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1118화 (1,117/1,239)

1118화

* * *

랭커들이 쏟아져 나왔다.

워-퀘스트라 불리는 임무를 완수한 평민들이다. 끝도 없는 경쟁률을 뛰어넘고, 6개월간 이어진 워-퀘스트 속에서 끝까지 랭크를 사수한 자들은 상위권에 몰려 있었고, 랭크에서 탈락했다가 다시 진입한 이들은 하위권에 몰려 있었다.

특이하게도 중간이 없었다.

전술 전략은 워낙 재능의 범주에 있는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10년을 해도 프로게이머가 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이 재능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알 수 있다.

고시 공부도 10년을 하는 이가 있다. 공부조차도 재능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다이어트도 재능의 영역이다. 소주 세 병을 내리 까도 체중 변화가 거의 없는 미친놈과 소주 세 병을 내리 까면 그날부터 반년은 노력해야 체중감소를 이룩해 내는 불쌍한 놈이 있다.

그런 재능 중에서도 군재(軍才)는 대단히 잔혹한 면이 있었다. 병사를 다스리지 못하면 자신에게 군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소형 강철 인형의 전장 덕분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미국 최고의 육군 사관학교에서도 뛰어난 지휘관을 천 명에 다섯 명꼴로 배출하는 게 고작이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분명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여기에 있는 1만 명의 인원은 모조리 군재에 재능이 있는 이들이다. 높고, 낮음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다만, 그런 험난한 과정을 거쳤으나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해 보였다.

“여기에서는 모두 예명을 사용한다. 지금까지 태어나면서 얻은 이름을 쓰는 이는 없기를 바란다. 만약 이름을 사용하다 걸리면, 아카데미 생활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예!”

모두 알차게 답했다.

“줄을 서고 자신의 예명을 말해라. 기숙사로 배정을 받을 것이다.”

연령대도 다양했다. 늙은 사람도 있고, 소년도 있었다.

페이커는 그 무리 속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덩치가 작은 페이커였지만 눈매만큼은 날카로웠다.

입을 꾹 다물고 테이블 앞에 섰다. 앞에는 문관으로 보이는 이가 펜을 굴리고 있었다.

우주 낙원을 노획해서 얻은 지구의 과학 기술이 서서히 대륙에 번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표다.

“예명.”

“페이커요.”

“페이커? 워-퀘스트 올 S등급의…….”

관리가 말을 흐렸다. 괜히 실례가 되는 것 같아서였다. 이미 페이커는 주의할 인물이다. 그는 가장 완벽한 전술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 유망주다.

페이크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순수한 기쁨이다.

“북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남관은 귀족 출신 분들이 쓰시는 곳이고 북관은 평민분들이 쓰시는 곳입니다. 차별은 아니고, 인원수 차이도 있고 귀족분들은 관련 공부를 어렸을 때부터 하고 있어서 공정함을 위해서…….”

문인은 시끄럽게 떠들어대었다.

앞에 간 이에게는 그냥 기숙사만 알려주고 바로 보낸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워-퀘스트가 완료된 후의 영상이 마법 크리스털로 퍼지고 있는데 정말 감명 깊게 봤습니다. 혹시 여기에 사인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저도 해봤는데 똑같이 안 되더라고요. 하하하!”

문인이 억지로 텐션을 올리며 마법 크리스털과 검은색 마법 펜을 꺼냈다. 깃털이 달린 펜이다. 페이커는 어색하게 여기에 자신의 사인을 휘갈겼다.

“제 이름도 적어주셨으면…….”

“아, 네. 저도 사인은 처음이라……. 뭐라고 적을까요?”

“아뇨. 제 이름만 적어주시면 됩니다.”

“아!”

서로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페이커는 사인을 해주고 혼자 북관으로 향했다. 길이 직관적이고, 이정표도 많아서 어렵지 않았다. 중간에 철마로 움직이는 마차가 휙 지나갔는데, 사람이 가득했다.

‘아, 나도 저거 탈걸.’

사람이 워낙 많아서 탈 것이 있는지를 몰랐다. 되돌아가 볼까, 싶었지만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쪽팔려서다.

한참을 걸어갔다.

북관 기숙사는 대단히 거대했다. 건물도 여러 채였다.

그 정문은 강철 인형이 지키고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아무 제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장식처럼 보일 정도로 시원하게 지나쳐갈 수 있었다.

