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1화
“레볼루숑이라니,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세파리아스는 드낙의 말을 신뢰하지 못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과거는 보고 배울 수 있지만, 미래는 보고 배울 수 없지.’
수틀리면 레볼루숑해 버리는 것도 문제긴 하지만, 적어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었다.
“시시비비를 가린다면 양측 모두 잘못이 있겠지. 지켜봐라.”
그 말에 세파리아스의 정신체가 팔짱을 꼈다. 아주 수비적인 모습이다.
‘내 말을 알아들었어.’
현장에 직접 뛰면서 알게 되는 문제가 있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제삼자의 위치에서 바라보면 알게 되는 문제도 있다.
평상시에 사람들은 결코 모른다. 소방관이 목장갑 끼고 현장에 출동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걸 알리는 언론이 있어야 크게 분노하게 된다.
반면 다종족 연합의 언론은 사실 그 역할이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정신이라는 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 나타나는 문제들, 수많은 분야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고발하는 건 쉽지 않다.
“저들은 몇 번이나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말했지만 이를 무시한 건 크다.”
드낙의 말에 감히 그 누구도 이에 반박하지 못했다. 증거는 이미 확실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지. 저들 또한 진정으로 반란을 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내가 온 것이다.”
“수많은 곳에서 이 반란을 막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고 있으며 또 이곳으로 별동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시기상조이니 그들과 말씀을 나눠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놈.’
드낙이 좁은 눈을 하고 기사를 노려보았다. 이에 기사가 냉큼 고개를 숙이며 굴종했다.
“이대로 두면 다이앤타가 움켜쥔 것이 두 쪽이 나겠지.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냐?”
“결단코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세리안 자치령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이겠지.”
드낙은 기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드낙은 수많은 국가와 세력을 만들도록 종용했다.
‘작게 놀아야 내가 편하다.’
서로 규합한다면 큰일이 벌어지며, 상상 이상의 사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드낙은 곧바로 사람을 보내려고 했지만 세파리아스의 말에 이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또 네놈이 움직이는구나. 다른 이에게 맡겨라. 그래야 네가 원하는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대통령이 혼자서 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놀고먹으려는 드낙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일을 하려고 했다니.’
그는 굴종한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난 지켜볼 테니, 내 의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
“예!”
드낙은 기사가 물러가자 게임기를 켰다. 숲과 땅의 향기가 풍기는 이곳에서 게임을 하는 건 그야말로 풍미가 있는 일이었다.
뿅뿅!
게임기의 귀여운 소리에 세파리아스가 관심을 가졌다.
“무슨 게임이냐?”
“슈팅 게임. 머리를 비울 때 요긴하게 쓰이지. 시간도 잘 가.”
드낙이 짧게 말했다.
이전에 몇 번 게임을 즐겼으나 결국 세파리아스는 게임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했다. 다만 영화는 즐겨보는 편이었다. 드라마와 달리 한 편만 보면 끝이기 때문에 그의 취향에 잘 맞았다.
시간은 흐르고, 기사는 먼저 저들과 타협하지 않고 대치 상황을 이어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세리안을 비롯한 몇몇 무인들이 이곳에 도착했다.
그녀는 완전 무장한 상태였으며, 군대는 대부분이 중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빨리 오면서 동시에 공격력과 돌파력을 챙겨왔다.
현지에서 병사를 뽑았으니, 일단 기병만 도착해도 능히 적을 묶어놓을 수 있다고 여겼다.
“세리안!”
드낙이 세리안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 또한 표정이 밝아졌다.
드낙보다 먼저 세파리아스의 정신체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잘 지냈느냐.”
“아버지.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제가 걱정되었나요?”
“겸사겸사.”
세파리아스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드낙과 세파리아스와 세리안이 서로 담화를 나누는 사이, 실무진은 기사를 통해서 빠르게 소식을 접했다.
“허! 반란이 일어났는데 타협이라니.”
“싹 다 죽여도 모자란 놈들을… 왜 두둔하는지 모르겠다.”
“제2, 제3의 반란이 일어나는 걸 원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이제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지.”
불만이 있다면 불만을 제시할 수 있는 시대.
“이런 방법은 잘못되었으나, 우리가 대비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을 했으니…….”
결과가 어찌 되었든 드낙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위로 올려 보냈다.
