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9화
* * *
10만!
그건 보통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다종족 연합이 깃발을 올리고 10년이 넘게 시간이 흘렀다. 전쟁이 없어졌고, 굶어 죽는 이들도 적어진 세상이 도래했다.
아들, 딸 구분 없이 하나만 낳자는 소리도 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주말에는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보고 넋 놓을 여유마저도 존재하는 세상이 바로 다종족 연합이었다.
심지어 뿔 쥐들은 ‘카드놀이’를 할 권리와 시간까지 마땅히 추가로 부여되어 있었다. 과거에 있었던 거대한 내전 탓이며, 이 법규는 영원불멸할 시간까지 절대 바꾸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대로 가만히 둔다면 혹하는 이들이 수십만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드낙이 조금은 놀랐다.
강철의 비, 강철 인형들의 ‘전쟁 체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드낙은 말 그대로 10년 동안 놀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신제국의 사정에도 조금 어두웠고, 신제국의 변방에 대한 정보는 기억에도 없었다. 보고서를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인가?”
“식량 자유화 탓이 크지. 어디서든 식량을 보기가 쉬우니까. 인구수가 자연 늘어나고 그 인구수를 관리할 관리는 부족한 재능임에도 관리로 등용된다.”
조금이라도 쓸 만하면 쓰는 것이다. 그 탓에 부패율이 높고, 제대로 된 행정절차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게으른 관리는 귀찮아서 안 하거나 대충 도장만 찍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 덕에 국고도 늘리기 쉽지.”
부패한 관리를 잡으면 많은 재산을 취득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재산은 국고로 들어가고, 관리는 목이 잘리며 가족은 광산행에 직행하며 고통받은 이들은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런 과정이 신제국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니까. 차원 다리를 지금 짓는 건 미친 짓이야.”
드낙의 말에도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멈출 수 없다.”
멈춘다면 신제국은 분열할 수밖에 없었다. 신을 죽이고 인간을 해방하겠다는 이데올로기는 이미 너무 깊게 뿌리를 내렸다.
이를 알면서도 언급하는 드낙은 실로 재수가 없어 보였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근접전투를 하는데 혼자서 화살을 쏘고, 덫을 놓는 사냥꾼 같았다. 이 덫을 세파리아스는 정면 돌파했다.
“10년 동안 조용히 있던 놈이 할 말은 아니다. 알겠느냐?”
“알았다.”
드낙이 10년을 조용히 지냈음을 두고 세파리아스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드낙은 이를 받아줬다. 그러고는 의자 뒤로 몸을 빼면서 구경했다.
‘반란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구경이나 해볼까.’
사람들을 구하고 싶지만, 이곳은 엄연히 세파리아스의 나라였다.
만약 드낙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하여 함부로 한다면, 세파리아스는 더는 신제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신제국에서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지배하면서 오는 재미는 있다. 만인을 아래에 두고 자신이 진행하는 대로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니 재미가 없을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평생. 영원불멸토록 지배자가 되고 싶다. 그만큼 지배는 재미있는 일이며, 인간이 가장 원하는 삶이기도 했다.
하지만 드낙이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놀고먹는 삶.’
얼마 남지 않았다. 초월자의 숫자마저도 증가한다면, 테라는 그 누구도 넘을 수 없으며 지상낙원이 된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그만인 것이다.
‘희생되는 이들은 안타깝지만, 그들이 자초한 것이다.’
드낙은 대신들과 세파리아스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배하지 않으면 군림하지 말아야 한다. 군림하는 것을 보면 지배하는 자와 관리하는 자들은 결국 관직을 내려놓고 다른 길을 갈 것이다.
노래방에서 하이라이트에 마이크를 빼앗아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갑질하고 싶은 놈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이고, 그게 바로 지배하지 않되 군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가만히 있는 건 아니지.’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신제국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최대한 인도적인 차원으로 반란을 종식시킬 것이다.
“군대를 동원한다. 이번에 경험을 쌓는 것도 좋을 터다.”
가장 먼저 세파리아스나 드낙의 전투 경험은 더 쌓을 필요가 없었다. 대신 ‘실전’에서 조금이라도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군사 활동이 예정됐다.
