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화
‘기백 구릉’.
반년 전투는 워-퀘스트에서와는 다르게 완벽한 시야를 제공하지 않는다. 병사들의 머리 위에서 떠다니는 드론이나 단상에 올라간 정도의 시야를 제공하는 드론이 존재했고, 그런 드론마저도 열다섯 개 미만이다.
문제는 드론의 크기가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드워프들이 만든다면 대단히 작게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들은 ‘신의 봉화’를 지켜야 한다.
이 아티팩트는 중립신이 만들어 준 것이며, 드워프들의 정신 활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정신 활력이 소모되면 번아웃 증세를 가지게 되며 끝내 영원한 잠에 빠진다.
신의 봉화는 중립신에게 신앙심을 건네주는 장치였지만, 순기능이 많아서 드워프들이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었다.
‘종족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물건이라 드낙이나 세파리아스는 만들 수 없는 물건이다.
배틀을 짜는 중립신의 실력은 그 누구도 따라 할 수가 없었다.
대륙을 횡단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있는 것도 드워프들이다. 수백 년은 동원해야 할 일이고, 공공사업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한 번 지으면 못해도 천 년은 유지되어야 할 도로여야 했다. 도로 사업은 노동력과 돈이 매우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주 강철 사업도 빠질 수 없다. 바벨의 탑처럼 강철 구조물을 끝도 없이 올리고 있었다.
‘드워프의 손길’을 받은 사물은 내구력도 크게 강화되었기에 능히 우주까지 닿을 수 있는 ‘탑’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었기에 드워프의 도움을 받지 못한 드론의 크기는 대단히 컸다. 부품을 크게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별수 없었다.
기계의 자동화는 현대에서도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치 공장만 해도 손으로 참치 뼈를 골라낸다.
다종족 연합이 우주 낙원을 나포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다. 기술은 알아도 이를 실천하는 건 이곳의 인간들이다.
이 세상에선 수학적 지식이 얕다. 부품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고 드론의 덩치가 상당함에도 지원하는 해상도는 또 낮았다.
페이커는 폐쇄된 공간에서 지휘를 시작했다.
그게 강철 인형이 원하는 전쟁터의 모습이다. 비싸고, 잘 나타나지도 않는 지휘 재능을 지닌 자들을 보호하며 전쟁을 끝없이 수행하는 프로토콜.
그게 바로 드낙이 원하는 전쟁이며, 멸망한 제국의 그림자를 베껴낸 다종족 연합의 또 다른 힘이 될 것이다.
언덕이 많은 곳에서 페이크는 궁병을 과감하게 제외했다. 소형 언덕이 많은 구릉지대였다면 능히 궁병을 기용할 수 있었을 터였다. 삽질 또한 가능하다.
중앙을 먹고, 지대를 높이면 상대는 화살 피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마법사는 쓰고 싶지만, 군대 포인트를 너무 많이 먹는다.’
대련이 아닌 연습 모드에서나 마법사를 쓰면서 그 스펙을 파악했으나 페이커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적고,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마력 코팅이 벗겨진다. 나중에는 화살 하나에도 취약해진다.
즉, 군대 포인트가 1만으로 강제된 상황에서는 되레 독이다.
‘군대 포인트에 제약이 없다면 쓰기야 쓰겠지만.’
혼자서 결코 100명을 상대하지 못할 테니 강철 인형 마법사를 쓸 리가 없었다. 그에 준하는 피해도 주지 못한다.
‘워-퀘스트에서 사용했던 강철 인형은 손바닥만 했는데, 여기서는 사람만 해. 여기가 진짜 본게임이야.’
여기서 잘해야 했다.
제한된 시야에서 중요한 것은 기만이다.
이를 위해서 페이커는 경기병 3천을 기용했다. 오푸나레 경기병(Oppugnare light cavalry)이라는 병과였다.
강철 인형은 강철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옛 제국의 마도 기술이 접목되었다. 무엇보다 강철로 이루어진 탓에 초월의 힘이 들어갈 그릇이 넓다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그릇이 넓었기에 다양한 콘셉트를 가질 수 있었다.
이 다양한 콘셉트를 통해서 수많은 이름을 받은 강철 인형이 잔뜩 있었다.
그중에서도 기병은 꽃 중의 꽃이다. 장미도 인간의 손으로 여러 가지 종류가 만들어졌듯이, 기병 또한 가장 많은 가짓수를 지니고 있었다.
궁수보다는 기병의 멋짐에 매료된 이들이 많은 탓이다.