세 사람은 이를 확인했다.
“아카데미에서 있을 때부터 그는 야욕을 드러냈군.”
세파리아스는 빅하트의 꿀밤을 때리는 듯이 그를 욕하였다.
“능력치로 보나, 점수로 보나 그는 스틸 로드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지금만 해도 많은 이들이 그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드낙이 이를 쳐내듯이 그를 두둔했다.
두 사람의 눈이 세리안에게로 향했다. 이에 세리안은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쩐다.’
빅하트는 분명 불만을 품을 이유가 충분했다. 다만, 상위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역량이 되지 못해서다.
“상위국의 재정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그가 아무리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하는 것이 스틸 로드고요.”
스틸 로드를 더 뽑는 건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단순히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좌의정과 우의정을 2배로 늘려달라는 소리나 다름없기에 쉽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스틸 로드로 만들라는 소리가 아니다. 불만을 없애라는 소리지.”
“그게 그거 아닌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뭐냐?”
세파리아스가 드낙의 뜬구름 소리를 쏘아붙였다.
“그는 능히 스틸 로드가 될 만하다. 그럼 다른 이에게 주면 되는 것을 꼭 그렇게 쥐고 있었지. 가지지 못할 거면 그냥 놓아주는 것이 좋지.”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탐욕스러운 눈을 했다.
스틸 로드는 1만 3천 명 중에 고작 네 명이다. 대군 지휘는 그만큼 힘들고, 제대로 하는 이가 없었다.
“신제국이 데려가도 상관없다는 투로군.”
“그는 상위 인간인데요?”
“신제국은 상위 인간을 강제하지는 않지만, 이미 상위 인간인 이를 배척하는 것도 아니다.”
그 나름의 쓸모가 있었다. 이에 세리안이 기가 차는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라도 스틸 로드를 시켜주겠다고 할 거예요.”
“지금 그와 동조한 1,400여 명은 어쩌고?”
성명문에 서명한 이들의 숫자를 통해서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이앤타가 아니라 빅하트의 대범함과 자상함에 매료된 이들이다.
결국, 평행선을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인재란 그런 거다.’
하늘이 점지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찾으려고 해도 찾기 어렵고, 찾는다고 해도 내 품에 들어오는 경우도 드물고, 들어온다고 해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당해 본 사람만 이를 알 수 있다. 뒤에 가서 후회해 본 사람만 이를 뼈저리게 느낀다.
“닷새의 유예를 주겠다. 나는 잠깐 저들에게 가 있지.”
“반란 진압은 안 됩니까?”
세리안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렇다. 그리고 앞으로는 ‘시위’라는 형태로 허락을 받고 시위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둘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우리는 답을 내어줘야 한다.”
드낙의 말에 두 사람 모두 혀를 찼다.
“건방지다.”
세파리아스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불만이라도 적어 낼 수 있게 해라. 해결하든지, 말든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흥!”
세파리아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여자가 저러면 귀엽기라도 한데, 남자가 저러니 더욱 화가 났다.
그러나 드낙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초월자니까.’
협력해야 할 대상이다. 끝장을 보면 세파리아스도 끝장을 볼 것이다.
무인(武人)이란 그런 족속들이다. 치킨 게임에서 승리하는 건 그들이었다. 남들은 감당하지 못할 피해도 우습게 여기는 잔혹한 존재들이다.
그들을 잘 쓰면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킬 수 있고, 잘못 쓰면 멸망의 기로에 선다.
그렇기에 무인은 ‘칼’로 여겨진다.
“최소한 불만은 듣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서 나라를 운영하라, 이 말이다.”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는 고개만 까딱거렸다. 일단은 하는 시늉이라도 할 생각을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구색 맞추기지.’
나이가 지긋하게 든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구색을 갖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큼 효과가 보장되어있다.
중소기업에도 복지가 있는 것처럼(그게 복지라고 할 수는 없어도) 구색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드낙은 세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드낙에게 조금 더 깊게 안겨서 볼을 비볐다. 차가운 감촉이다. 그래도 마음이 느껴졌다.
“해야 할 일이야. 굳이 여기가 아니었어도 다른 곳이었어도…….”
드낙이 변명을 했다. 이에 세리안의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괜찮아요.”
