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화
18. 악마 선택
말라 죽은 고목의 세계. 끝없이 독 성분이 담긴 비가 내려 세계가 멸망했다.
루살리(Rusali)의 악마 세계는 그렇게 아카타베루의 것이 되었다.
악마, 루살리가 죽는 것과 악마 세계가 죽는 것은 엄연히 별개의 것이었다.
짐승이 날뛰고, 질병으로 가득한 토지에서는 살아있는 미생물처럼 움직이고, 종종 독가스를 뿜어내는 물렁물렁한 땅을 지닌 세계가 비로소 멸망했다.
우투쿠(Utuku)의 악마 세계 또한 아카타베루의 것이 되었다. 온전히 그만의 것이 됐다.
유황 화산이 끝없이 매캐한 연기를 쏟아내고, 땅에는 죽은 것들이 가득했으며, 온갖 권속 악마가 이합집산하며 서로를 죽이기 바쁜 악마 세계 또한 멸망했다.
말레브란데(Malebrande)의 악마 세계 또한 아카타베루의 양분이 되었다.
끝없는 바다와도 같은 늪. 수많은 해양 권속 악마들은 대부분이 수륙양용으로 기능하며, 종종 활강까지 가능하여 다재다능한 환경 적응력을 지녔으나, 그마저도 멸망했다. 아카타베루에게 흡수됐다.
거짓된 환영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흘러넘쳐 현혹하는 검은색 일색의 도서관 세계 또한 멸망했다.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권속 악마들이 가득했던 다잘(Dazzle)의 악마 세계는 아스모데(Asmode)에게 편입됐다.
아지 다하카(Azi Dahaka)는 아카타베루에게 패배했으나, 그 시체는 아스모데에게 양도되었다.
아지 다하카는 악마 세계 그 자체였고, 그 몸에 악마 세계가 존재했다. 그 시체는 아스모데가 잘 사용할 것이다.
가마솥처럼 질퍽이는 용광로 같은 악마 세계를 만든 훔바바(Humbaba)의 악마 세계 또한 아스모데가 멸망시켰다.
보이지 않는 악마 세계. 투명한 지옥.
티티빌루스(Titivilus) 또한 아스모데의 손에 유황 가루가 되어 죽었고, 그의 악마 세계도 당연히 멸망했다.
햇수로는 10년이 걸렸다.
악마가 죽어도 권속 악마들은 아카타베루와 아스모데에게 저항했고, 악마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은 대악마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빨리 먹으면 체하듯이, 배가 터져서 죽을 수도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육체’를 지닌 현실적인 초월체라는 점에 있다. 정신체의 형태를 지닌 신과는 다르게 육체를 지녔기에 흡수율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 덕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나의 악마 세계를 모두 집어삼킬 수도 없었는데, 중립신의 시체를 닦아 먹으려고 모인 악마들은 모두 대악마라 불리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별을 파괴해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타베루와 아스모데는 중립신의 시체가 있는 테라로 향하는 것과 동시에 부지런하게 힘을 흡수해야 했다.
“정확하게 네 명씩 먹었다. 불만은 없겠지?”
거체(巨體)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덩치를 지닌 대악마(大惡魔) 아카타베루의 말에 대악마(大惡魔) 아스모데(Asmode)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불만은 없어. 근데 아지 다하카의 시체를 내가 가져가도 상관없다는 거, 확실하지?”
대악마, 아지 다하카(Azi Dahaka)의 시체를 가져가는 것에 있어 나중에 딴말이 나올 것 같았다.
덩치가 큰 아카타베루의 취향처럼 아지 다하카 또한 덩치가 대단했다. 비슷한 특징을 지녔기에 흡수하기도 용이할 터였다.
“상관없다. 이 이상 덩치가 커 봤자 의미도 없다. 그리고 아지 다하카는 나와는 맞지 않는다. 뱀은 질색이다.”
“꺄하하!”
아스모데가 웃었다. 아카타베루가 농담을 했기 때문이다.
대악마가 되는 자가 뱀을 무서워할 리가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상관없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부터는 경쟁이다.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대악마 여덟 명이 이 자리에서 죽었다. 악마 세계의 차원 이동은 계속 이루어질 것이고, 두 대악마는 흡수를 마치는 대로 다시 한번 부딪칠 것이다.
서로의 죽음은 더 강렬한 탄생을 의미했다. 이제는 멈출 수 없었다. 서로 피 맛을 봤기에 더욱 그러했다.