초월의 힘을 가진 초월의 군대가 나서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서 신제국의 군대는 더욱더 강력한 군대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신병에게 경험치를 주입하는 건 항상 피해가 일어나는 일이고, 그걸 줄일 수 있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그럼 강철 인형은 안 보내는 거냐?”
“굳이 왜? 피는 흘러야 배우는 것이 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전투 강철 인형을 동원했다.
있는 것을 안 쓸 수는 없는 노릇이며, 피해를 줄임과 동시에 큰 피해를 그들이 입는다면, 더 많은 실전 병사가 탄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군대 모두를 전투 강철 인형으로는 대처할 수 없다.’
상위국과는 달리 마력을 품은 상위 인간을 만드는 데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 신제국이었다. 되레 배척하는 경우도 있다.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고,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는 식이다.
“군대 규모는 그들보다 3배 정도 많으면 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대신의 말에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는 말은 조금 달랐다.
“그 정도로도 능히 대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제국에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났다.”
10년이 지났고, 청소년은 성인이 됐다.
그들은 여물지 않은 신제국의 봉우리다. 꽃을 피울 필요가 있었다. 강제로라도 한 번 정도는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총동원령을 내려서 신제국의 신민들의 수준을 점검해 보겠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지만 명분만큼은 기가 막혔다.
“총동원령 세금은 상황이 끝나고 최대한 비율을 맞춰서 돌려주도록 하지.”
먹고 입을 싹 닫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부패도 싹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군대를 동원하는 일이다. 부패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말이 옳다. 크게 움직일 때, 작은 움직임은 놓치기 쉽고, 기회주의자들은 지금을 적기라 여길 것이다.”
군량품을 훔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몇 놈만 입을 맞추면 될 것이고, 웃대가리가 부패했다면 더욱 쉽다.
이를 놓치지 않고, 추적하여 죄를 밝혀낸다면 그들의 재산과 인적자원까지 몽땅 국고로 환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겠지만, 국가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싫다는 놈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악(惡)을 가지고 있다.’
그 악은 언제나 존재하며 그 덕에 다종족 연합이 더 풍성해졌다. 하지 말라고 해도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이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존재하며, 항상 잡혀서 죽을 때까지 노동징역형에 처해진다.
‘그래도 싹은 계속 난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었다. 그 덕에 징역노동 분배금이 매년 성장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범죄자가 시민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는지, 이제는 제법 높은 직위에 있는 관리조차도 그에 대해 관심을 지대하게 갖게 될 정도였다.
이는 거의 종족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여겨졌다. 가벼운 죄라면 피해액의 3배를 물어주는 것이 일반적이며, 동시에 돈을 다 갚더라도 감옥에 가야 했다. 중죄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합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형벌이 무거운 것이 다종족 연합의 형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군과의 전쟁은 범죄자들에게 둘도 없는 기회나 다름없었다. 이를 감시하고 범죄 증거를 모으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드낙! 도와주겠나?”
“나한테 왜 물어? 지하 연합은 내 손을 떠났다. 협상하려면 그들과 해야지. 신제국은 너의 제국이기도 하고.”
드낙이 신제국을 지배했다면 신제국을 위해서 판단해야 했을 터고, 드낙이 지하 연합을 지배했다면 지하 연합을 위해서 판단해야 했을 터다.
그 둘을 하지 않은 채 10년이 지났다. 이제 그는 다종족 연합에서 홀로 업무량이 적은 자였다. 연합 도시 또한 드낙이 따로 관리하지 않고 있었다.
‘세상 살다 보면 이런 인재가 있고, 저런 인재가 있는 법이지.’
연합 도시를 관리하는 행정관은 현상 유지에 맛들은 이였다. 그저 현상만 딱 유지하면 만족하는 자로 드낙을 대신하여 연합 도시의 대리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공짜로 뿔 쥐들을 이용하려고 했던 시도는 그렇게 무산됐다.
‘이제 더는 드낙을 이용할 수 없겠다.’
세파리아스는 날카로운 드낙의 판단에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란 게 그렇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히 실리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부탁에 못 이겨서 보증 써주는 미친 인간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드낙의 판단력은 매정하다 할 수 있었다.