오푸나레 경기병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말을 잡는 말’이다.
무적이라고 불리는 궁기병을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이 똑같이 기병을 양성하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전술로 어떻게 궁기병을 잡는지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부족하기 때문이며, 무지하기 때문이다.
몽골 궁기병은 뒤로도 활을 쏘는 게 가능하며, 마상 기술을 터득한 이들은 곧잘 하는 것이다. 심지어 달리는 말에도 껑충 올라탄다.
평생을 말과 함께 살아가는 평야의 유목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처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건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장치고, 현실은 지나칠 정도로 심플하다.
그냥 기를 쓰고 쫓아가면 된다. 그게 끝이다.
궁기병을 잡기 위해서는 창 한 자루와 용맹과 방패. 적당한 마갑이 전부였다.
마갑이 무거우면 또 안 된다. 어째서 그런가?
궁기병은 활을 쏘며 적을 유린한다.
스웜 전술을 펼치며 보병을 농락하고, 유유히 빠져나가 말을 바꿔 타고 이를 반복한다. 끝까지 쫓아가서 적의 목에 화살을 꽂는다.
하지만 경기병이 쫓아온다면 활을 쏠 여유가 없다. 뒤로 활을 쏜다고 해도 불편한 자세에서 쏘는 화살이기에 큰 공격력을 기대할 수 없고, 쏜다고 해도 방패로 막거나 쳐내면 그만이다.
거리가 따라잡히면 더는 활을 쏠 수 없다. 백병전에 임해야 한다.
하지만 리치가 긴 창을 쥔 경기병과 단칼을 든 궁기병의 차이는 명백하다. 먼저 찔리면 마력 코팅이 벗겨지고 그것으로 끝이다.
본래 강철 인형은 마력 코팅이 벗겨진다고 멈추지 않지만, 강철의 비라 불리는 전쟁 문화는 다르다.
‘오푸나레 경기병은 창을 쥐고 있어서 보병 상대로도 나쁘지 않은 위력을 보여준다.’
경기병이라고 해서 무게가 무겁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말 자체가 인간의 몇 배에 달하는 체중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달리는 경차라 할 수 있었다.
중기병은 1천이었는데, 중기병처럼 보이지 않았다.
룩스 페로 중기병(Lux ferro heavy cavalry).
‘중기병이지만 가벼운 놈들이지.’
기백 구릉에서 쓰기 좋았다.
구릉이란 무엇인가. 언덕이 개같이 많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행군한다고 하면 상관을 살해해도 무방할 정도다. 야밤에 상관에게 쳐들어가서 행패를 부려도 군법회의에서 무죄를 인정해 줄 것이다.
언덕이 오르고, 내리고 반복하는 진형에서 기병을 운용하려면 대단히 힘들다.
평지를 균일하게 다니는 것보다 훨씬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체력도 중요한 지표 중에 하나지.’
디버프 형태로 강철 인형에 존재하는 지표가 바로 체력이었다. 나중에 강철 인형을 제어하게 될 인재에게는 필요 없는 일이나, 강철 인형만 전쟁터에 나설 리가 없다.
그렇기에 모든 면에서 생명체의 전투 유지력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당장 폐쇄된 곳에서 화면을 통해 시야를 보고 있는 것만 해도 페이커 같은 이들이 어떻게 이용될지 뻔하다.
그러나 페이커는 그런 것에는 하등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룩스 페로 중기병은 ‘가벼운 강철’이라 말할 수 있었다. 모순되지만 그들은 아주 얇은 강철 방어구를 입고 있었다. 그 덕에 중기병의 방호력을 조금은 유지 가능했고, 기동성도 가져갈 수 있었다.
‘문제는 기수들이 쉽게 죽을 수 있어서 현실에서는 보기가 힘들다는 거다.’
판타지 세계에서 철판을 얇게 하는 짓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짓이다. 강철 뚫는 일백 야수의 이빨 맛을 보면 무거운 게 아주 좋아서 엉엉 울 정도다.
‘룩스 페로 중기병은 강철의 비에서만 볼 수 있다는 거지.’
그게 아쉽다면 아쉽다. 현실에서 강철 인형은 체력이라는 게 없다. 구동되는 마력이 사라지면 끝난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팀 엔진을 통해서 다른 동력을 얻느니, 마니 하고 있다고 한다.
아카데미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강철 인형의 성장과 똑같이 성장하고 있는 게 그들이었다.
“체력 디버프를 줄인다.”
