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3화
16. 강철의 비 (2)
신제국의 권좌에 오른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왕좌에 거만하게 앉아있다. 그러나 절대 경박하지 않았고, 귀족적인 풍모를 뿜어내고 있었다.
대리석의 차가움이 계단 아래로 층층이 퍼져나가서 예스러움이 가득하였다.
세파리아스는 평생을 노력했음에도 엘프의 간사한 혓바닥에 고꾸라졌었다.
이 왕좌에 앉을 때마다 자신의 첫 번째 죽음이 자꾸만 생각났다.
아직, 그때를 잊지 못하는 것이리라.
아직, 그때의 실패를 잊지 못하는 것이리라.
아직, 세파리아스는 자신의 심장이 히드라의 독에 의하여 녹아내리던 감각이 생생했다.
그의 눈에 수많은 대신들이 길쭉한 원탁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만든 나라의 모습이다.
마법사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평범한 인간은 마력을 품고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세파리아스는 이를 내려다봤다. 무인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신제국에 문인의 시대가 온 것인가? 아니다.
영웅의 최후를 아름답게 그리는 문인은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영웅은 살아야 빛난다. 죽으면 거기서 끝이다. 그걸 모르는 한, 문인이 실권을 잡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 대신들의 문인 비율은 괴이할 정도로 많았다.
모두 ‘강철의 비’ 때문이다. 워-퀘스트인지 뭔지에 민간이 떠들썩하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드낙의 손이 보인다. 무엇을 꾸미는가? 이를 잘 파악하고 대처를 해야 한다.’
그 손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드낙은 전 대륙에 이 이벤트를 개최했고, 수많은 정보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헛소리도 있었지만 진짜로 추진할지도 모르는 것도 많았다.
힘든 일은 없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면 될 일이다. 그 정도 역량이 없는 건 아니다.
그 첫 번째가 슬럼가였다. 일단은 드낙이 하는 일에 적극적 참여를 위해서 일을 하지 않고, 세금을 내지 않고, 범죄를 퍼뜨리는 슬럼가를 노렸다.
“슬럼가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예!”
대신이 일어서서 상황을 말했다.
“도시에 있는 슬럼가는 모두 처리했습니다. 슬럼가에서 모은 참가자의 숫자는 아직도 집계 중입니다만, 현재 집계된 숫자는 8만 명입니다. 아직 한참 남아서 정확한 계산은 한 달 이상 걸릴 것 같습니다.”
신제국의 행정력을 뛰어넘는 일이 단행됐다.
잡아들인 슬럼가의 인간들은 작은 단칸방에 8명에서 10명씩 집어 처넣어져 있었으며, 식량 배급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하루에 싸움에 휘말려 죽은 이들이 한 명씩은 꼭 나오고 있었다.
“이제 8만이면 슬럼가의 사람이 족히 16만 아니, 20만 명이 될지도 모릅니다.”
탄식과 감탄이 이어졌다.
설마, 슬럼가에 그 정도로 많은 인간이 모여 살 줄은 몰랐다. 그 무지에 대한 탄식과 동시에 그만한 기생충들을 이번에 솎아냈다는 감탄이 혼재했다.
‘대신 중 그 누구도 몰랐다는 뜻.’
인구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슬럼의 인간들은 세금을 내지 않기에 인구 조사에 포함되지 않거나, 거짓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있었다.
관리가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의 문제였다.
신제국의 행정력이 워낙 부족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가치 없는 이들을 관리하는 건 행정력 남용이나 다름없다. 행정력이 부족한데 쓸데없는 일에 행정력을 소비하는 문인이 있다? 눈치를 엄청 받을 것이다.
당장 금화 한 닢의 문서 해결이 중요하지, 슬럼가의 일은 뒷전이다.
이슈가 되어야 그제야 제대로 일하는 경찰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게 ‘현실’이라는 놈이다.
“슬럼가 통제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 대신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슬럼가의 사람들을 죄다 목을 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문인 양성에 더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신제국의 역량은 언제나 부족하다. 그것을 항상 마음에 두도록 하라.”
세파리아스도 이를 알았기에 그저 경고만 하고 끝을 냈다.
“신제국의 영광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멀리 퍼져나가나이다!!”
대신들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인구는 힘이다.’
