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화
* * *
‘우상을 위한 제단, 반마의 제단.’
우상 복권의 존재.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지하 연합의 행보. 그 속에 지배자들에게 드낙의 명령서가 내려왔다.
신제국의 황제,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드낙이 보낸 명령서를 훑더니 이를 던졌다.
계단을 구르며, 떨어진 것.
그것이 이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이며, 다종족 연합에 유이(唯二)한 초월자 중 한 명. 드낙 불파겐의 것이었다.
“…….”
꼴깍.
대전에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건방지지 않은가.”
세파리아스의 육성이 울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그르다고 추켜세울 수 있는가? 그러기에 드낙은 너무나도 막강한 존재였다.
그의 말이 옳다고 추켜세울 수 있는가? 세파리아스 또한 드낙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이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눈치도 그 정도로 없으면 병이다.
“왜 아무도 말이 없는가? 신제국이 침략당한 수준 아닌가?”
자신들은 지금 드낙에게 한 방을 먹은 것이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세파리아스 몰래 드낙이 흉수를 들이민 것이나 진배없었다.
“신제국의 유일무이한 황제시여, 지금은 그 의도를 살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대신 하나가 보다 생산적인 일을 위해서 목소리를 보탰다. 시작의 물꼬다.
‘지성 종족의 욕심을 부추기기 위해서겠지.’
오랜만에 보는 드낙 짓이었다. 그 간사함은 초월자의 격에 맞지 않았다.
이 세상의 기득권층은 그 누구도 초월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생은 또 다르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초월자로 거듭나서 테라를 지키는 초월자의 일익(一翼)이 되는 것과 적당한 초월의 힘을 보유한 채로 영생을 누리는 것은 체감이 또 다르다.
‘서민의 마음을 아는 지배자라……. 내가 또 하나를 배우는구나.’
세파리아스는 진정으로 감탄했다.
드낙은 여우 같은 놈들의 니즈를 잘 안다.
“반마의 격은 분명 귀중한 것입니다. 정식으로 항의하여 똑같이 받아내야 합니다.”
다른 대신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반마의 제단은 신이나 악마가 되는 길이 아니다. 적당한 준초월자가 되는 길이다.
‘나쁘지 않다.’
아주 적당한 자리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생(永生)은 중요하다.
이곳에 있는 대신 중 격을 얻은 이는 전혀 없다시피 했다. 모두 초월자가 되어서 영원불멸한 삶 속에 드낙과 세파리아스를 위해서 일하고 싶은 이들은 없었다.
격이 같다고 그들과 나란히 있을 수 있다는 소리는 전혀 믿지 않았다.
초월자들은 상식을 초월한다.
수준 차이도 심했다. 그러나 그들과 이들을 비교하는 건 불합리한 일이었다.
하나는 인류가 낳은 최강의 전사고, 다른 하나는 신이 고르고 골라온 최고의 조커 카드다.
둘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구축했고, 그 권좌에 올랐다. 이들은 거기에 못 미쳤을 뿐, 엘리트라 불릴 만했다.
“주워서 읽어보라.”
세파리아스의 말에 대신 하나가 일어서서 드낙의 명령서를 집어 들었다.
고급의 양피지였다.
‘먼저 예상했다.’
대신의 표정이 싹 바뀐다.
감촉만으로도 대단히 고급스러운 양피지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저급한 양피지로 문서 작업을 했기에 감촉으로도 알아챘다.
다른 세력 또한 이와 똑같은 명령서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받았을 것이다.
대신의 눈이 드낙의 명령서에 적힌 글귀를 눈에 담았다. 이를 다른 대신들에게 건네줬다. 내용은 핵심만을 담고 있어서 금방 돌아가며 볼 수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드낙 님께서는 정말로… 허…….’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생각하는 바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뿔 쥐들의 이슈몰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큰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명령서를 받기 전까지는 뿔 쥐들이 내놓은 복권과 반마 제단만 대처하면 될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영생을 거래하는 날이 생각보다 일찍 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경들은.”
세파리아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실로 귀족다운 웃음이었다. 한 손에는 명예를 쥐고, 뒤로 숨긴 왼손에는 이권을 쥔 세파리아스의 말에 대신 중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경매라니…….’