ㄷ자형으로 된 건물들의 위치와 중앙 연병장이 보였다. 연병장에는 잔디가 잔뜩 있었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전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구간 이동하듯이 예명으로 다시 또 불러야 했고, 그만큼 더 기다려야 했다.

두 번 일했는데, 전산화가 되지 않은 곳의 평범한 일이었다.

또, 딱히 전산화가 되었다고 해서 빠른 것도 아니다. 빨리빨리의 민족이 유럽에 가서 행정 처리를 하려고 했다가는 고혈압으로 사망할지도 모른다.

“예명이 어찌 되시죠?”

“페이커요.”

“페이커……!”

문인의 눈이 커졌다. 여기서도 페이커는 사인을 해줘야 했다.

생각보다 자신을 대단히 여기는 이들이 많은 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양쪽에 있는 건물은 북서관과 북동관입니다. 어펄 랭크(Upper rank)와 로우 랭크(Lower rank)가 나눠질 곳입니다. 북쪽에 있는 건물은 로열관입니다. 페이커 님이 가실 곳은 로열관입니다.”

“아… 네.”

페이커가 수줍게 답했다. 너무 바람을 태워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15층 1501호입니다. 앞으로도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로열관은 15층으로 되어있었고, 북동관과 북서관은 10층으로 되어있었다. 그곳의 가장 꼭대기가 페이커가 있어야 할 곳이다.

부유석을 타고 단번에 올라갔다.

‘대단해.’

예술적인 곳이었다. 허락된다면 관광을 위해서 이곳에 오는 이들도 있을 터였다.

복도는 붉은 양탄자가 깔렸었고, 벽과 천장은 검은색 대리석을 쓰고 있었다. 대리석이라 검은색인데도 모두 검은색은 아니고, 물결이나 무늬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주고 있었다.

천장의 조명은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았다.

벽면 곳곳에는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석고로 만든 조각상이기도 했고, 나무로 만든 기형학적인 모형품도 있었다. 그림도 존재했다.

드낙의 초상화와 네 명의 상위국왕들의 초상화다.

방 키는 제법 컸다. 훔치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쭉했다. 불편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쑤컹!

단번에 열쇠 구멍에 긴 열쇠를 집어넣고, 강하게 돌렸다.

철커덕!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랭킹 1위의 방은 80평에 달했고, 침실 외에는 탁 트여있어서 웅장했다. 유리창도 대단히 넓었다.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간 페이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로열관보다 5층이나 낮은 북동관과 북서관은 그의 시야를 방해하지 못했다.

드넓은 부지가 절로 보였다. 그리고 우뚝 솟아있는 귀족들이 지낼 남관이 정면으로 보였다.

마치, 라이벌처럼.

앞으로 대적해야 할 존재는 자신과 같은 신분의 평민이 아니라 저 먼 건물에 있다는 걸 확연하게 보여줬다.

그 모습을 보며 페이커는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유도하는 풍경이다.

“여기야?”

밖에서 소리가 났다.

철컥, 철컥철컥!

거친 소리를 내며 문고리가 돌아갔지만, 자동으로 잠겼기에 열리지 않았다. 로열 등급에 속하는 1,000위 이상의 랭커들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이러시면… 곤란합…….”

쾅!

문이 박살이 났다. 페이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리액션을 취하지도 못한 것이다.

흙먼지는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부서진 곳에서 돌가루가 흩날렸지만 대단치 않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무엇보다 선명하고, 이질적인 색깔이다.

눈이 딱 마주쳤다. 고동색의 평범한 페이커의 눈동자와는 다르게 햇볕이 내리쬐는 나뭇잎 색 같은 눈동자였다.

미녀였지만 눈매가 날카로웠고, 기세가 폭력적이다. 뒤에 있는 이들 중 한 놈은 말리려다가 쓰러져 있었다. 서둘러 일어나고 있지만, 제복의 팔 쪽 부분이 완전히 찢어져 있었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출혈량이 상당했다.

다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페이커조차도 부상병에게는 눈길조차 못 줬다. 거침없이 자신에게 큰 걸음으로 다가온 미인 때문이다.

“네가 워-퀘스트 랭크 1위?”

워-퀘스트는 평민들만 치른 검증 시험이다. 6개월에 걸쳐서 시행됐다.

“아……. 네…….”

페이커의 목소리는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처럼 작게 들려왔다.

“공주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왜? 노빌러티(Nobility)는 이퀄러티(Equality)를 만나면 안 된다는 교칙이라도 있어?”