굶어 죽든, 비루하게 살아가든 상관없다.
중국 농민공이 한 달에 20만 원도 못 받고 살아가도 중국은 경제 대국이다.
인구는 힘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지배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피라미드의 아래에서 노예같이 살아가는 이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기득권에게 있어서 인구란 자신의 든든한 발판 노릇을 해주는 잡것들이 바글거리는 것이었고, 그 자체로 기쁜 일이었다.
“…….”
세파리아스의 눈이 대신들을 훑었다.
그들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내리깔았다.
“혹, 슬럼가의 인간들을 도우려는 문인들이 있다면 미리 쳐내도록 하라.”
“예전 일이 아닙니까. 적어도 지금 그런 문인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먹물로 세상을 배운 탓에 슬럼가에 관심을 가지는 문인이 있긴 했다. 다만 그들 또한 결국에는 현실을 깨닫고 다른 곳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번 베풂을 받으면 끝도 모르고 선을 넘고, 또 넘는 슬럼가 사람들의 모습. 그런 것을 마주하게 되면 질릴 수밖에 없었다.
없었기에 더하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떡 벌어지는 대저택을 지닌 사람이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까. 당장 한 끼 없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바짓가랑이를 더욱 거세게 잡아당기게 마련이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거기에 덴 문인은 다시는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지 않게 되어버렸다.
슬럼가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고, 음습했다. 평범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왜들 그러는가?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된 것 아닌가. 이참에 슬럼가를 모두 철거하고 새로 만들어라.”
그 말에 무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럼가의 인간을 모조리 잡았으니 이제 남은 건 그들이 싸 놓은 오물을 치우는 일이었다.
한 치의 거부감도 없었다.
“그런!”
반면 문인들은 아니었다.
기세가 들끓었다.
문인 출신 대신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許)한다.”
“슬럼가의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지금 조사 중입니다. 아직 그들은 강철의 비를 플레이하지도 못했고, 워-퀘스트에서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지도 못했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그들이 돌아갈 곳을 없애신다니, 어찌 감당하시려고 하십니까.”
아무것도 이뤄진 것이 없는데 벌써 슬럼가를 무너뜨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금 하나 내지 않는데 그들의 사정을 봐줘야 하나? 그들은 염전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만약, 전술에 재능이 없다면 염전으로 보내겠단 소리다.
드낙의 식량 자유화는 분명 곡식과 고기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지만, 그에 반하여 다른 건 엉망이었다.
특히 향신료가 그러했다.
이 때문에 염전은 가장 핫한 사업 중 하나였다.
고기하면 소금이다. 후추도 빠질 수 없다. 설탕? 말할 것도 없다. 무조건이다.
고기에 들어가는 조미료는 한결같이 비슷하다.
다만, 노동력이 문제다.
농업 골렘은 무지막지하게 많은 ‘다양한 손’으로 농업을 한다. 그마저도 밀 하나를 재배하는 데 사용된다. 부품이 많기에 마모도 심하고, 관절도 많아서 매번 고쳐줘야 한다.
괜히 마을마다 농업 골렘 정비소가 있는 게 아니다.
은근히 유지비가 많이 들어간다.
밀과 고기만 해도 이럴진대, 소금과 후추까지 골렘으로 생산할 수는 없다. 여력이 부족했다.
매일 같이 용광로에서 불을 뿜으며 철이 생산되고, 만티코어의 아가리에서 구리가 쏟아져 나와도 부족했다.
이런 의미에서 신제국이 소금과 후추 산업에 뛰어드는 것은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소금과 후추 산업은 사람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이 있어야 했다. 돈이 없으면 하지 못할 것이고, 빌린 돈이라도 있어야 사업을 벌일 수 있다.
이를 모를 세파리아스가 아니었다.
“후…….”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한숨이 삐져나왔다.
가히 철인이라 불리며 만인의 지배자로 가장 합당하다 여겨지는 것이 세파리아스였다. 그가 베푸는 신성력을 통해서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자가 한숨을 내뱉었으니, 순간적으로 대신들이 깜짝 놀라 하나같이 눈을 부릅떴다.
“들어라.”
“우리의 대의는 한낱 업(業)의 가루가 되어가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하여 차원 다리를 지금까지 공사했고 진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전쟁을 대비한 지휘관의 확충이다.”