‘격(格)을 사는 행위라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시적이지만, 그 누구도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고, 주먹만 움켜쥐었다. 상상 이상으로 잔혹한 행위였다.
“이거, 지하 연합과는 다른 방식 아닙니까?”
“지하와 지상을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반문에 반문으로 답하는 세파리아스는 실로 짜증 나는 타입의 인격체다.
지상과 지하는 확실히 비교하기 어렵다.
지하 연합의 규합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개미의 군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드낙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고블린이든 크놀이든 두더지 인간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단히 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광신도들이다.
반면 인간들은 가족이 있고, 장성할 자식이 있다. 옷은 10만 원짜리를 입혀도 학비는 7천만 원이든 1억이든 쓰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돈으로 발라서라도 커리어에 한 줄 긋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기득권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지하 연합에 소속된 이들은 자기 핏줄보다도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 드낙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죽는다.
이를 위해서는 가족도 죽일 수 있고, 자기 핏줄조차도 과감하게 죽인다.
그게 종교란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는 양날의 칼날이었다. 지금까지 종교의 이름으로 죽은 이들의 숫자만 해도 엄청나다.
지하 연합은 가장 종교적인 집단이다.
그들의 가장 큰 지배계층인 뿔 쥐들 때문에라도 드낙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자기 회사 부장이 좌파인데 눈앞에서 좌파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생활도 그렇게 병신처럼 하는 놈은 투표권을 뺏는 게 인생에 더 도움이 될 터였다.
정치 성향은 연봉과 같다. 남에게 떠들수록 자기만 병신이 될 확률이 높다.
“지하 연합만 좋은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신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세파리아스 또한 드낙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오늘도 난 내 적수가 없다는 것에 탄식해야겠군.”
차가운 분노가 서린 세파리아스의 말에 시끄러웠던 대전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 눈치를 보며 머리를 팽팽 회전시켰다.
“복권과 관계가 있습니까?”
인내심이 부족한 기사가 입을 나불거렸다. 목숨이 다섯 개 정도는 있는 것처럼 굴었다.
“…….”
세파리아스가 손에 턱을 괴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스스로 알아야지.’
임기응변이란 건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모든 걸 말해 줘서는 안 된다. 이미 자신은 절대자에 올라섰고, 이제 이 왕좌를 지켜내야 한다.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면 과제를 내어주고 그곳에서 성향과 생각, 빈틈을 찾아내야 한다.
‘복권. 반마의 격. 명령서에 적힌 경매.’
하나같이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음습한 놈.’
세파리아스는 드낙의 꼼수를 모두 파악하게 됐다. 다만, 이를 기회로 삼았다. 그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되레 황권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결론을 냈습니다.”
“들어보지.”
대신들은 기어코 답을 유추해 냈다. 역시, 신제국의 황제가 가려 뽑은 인재들이다. 초월에 닿지 못했고, 재능이 많지 않지만, 능히 성과를 냈다.
“지하 연합은 너무 규합력이 높습니다. 그러나 부를 누린 자들은 적습니다. 그 탓에 우상 복권을 하도록 한 것 같습니다.”
그냥 우상을 위한 제단을 크게 이슈몰이할 재료로 쓴 것에 불과했지만, 희한하게 해석했다.
“우상을 위한 제단은 사실 지하 종족이 가장 쓸모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반마로 만들 이들을 손쉽게 선별할 수 있기에 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상의 종족들은 다릅니다.”
대신이 두 팔을 벌렸다.
“신제국에는 수많은 영웅이 즐비합니다. 그런 이들에게도 초월자란 것은 겁이 나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영생이 가능한 반마의 격은 또 다릅니다.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게 돈이라는 것인가?”
“예. 지금만큼 돈을 버는 것이 쉬운 시대가 없습니다. 하고자 한다면 가능합니다. 신분이 높고 낮음에 따라 돈을 많이 쥐고, 적게 쥐지 않습니다.”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상업이 득세하고, 세력 간 교역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화폐는 끝도 없이 주조되어서 민간에 풀리고 있다.
