 챙겨갔다.
“보고서를 올렸는데, 나라로부터 답변이 왔습니다.”
실버리 어셈블리.
은빛 의회에서 처음 안건은 다름 아닌 ‘의탁자’에 대한 처우였다. 이건 실버 아머를 넘어서서 신제국의 판단도 필요했다.
그들에게 의탁한 이들이 마을을 짓고, 살아가도록 하며 이를 실버 아머가 지키기 위해선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의탁자들은 실버 아머의 일원이 아니고, 수행원도 아니다. 그들은 신제국의 신민이었다. 그걸 실버 아머가 가로채려 하는 것이다.
* * *
“신제국의 신황제, 세파리아스 불파겐 폐하께서 말씀하셨다. 이를 들어라.”
“경청하겠나이다!”
“신제국에 영광 있으리!”
백색 병영의 한 곳에 있는 의회에서 신제국의 대신이 입을 뗐다. 먼 거리였음에도 행차했다. 그만큼 실버 아머가 앞으로 변방을 다스리는 게 중요해서다.
“의탁자에 대한 판단을 먼저 하겠다.”
처음에는 수백 명이었지만 의견이 오고 가고, 결정되는데 시일이 걸렸다. 지금 백색 병영에 있는 의탁자는 수천에 달했다. 그만큼 사람 등쳐먹는 놈들이 변경에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