* * *
신제국에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동시에 지하 연합은 큰돈을 버는 기회를 얻었다.
“이번 전쟁 기간 동안 얻은 죄인들이 모두 그 죄를 끝낼 때까지 그들에 대한 노동징역 배당금을 나눠주겠다.”
“찍찍! 얼마를 줄 생각이냐?”
“5%.”
“30%는 받아야 한다! 전쟁에는 치안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치안이 무너지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들도 언제든지 범죄를 저지른다. 그런 그들을 때려잡으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으며 뿔 쥐들 또한 대거 투입되어야 한다. 그래야 더 재미를 볼 수 있다.
“과하다.”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원하는 만큼 못 얻을걸?”
고민 끝에 세파리아스가 답했다.
“15%로 하지. 그게 원하던 수치 아닌가.”
“찍찍. 좋다!”
쉬이 타협할 수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끝장까지 보기에는 다른 종족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바다를 지배한 오션 오크는 무시할 게 못 된다.’
방심하는 순간 따라잡히게 될 것이다. 지하에 사는 지하 연합은 특히나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드낙의 첫 번째 후예를 자처하는 것이 뿔 쥐들이다. 오션 오크에게 따라잡힌다면, 녹색 도끼만 좋은 일이 된다.
30만의 군대가 빠르게 모였지만 그 ‘30만’이라는 숫자는 신제국의 극소수만 아는 숫자였다. 그 외에는 모두 총동원령이라는 이름 아래 세금을 추가로 더 내야 했고, 40살 먹은 제국인도 예비군이라는 이름으로 소집됐다.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노리는 인간을 처단하자!”
“짐승을 죽이자!!”
“변방의 개들이 수도를 침탈한다!!”
온갖 말이 쏟아졌다. 그들은 인간해방 이데올로기의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성전을 앞두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반란 소식은 실로 끔찍했으며 나이가 60이 먹은 남자조차도 용감하게 나서서 징병을 요청할 정도였다.
* * *
“푸헤헤헤헤!!”
경박한 소리를 내며 지미… 아니, 이제는 골든 카이저가 된 그가 웃었다.
그는 변방의 도시 세 곳을 점령했으며 그를 따르는 이들이 10만을 넘어서 이제 11만을 앞두고 있었다.
이들은 도시 세 곳을 약탈하고, 모든 것을 가졌다. 여자도 취할 수 있었고, 도시의 유명한 남창을 점찍어뒀다가 사로잡은 이도 있었다.
거대한 성공.
그저 광산 하나 몰래 먹으려고 했던 골든 카이저는 세 개 도시의 지배자가 되었다.
“군량미는 넘쳐난다! 최대한 많은 병사를 모아라! 세파리아스 불파겐이라는 허황된 신을 믿는 이들에게 철퇴를 내릴 것이다!”
평생 살면서 세파리아스를 구경도 못 한 것이 골든 카이저였다.
비단 그만 못 본 것이 아니다. 신제국의 변방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이 초월자를 마주하지 못했다.
지금의 반란은 그런 정보의 격차 때문에 발생했다. 마법 크리스털로 정보 격차를 줄이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선동’, ‘날조’, ‘거짓’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원한다!”
“더 이상의 세금은 없다! 내가 바로 세금이다!”
“와아아악!!”
개소리도 쉽게 받아들여졌다. 그만큼 변방은 식량이 넉넉했고, 딴생각하기에 좋았다.
만약 드낙의 입김이 없었다면 신제국의 신민들을 일하게 하고, 결혼시켜서 다른 일에는 전혀 열정을 가지지 못하게 했겠지만, 드낙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고함을 내지르는 이들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드높았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 그곳에는 병사가 없다! 평화로운 탓이다!”
“와아아아!!”
“병사들에게 들어가는 돈은 0원이고, 그로 인하여 돈이 지갑에 넘쳐날 것이다!”
“와아아아!”
“그러기 위해서는 신제국을 무너뜨려야 한다! 우리들은 제국의 인간이다! 종교로 삿된 마음을 집어넣는 세파리아스는 그저 종교쟁이일 뿐이다!”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환호성을 받으며 골든 카이저가 군대를 이끌고 더 많은 도시를 먹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