다음에는 악마 세계와 악마 세계의 부딪침이 있을 터였다.
거짓의 고발자, 유황의 아스모데(Asmode)는 가장 먼저 다잘(Dazzle)을 소화했다.
아카타베루의 싸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이라 여겼고, 수많은 지식이라 여겼다.
검은 도서관이라 불리는 다잘의 악마 세계에 있는 지식은 방대하며, 분명 대악마와의 싸움에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를 해결하려면 결국 권속 악마들의 체계를 새로 해야 했다.
“레리 워리어(Larry Warrior)를 하나 더 만들어야겠어.”
이 정도로 큰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은 아스모데에게도 드문 일이었다. 기습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터였고, 아카타베루가 판을 짜주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터였다.
막대한 육체 자원을 보유했고, 흡수할 수 있었다. 그 힘은 당장 쓰고 싶을 정도로 많았음에도 아직 흡수하지 못한 대악마도 여럿이었다.
무시무시한 환희와 쾌감이 아스모데의 내면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막대한 예산을 마주한 개혁 임금의 마음이나 다름없었다.
‘악마 세계를 모조리 멸망시킨 그놈과 나는 다르다.’
다잘의 권속 악마는 모조리 죽임을 당했지만 다잘의 ‘검은 도서관 악마 세계’는 온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게 그녀와 그의 차이였다.
“들어라. 나의 왕들아.”
척.
열다섯에 불과한 레리 워리어가 굴종했다.
그들은 ‘열다섯의 검은 왕관’이라 불리는 최상위 권속 악마로 그들은 모두 반마급의 존재들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아에리어라 불리는 권속 악마를 거느리고 있는 왕들이다.
하늘을 뒤덮는 재앙, 날아다니는 이족 보행 흑염소인 아에리어는 하나같이 대형급 권속 악마들이었다. 아스모데의 가장 강력한 군대라 할 수 있다.
“왕관을 하나 더 만들 생각이다.”
“그렇게 하소서! 우리들의 위대한 지배자시여!”
아스모데가 그 신앙에 웃음을 머금었다.
맹목적인 충성을 하는 권속 악마들의 행동은 사랑스러웠다. 충신을 죽이는 것을 쉽게 여기는 인간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검은 도서관의 도서관장이 될 것인데, 혹 그곳에 취임하고 싶은 이가 있는가? 없다면 새로운 왕관을 쓸 레리 워리어에게 이를 맡길 생각이다.”
아스모데는 기회를 줬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기대감 하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리 워리어 하나하나에 배속된 권속 악마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해 왔다. ‘자신의 군대’나 다름없었다. 이를 포기하고 새로운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챕터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 취임하는 셈이다. 그건 아니 될 말이다.
아스모데에게 충성하지만 레리 워리어 사이에도 알력 다툼이 존재했다.
그들은 그 권력 구도에서 장기간 자리를 지켜온 자들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이를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그냥 하는 말인 셈이다.
‘말한다면 죽겠지.’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꼴이다. 아스모데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고, 다른 모든 악마도 싫어할 것이다.
절대적인 복종은 자율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형태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레리 워리어들은 막강한 자율행동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이런 정치적 상황은 자연스러운 이치나 다름없었다.
배가 부르면 자아를 실현하고 싶어지고, 권력을 탐하게 된다.
과장쯤 달면, 갑질도 해보고 싶어진다. 이를 참는 건 매우 힘들다. 어지간한 수행과 깨달음으로는 하기 힘들다.
하물며 권속 악마 최강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 레리 워리어들이다. 그들은 자기 소속의 군대를 더 키우고 싶은 생각뿐이다.
“없어? 후흐흐.”
그녀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검은 도서관을 관리하고, 이로운 지식을 퍼뜨리는 이를 관리할 도서관장, 레리 비블리오테카(Larry bibliotheca)는 그렇게 탄생했다.
“흐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아스모데에게서 잉태한 레리 워리어는 그 자체로 그녀의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권속 악마와는 현격히 다른 하프 데빌이다. 다만, 이를 강제하는 왕관이 머리에 씌워졌고, 머리와 하나가 됐다.
세뇌 작업이 시작됐다.
한 달 동안 열병을 앓고 살아남아도, 다음 단계가 이루어졌다.