그 속삭임에 드낙은 안심하고 모습을 감췄다. 아마, 반란을 일으킨 이들에게 갔을 터였다.
세파리아스는 드낙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자 세리안에게 말했다.
“결국, 계급의 경계가 흐트러질 것이고, 왕은 더는 왕이 아니게 될 것이다.”
“민중들이 만든 법이 생겨날지도 모르죠.”
그건 무서운 일이다. 무지한 이들이 만든 법은 상상 이상의 악효과를 낳게 될 터다.
무엇보다 법이란 것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서서히 변질되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은 의외로 큰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우주 낙원에서 발견한 법전은 굉장히 뛰어났으니까요.”
“서서히 이곳에 적응시켜야겠지.”
반란은 곧 법에 대한 해석으로 번져 나갔다. 관련이 전혀 없었으나, 결국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에는 법이 필요하다.
“내가 보라고 했던 건 다 봤겠구나.”
“네. 그래서 더욱 이번 일을 늦추고 싶었습니다. 그런 세상이 진정으로 온다면 결국 돈을 위한 나라가 될 겁니다.”
“초월자가 있어도 그렇게 될 것이다.”
초월자조차도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이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국가가 수많은 이권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결코 민영화하지 않을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한 국가 전체의 석탄을 지배한다면? 전력과 마력 자원을 독점한다면? 엄청난 돈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다.
원자재 독점이 가장 대표적이다. 나무를 팔아도 국가로부터 구매해야 하는 경우가 100%에 달했다.
땅이 귀족의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국가가 되는 것일 뿐이다.
‘줬다 뺏는 게 어렵지. 이미 가진 것의 주인이 바뀌는 건 상관없는 일이지.’
“미래를 보지 못한다면, 죽은 권력이 될 뿐이다. 이를 항상 명심해라.”
“네. 조언 고마워요. 아버지.”
* * *
세리안이 도착하고, 드낙이 반란군의 의견을 정리해서 나눠 주기 시작했다.
이 덕에 타협은 급물살을 탔다.
오래 있을수록 병사들의 보급에 소모가 일어나니 세리안으로서는 빨리 해결하고 싶어 했다.
다행히도 다른 상위국왕이 숟가락 얹기도 전에 타협안이 가결되었다.
“그들 모두 신제국으로 양도하여 그곳에서 스틸 로드로서 살아가게 하겠다.”
세리안은 아빠한테 반란분자들을 보내기로 결단을 내렸다.
“다이앤타 프린스 불파겐에게 배상금 금화 1만 닢을 배상하라.”
“월급의 50%를 분할하여 상환하도록 한다.”
모든 것이 척척 진행됐다.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돌아갔다. 사회적 지위가 크게 차이가 나긴 했지만 두 명의 초월자가 주관하고 있어서 허튼짓하지 못했다.
빅하트를 비롯한 1,428명이 국외로 유출되는 큰 사건이었지만, 신제국은 세리안 자치령에게 그만한 이권을 넘기기로 밀약을 맺었다.
“신제국에서 만들어지는 전신 갑주의 마법 부여와 그 재료는 모두 세리안 자치령에서 구매한다. 이 효력은 매년 갱신된다.”
매년 갱신이나 거의 종신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세파리아스나 세리안의 권력 구도가 변하면 끊어지겠지만 그럴 일이 없는 탓이다.
‘혈연이 역시 최고지.’
계열사끼리 서로 계약을 돌고 돌리며 서로 물고 빠는 것과 비슷했다.
“상위국의 내부 불만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스틸 로드 또한 개인 귀족이 봉급을 감당하면 배속할 수 있도록 해서 국외 유출을 막겠습니다.”
“국가가 일정 부분의 봉급을 내어준다면 귀족들도 나설 겁니다.”
생산적인 이야기 중에 세파리아스가 드낙에게 속삭였다.
“강철 인형도 이제 10년이 지났다. 난 다시 차원 침공을 위한 차원 다리 건설을 재개할 것이다. 그리고 좌표가 특정됐다. 그곳을 정벌하고, 신을 죽이고 신제국의 새로운 영토로 삼을 것이다. 너는 어떠냐?”
“난 별로. 테라에 허튼수작을 벌일 수 있을 테니. 여기를 지킬 거다. 다른 세력이 참가하는 걸 막지는 않겠다.”
드낙의 확답에 세파리아스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