끝없이 상승하는 시대다. 시장은 활화산처럼 뜨겁다.
기득권이라고 할 만한 이들은 세금을 좀 많이 내는 편이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다른 국가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경매할 것 같나?”
“상위국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희보다도 더 분열된 정치 구도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크 또한 분열했습니다. 그들도 드낙의 중재를 받아들일 겁니다.”
중재라고 해도 반협박에 가까운 명령서를 받았을 것이다.
애초에 오크들은 드낙에게 신앙을 주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상을 위한 제단과 드낙의 명령서는 오크들에게 향했다.
적어도 그들이 다종족 연합에 속해 있는 한, 드낙이 그들을 견제하긴 해도 차별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모호한 선을 드낙은 확실히 지켜나갈 터였다.
“드워프에게 어떤 명령서가 갈지는 의문입니다. 지금도 불멸에 가까운 존재들이기에 반마의 격으로 올라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종족 값이 높은 것이 드워프였다. 중립신의 첫 번째 자손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들은 살아있으면서도 무생물에 가까운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우상을 위한 제단을 받아도 이를 사용하여 반마의 격을 지닌 드워프는 대단히 드물게 생산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엘프입니다. 이미 디아볼로스들이 많지 않습니까.”
“디아볼로스와 반마의 격은 확실히 구분해야 합니다. 그들은 분명 또 하나의 날개를 얻었습니다. 그릇이 정해진 엘프에게 악마의 힘은 가장 완벽한 궁합입니다. 필시 시간이 흐른다면 엘프는 최강의 종족으로 불리게 될 겁니다.”
다른 종족에 대한 주제는 그것으로 끝났다.
중요한 건 신제국이다. 여기서부터는 세파리아스가 주도해 나갔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경매를 통해서 얻는 돈은 모두 국고에 귀속된다.”
대신들의 표정이 굳었지만 찍소리도 못했다.
드낙의 명령서에도 쓰여 있는 것이다.
엄청난 왕권 강화를 노리는 대목이었다. 차라리 드낙이 모두 가져갔으면 싶은 마음을 품은 대신도 있었다.
“이 돈으로 신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볼 사람이 있는가?”
세파리아스의 눈길을 받은 이들은 모두 눈을 내리깔았다. 당장 세파리아스에게 답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경매를 통한 돈을 어디에 쏟아부을지 말하는 건 힘든 일이다.
‘천금, 만금이 아니다.’
지금까지 성공 가도를 달리며 막대한 세금을 내면서도 압도적인 부를 쌓은 이들의 돈이 한순간에 몰릴 것이다.
끝도 없는 예산이 쏟아져 나올 터였다.
쓰기가 버겁다. 어지간한 게 아니면 선택하기 힘들었다.
“아무도 없는가? 그렇다면 내가 결정하겠다.”
앉아있던 세파리아스가 몸을 일으켰다. 모두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시대는 사라진다. 드낙조차도 지금은 ‘강철의 비’를 통해서 막대한 전술 역량을 지닌 간부들을 가려 뽑고 있다. 우리가 그 속에서 해야 할 일은 우리들의 장점을 드높이는 일이다.”
신제국의 단점은 차고 넘친다.
그들은 상위인간(上位人間)의 길을 포기했다. 마법사는 마법사로 남았고, 기사는 기사로 남았으며 병사는 병사로 남았다.
“군사훈련 교육을 시행한다. 이수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 전 국민이 병사의 수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 끝에 우리 국민은 모두 분대장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강철 인형을 앞세우며 싸우는 최전선에 서게 될 것이다. 오늘이 그 첫 발걸음을 찍는 날이다.”
“그 말을 따르겠나이다!”
“기뻐하소서! 인간이 인간답게 맞서 싸우는 날을 위해 오늘 모두가 일어나겠나이다!”
대신들이 일어나서 신제국의 영광을 외쳤다.
세파리아스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제련이다.’
신제국 자체가 한 자루의 검이 될 것이다.
세파리아스는 악마들이 빨리 침공해 줬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때, 신제국은 자신들의 비전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모든 세력에 보이지 않는 폭풍이 불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