“그건…….”

경호원은 말대꾸하지 못했다. 교칙을 숙지하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 그 항목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여기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기에 아직 미숙함이 존재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다이앤타 불파겐은 오늘, 이곳에 왔다.

“내가 보니까 없던데?”

주도한 자와 주도하지 못한 채 끌려가는 자의 차이가 명백했다.

주도권은 그만큼 중요하다. 모든 판을 짜고, 그곳에 다이앤타가 들어섰다. 나이는 어려도, 크레시미르 때문에 억지로 내달렸던 덕이다. 충분한 실력이 쌓여있고, 능숙한 시야를 보유하고 있었다.

다이앤타는 다시 페이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비굴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네. 왜 이렇게 맹탕이지? 마법 크리스털로 봤을 때는 아니었는데.”

지나칠 정도로 달라 보였다. 다이앤타가 자신의 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문을 박살 내면서 묻은 것이다.

“만나서 반가워. 이름을 밝히고 싶지만, 여기서는 모두 예명을 쓰거든. 난 사신(Reaper)이야. 워-퀘스트에서 승리했던 것만큼, 그 실력을 보여줘. 오늘 온 건 그것뿐이야. 실제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 조금 실망이긴 하지만.”

“실망이요?”

지금까지 오면서 두 명의 문인이 모두 깜짝 놀라며 자신의 사인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오늘 생긴 자신감이 짓밟히는 기분은 전혀 좋지 않았다.

페이커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그는 워-퀘스트 종합 랭킹 1위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실망이지. 난 강한 놈은 강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 넌 실력이 있지만 약해 보여. 그러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거지.”

다이앤타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뒷수습은 금방 끝났고, 교칙은 하루 만에 변경됐다.

남관과 북관은 명확하게 갈라졌다. 귀족들은 실력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권을 움켜쥐고 있으며, 권력도 많이들 가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건 격리다.

크레시미르 또한 그녀를 규탄했다. 다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교칙의 구멍이었으니까.

“설마 진짜로 쳐들어 갈 줄은…….”

“너무 급하게 만든 것이라…….”

건물은 관리의 재교육을 위해서 시간을 들여서 만들었으나, 강철 인형 아카데미 자체는 급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교칙에 구멍이 존재했다. 또 구두로 하지 말라는 소리만 했을 뿐, 법으로 강제하지 않은 것도 컸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경고만 받고 끝났다.

남관에는 3천 명의 귀족 자제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중에 불파겐의 후예는 2명뿐이다. 크레시미르와 다이앤타의 후계 구도에 도전할 후계자가 없었다. 그들 스스로 꼬리를 말았다.

이는 당연하기도 했다.

즐길 것이 넘치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었다.

평화가 도래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를 쓰고 싶지, 크레시미르처럼 낮은 곳으로 향하여 현장 경험을 쌓고, 매일 도서관의 책만 읽고 싶은 후계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극소수에 해당하는 게 다이앤타였다.

자기 형제를 이기겠다는 호승심 하나만으로 따라오고 있는 여동생 외에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남관에 소속된 이들은 노빌러티(Nobility)라 불렸으며, 귀족이 가져야 할 다섯 가지 소양을 뜻하는 손가락 다섯 개를 형상화한 배지를 달고 있었다.

반면 북관에 소속된 이들은 이퀄러티(Equality)라 불렸으며, 검과 방패를 형상화한 배지를 달고 있었다.

평민에서 벗어나, 전쟁에서 그 소임을 다한다는 상징이다.

3일을 지내며 적응했다. 노빌러티는 대부분이 자율 수업이었으며, 한 달에 한 번 성과 보고서를 내는 것이면 충분했다.

반면 이퀄러티는 각자 교수를 배정받았다. 또한,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수업을 받아야 했다. 다만 여기에도 차등이 존재했다. 이퀄러티 중 5,001~10,000위에 해당하는 로우 랭크(Lower rank)는 오후와 심야 수업까지 존재했다.

1~1,000위, 로열 랭크(Royal rank)와 1,001~5,000위 어펄 랭크(Upper rank)는 오전 수업을 받으면 끝났지만, 과제가 빡빡한 편이다. 특히 로열 랭크는 하나의 과제를 더 받는다.

피 말리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오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커리큘럼들을 배우며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이고, 못 빨아들인 이들은 점점 랭크의 변화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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