단기간에 육체 성장을 마무리했다. 뼈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완성된 레리 비블리오테카는 열 명의 쿠트니아를 거느리게 됐다. 다른 레리 워리어가 봤다면 코웃음 칠 정도로 적은 숫자였다.
쿠트니아는 관리자로, 육지(六智) 악마라 불린다. 여섯 가지 재주를 지녔고, 참모로 유능하다. 전투 능력이 아에리어보다 낮기에 그보다 낮은 계급을 지닌 권속 악마였다.
그들은 쿠트니아 악티오 오피서(Coutnia actio officer)로 불렸다.
즉, 검은 도서관의 도서관장 레리 비블리오테카는 아에리어를 소유하지 못했다.
1만 명의 미소파에스도 거느리게 됐다. 그들은 미소파에스 라이브러리안(Misopaes librarian)이라 새로 불렸다.
태리어(Tarrier)라 불리는 가드 데빌을 거느리지 못한 것도 인상적이었고, 휴포크트니아(Hufoctnia)도 거느리지 못한 것도 그러했다.
인간 사회로 치면 노예 계급에 해당하는 미소파에스만 할당을 받은 것이다.
“천천히 꾸려 나가라. 그리고 악마를 위한 일을 하라. 아카타베루를 죽일 지식을 찾아내라.”
“명을 받듭니다. 나의 지배자시여.”
대부분의 레리 워리어들은 레리 비블리오테카에게 매우 친근하게 굴며 선물을 아끼지 않았다. 노획한 재물을 건네주기도 했다.
“쓸 만한 지식이 나오면 바로 나한테 알려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잘의 악마 세계는 확실하게 아스모데의 것이 되었고, 기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순간에도 아스모데는 끝없이 초월자를 집어먹고, 소화하기 바빴다. 그녀가 집중하고 있는 건, 아지 다카하였다.
‘악마의 육체 내부에 악마 세계가 존재하는 독특한 놈이었지.’
신기한 권능이다.
악마들은 권능 제작에 많은 어려움을 지니고 있고, 심지어 권능이 없는 경우가 99%가 넘어간다. 아스모데조차도 권능은 가지지 못하고 있다.
약체화된 인신을 사로잡아서 권능을 제작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런 거로 만족 못 하는 경우도 많았다.
권능 제작은 그만큼 힘들고, 고된 일이다. 약체화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권능을 만들어 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아지 다하카의 경우, 그는 권능을 지닌 대악마였다.
이를 잡아먹는다면, 그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 대단하지 않겠지만.’
아스모데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아지 다하카를 집어삼키고, 소화를 세월에 맡긴 채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소화가 절반쯤 이뤄졌을 때, 아스모데는 아지 다하카의 권능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쌍소멸(pair annihilation)의 권능.’
반물질과 물질의 부딪힘에서 생기는 100% 효율의 에너지 획득 방법. 그게 아지 다하카의 권능이었다.
‘악마 세계를 몸속에 집어넣은 건 부담을 껴안은 것뿐이다.’
무식하게 몸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당연히 악마 세계에 있는 생명체와 반물질을 부딪치는 쌍소멸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육체의 힘이 부족해도 끝없이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좋은 것 같지만, 단점이 많았다. 결국 대악마로서의 육체 힘은 악마 세계를 보유한 탓에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다른 대악마는 가지지 못한 권능을 사용하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고집이야.’
기가 찰 노릇이었다.
‘욕심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그를 욕했지만 아스모데는 기뻤다.
자신은 그저 악마 세계를 몸속에 집어삼켜도 온전히 그 힘을 다루는 권능이라 여겼는데, 전혀 다른 권능을 들고 있어서였다.
‘아카타베루에게 갔다면 큰일 났겠지.’
대(對) 아카타베루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쌍소멸의 권능은 결국 물체만 있다면 효율 100%의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고, 그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악마와의 싸움에 써야 했는데, 아지 다하카는 자신의 내부에서 그런 짓을 벌였다. 패배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멍청한 놈. 네 권능은 내가 아주 요긴하게 써먹을게. 고마워.’
아스모데는 그렇게 반물질과 물질의 부딪힘에서 나타나는 100% 효율 에너지를 확보하여 사용 가능한 권능인 쌍소멸(pair annihilation)의 권능을 획득했다.
아마 가장 강력한 수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권능이 없는 아카타베루에 비해서 그녀는 권능을 가지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승리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카타베루를 죽이고, 중립신을 잡아먹고, 테라의 별을 부수는 건 내가 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