강철의 비를 통해서 수많은 재능 있는 지휘관들이 배출될 것이다.
“그 싹을 판별하는 일에 우리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다른 세력보다 밖으로 나가 싸워 대의를 높여야 한다.”
싸움에 지휘관이 많으면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갈 것 같으나, 계급을 명백히 구분하면 이를 방지할 수 있으며 부사관 같은 현장 지휘관은 병사들의 생존율과 작전 진행 수준을 확연하게 높일 수 있었다.
“그러니 차원 다리 건설이 늦어진다고 해도 강철의 비에 집중하도록 하겠노라.”
“신제국의 영광이 우레와도 같이 퍼져나갈 것이옵니다!”
세파리아스의 말에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였다.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 * *
슬럼가를 싹 청소한 후, 평범한 시민들은 범죄가 줄어들었다며 좋아했다. 그 속에서 워-퀘스트 이벤트가 진행되었으며 달이 지날수록 그 옥석이 명확하게 가려지기 시작했다.
선택된 자들과 선택되지 못한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악!”
“뭐, 뭡니까?”
“염전 노동자로 임명됐다.”
“제가요? 왜요?”
“슬럼가의 인간이 어디서 말대꾸를 하는 것이냐! 나라가 결정한 일이며, 위대한 신제국의 황제, 세파리아스 불파겐 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선택받지 못한 슬럼가의 인간들은 염전 노동자가 됐다. 염전 수용 가능 인원이 늘어감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 숫자가 증가하였다.
신제국은 이를 통해서 향신료의 나라가 될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동시에 선택받은 이들은 보다 좋은 곳에서 안전하게 전술가로서의 소양을 증명하고, 배울 수 있었다.
세파리아스의 ‘차원 다리 공사’ 일시 중지는 그 속에서 만방에 퍼져나갔다.
그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단순했다.
‘드낙이라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 테니까.’
신제국의 황제는 드낙이라는 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놈은 한 번 나아가면 멈추지 않는다. 두 걸음, 세 걸음 이내 내달리기 시작한다.
당장 강철 인형이 부딪치는 강철의 비는 재미 요소도 있고, 문화 측면적으로도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호쾌하게 해소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능한 지휘관이 될 싹을 지닌 이들을 바로바로 감별할 수 있었다.
되는 놈이 있고, 안 되는 놈이 있었다.
스타를 잘하는 놈과 못 하는 놈이 나뉘는 것과 같았다.
전술과 전략은 노력으로 어찌어찌 할 수 있지만 결국 그 끝은 재능의 영역이다. 게임도 이러할진대, 다른 건 말할 것도 없다.
* * *
드낙은 고민하고 있다.
‘너무 쉽게 일이 풀리고 있어. 내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다. 모두가 워-퀘스트를 할 줄은 알았지만 상상 이상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경쟁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에 강철의 비는 유행이 되었다. 그 기세가 파죽지세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대로 제대로 문화로 자리 잡게 되면…….’
테라는 ‘전쟁 행성’이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지나가던 일반인에게 전술적 질문을 했을 때 상상 이상으로 정답을 말하는 행성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잘 되어도 너무 잘 됐다는 것이다.
‘옥석이 많아도 너무 많다!’
그건 심각한 일이었다.
‘세파리아스 이놈이 장작을 넣어도 단단히 넣었다.’
그는 세파리아스가 무슨 일을 벌일지는 몰라도, ‘무슨 일을 벌이겠지.’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차원 다리 공사를 일시 중지를 시키면서까지 모든 자원을 쏟아붓고 있었다.
“제기랄.”
오랜만에 욕지거리를 날렸다.
‘간파당했다.’
드낙은 선별된 전술가들을 반마(半魔)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세파리아스가 장작을 넣으면서 너무 많은 선별 전술가가 탄생하고 있었다.
싹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예상되는 선별된 전술가 숫자만 해도 20 명만이 넘을 것 같았다.
말이 20만이지, 2020년 대한민국의 장교와 부사관 숫자가 20만이 안 된다. 그런 놈들을 죄다 반마급으로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짜 반마 이벤트에 세파리아스가 미리 장작을 넣으니, 다른 이들도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사활을 걸게 됐다.
드낙이 이처럼 선별된 이들을 반마로 만들려는 이유는 실로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