그렇기에 페이커의 전략은 간단했다. 상대의 체력 소비를 강요할 생각이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 중 하나가 바로 중보병에 있다.
헤르바 아르쿰 중보병(Herba arcum Heavy infantry).
풀떼기로 강철을 속이고, 활을 등에 짊어진 중보병이다. 혼종도 이런 혼종이 없다.
안 그래도 궁병은 ‘덩치=장력’이라는 법칙 때문에 체력 소진이 빠르다. 활을 끝없이 당겨야 했기에, 전투 한 번 겪고 나면 몇 kg이 빠질 때도 있다. 스포츠로 즐기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그런데 그 짓을 강철을 두른 채로 하는 미친 콘셉트가 바로 헤르바 아르쿰 중보병이다.
모루를 담당하는 보병이 활도 쏘면 개쩌는 거 아니냐는 식이다. 강철 인형이라면 능히 그 임무를 하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콘셉트가 만들어졌다.
‘체력 페널티가 있는 강철의 비에서는 비주류지만.’
적을 속이기에 좋았다. 풀떼기로 강철의 모습을 감췄기에 영락없이 궁수로 보인다.
그다음에는 경보병 200명을 사용해서 자신의 시야를 최대한 넓힐 생각이다.
드론의 개수는 적지만 마법 시야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자신의 모든 아군의 일인칭 시점을 마법의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마법 거울은 다섯 개로 한정되어 있지만, 나중에는 더 많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보의 위대함을 모를 리가 없는 드낙이다.
상위국은 지금 그 역량이 부족할 뿐, 계속해서 지휘관을 위한 물건을 생산해 줄 것이다.
중보병(弓) 2천. 경기병 3천에 중기병 1천 그리고 경보병 200. 총 6,200명의 군세였다.
이에 대항하는 기념품(Souvenir)의 군세는 그 구성이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먼저 페이커와는 다르게 정말로 활을 쏠 놈이 한 명도 없었다.
상대를 보지 못하는데 활을 쏘는 건 순찰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괜히 하늘을 보고 쏘는 멍청한 짓이 ‘하늘 쏘기’라 불리는 게 아니다.
뭔지 몰라도 맞는다. 그래서 순찰자들이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구릉지대라고 포위 전술을 못 한다는 게 아니지.’
중보병 1천으로 구색을 맞춘다.
‘가장 단단한 놈으로.’
붉은 요새 정예병(Red fortress elite).
오크의 손에 넘어갔지만, 그래도 끝까지 싸운 용자들이다.
방패가 무시무시하게 크다는 것이 장점이며, 길쭉한 강철 곤봉은 투구를 쓴 상대의 뚝배기를 쉽게 날려버릴 수 있다. 오크조차 도 뚝배기 찜질에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경보병 3천을 쏟아낸다.
단검 방패병(Dagger shieldman)이라 불리는 놈들로 무기는 짧지만 카이트 쉴드로 무장했다. 상대를 넘어뜨려서 하체를 노리는 방식으로 싸운다.
포위해서 죽일 생각을 하는 그녀의 전략에 가장 딱 떨어진다.
창병은 기본으로 썼다. 추가로 쓴다면 숫자가 줄어드는 탓이다. 그런데도 창병을 쓰는 까닭은 당연히 페이커의 취향 때문이다.
‘기병을 좋아하니까.’
페이커는 기병을 좋아한다.
평소에는 찐따 같은 놈인데, 게임에서는 매우 공격적이다. 가장 공격적인 병과는 기병이다. 그러니 그를 막기 위해서는 기병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코 기병으로 승리할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련에서 제대로 깨져 봤으니까.’
소베니르는 사도(邪道)라 불리지만 실력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실력에 비해서 게임에서 하는 짓이 특출나서 사도라 불릴 뿐이다.
그녀가 준비한 건 경기병 2천.
‘보병을 조지고, 창병으로 견제하며 차근차근 잡아먹으면 된다.’
9천의 군세가 그녀가 준비한 로스터였다. 보병 전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 특징이다.
둘은 모든 결정을 마치고, 대련 시작 전에 서로 대화를 나눴다.
“쫄지는 않았지?”
“승패로 따지면 네가 더 겁을 먹어야 하잖아.”
페이커가 실없이 웃었다.
부드럽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 지닌 강철 같은 단단함을 소베니르는 잘 알고 있다.
“잘 싸워보자고.”
“시간제한은 60분.”
5… 4… 3… 2… 1…….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