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8화
드낙은 그림자를 풀풀 나부끼며 걷고 싶었지만 참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중2병스러웠고, 남들이 보기에도 과하다고 여겨져서다.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세리안과 청색의 드레스를 입은 레이시아가 드낙의 양옆에 있었고, 그 뒤로 다른 부인들이 따랐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모두가 동원됐다.
드낙이 크게 총애하는 지하 연합의 뿔 쥐들의 종전식이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자식이 구경거리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자식들 또한 이런 자리를 통해서 많은 걸 보고 배워야 했다.
드낙은 들어가서 먼저 짐을 풀었다. 종전식은 하루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며칠 동안 신나게 즐겨야 한다.
“대단하다!”
드낙이 감탄했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색을 지닌 검은 돔의 천장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 아래로 지어진 대리석의 아름다운 물결은 더욱 선명했다.
회색 대리석임에도 깔끔한 느낌을 줬고, 검은색과 대비되었다.
“찍찍!”
대장 쥐는 수많은 곳을 구경시켜 줬다.
“카르마 물약이라는 것입니다.”
지하 연합의 새로운 물약도 보여줬는데, 실로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카르마 물약?”
“업(業)을 한 명에게 집중시키는 방법입니다.”
“흠, 쓰기에 따라서 악용할 소지가 있겠는데. 어떻게 제작한 거지?”
“성공한 지하 연합의 실력자들을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그 피를 뽑아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어디에 쓰는 건가?”
“열정과 비교했을 때 실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사용합니다.”
“음!”
드낙이 감탄했다.
대장 쥐가 하려는 것, 지하 연합의 연금술사들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히틀러만 봐도 알 수 있지.’
세계 2차대전을 벌였던 사악한 인간이 바로 히틀러다. 그런 히틀러는 미술에 대한 재능이 없어서 군인이 됐다. 만약, 그가 미술에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었다면 그는 미술선생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재능이 없는 이들은 수틀리면 수천만 명을 학살한 대악마가 될 수도 있다.
“야망과 비교하면 실력 없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 이 카르마 물약입니다. 이미 성공한 이들은 막대한 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들은 이미 성공해서 사회를 지키기 위한 구성원으로 훌륭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실력이 없으면서 야망만 많은 이들은 아무래도 반사회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정한 경쟁으로 그들은 자신의 꿈을 이룩할 수 없다.
그들이 성공하려면 남을 고꾸라뜨리고, 협박하여 기회를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사회에 분란이 야기되는 걸 조기에 막을 수 있겠어. 어느 정도의 야망을 지닌 자들은 실력이 자연스럽게 높아질 테니 만족하겠지.”
“만약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 자들을 ‘감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회에서 걸러낼 수 있었다. 죽여서 핏물이 되면 그 또한 훌륭한 양분이 될 것이다.
‘대장 쥐가 만들라고 시켰겠지.’
업(業)은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종족 값이 높아질 기회를 부여한다. 종국에는 초월자의 반열에 들어선다.
지하 연합은 업을 골고루 퍼뜨리면서 우수한 인재를 뽑으려는 듯했다.
‘반마급의 인사만 잔뜩 만들겠다는 소리다.’
초월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지하 연합은 한 번 크게 내전을 앓았었지.’
뿔이 없는 자와 뿔이 있는 자들의 싸움이었다.
혹독한 사회에서 더는 버티지 못했던 노동자들의 반란이었고, 당연히 진압당했다.
힘이 없는 자가 지배자가 되려고 했으니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만 해도 가위바위보로 최저임금 인상을 결정한다. 쥐뿔도 없으면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기득권은 그들의 삶이 중요하지, 다른 이들의 삶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내전을 완벽하게 지우기 위해서는 야망 있는 자들을 ‘카르마 물약’으로 유혹하는 것이 좋았다.
독이 든 성배라고 여겨도 결국 마실 수밖에 없었다. 반마가 될 기회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지하 연합은 머릿수가 많다. 여기에 질까지 더해졌으니, 그들의 미래는 굉장히 밝았다.
“훌륭하다. 혹시 다른 곳에도 팔 생각인가?”
“적어도 반마(半魔)가 되려는 자들이 있다면 판로를 뚫어 볼 생각입니다.”
드낙과 깊게 연결된 것이 지하 연합이었다. 그들만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털을 싹 민 뿔 쥐 요리사들이 소수로 모여서 작은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다. 마치 마트에서 시식하는 것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제법 힘을 줬다는 점이었다.
한 접시를 받았다.
“이거 만두인가?”
“예!”
대장 쥐가 호쾌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접시째로 들고 다니기 좋았고, 아주 작은 포크로 콕 찍어서 먹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간장은 없었다.
간장과 된장은 아직도 실현 불가능한 존재였다. 드낙이 만들 줄 몰라서기에 다른 이들이 만드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겉에 소금이 뿌려져 있고…….”
드낙이 유심히 만두를 살폈다.
만두의 표면은 갈색으로 아주 잘 구워져 있었다. 밀가루로 만든 듯했지만, 표면에 소금을 뿌리고 소금까지 살짝 구웠기에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소금 표면에 있는 건 고기 기름인가.’
절로 군침이 돌았다.
‘마이야르 반응.’
드낙이 가르친 구이 요리의 가장 기본이다.
“아! 밀가루에는 사용할 수 없으니, 고기 기름을 쓴 건가!”
밀가루에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다.
단번에 한입 했다.
‘시작부터 고기의 향이 느껴지고 짠맛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깨물면 채소즙이 새어 나오며 입을 상쾌하게 만든다.
아삭.
아삭거리는 채소는 살짝 데친 것이라 아직도 싱싱했다. 그리고 채소들이 뚫어놓은 곳으로 고기들이 떨어져 내리며 씹혔다.
‘일품이다.’
만두소로 사용한 고기는 삶은 고기였다. 그래서 오히려 잡내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기 기름에 구운 밀가루 때문에 구운 고기를 먹는 듯한 기분을 만들어냈다.
‘누구나 좋아하겠어.’
부인들과 검은 돔의 온천도 즐겼다.
온천은 아주 높은 곳에 있었고, 새로 지은 검은 돔의 지상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바람 마법에 의해서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다른 지배자들도 속속들이 붉은 양탄자를 걸어왔고, 대장 쥐를 비롯한 수많은 지하 연합의 지배자들의 안내를 받았다.
온몸의 털을 모조리 깎아서 요리사의 길을 걷는 뿔 쥐 요리사의 요리는 흠잡을 데가 없어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특히 만두가 큰 인기를 이끌어냈다.
드낙이 언급한 것이고, 이곳에 억류된 용병 지구인들의 지식을 통해서 실현된 것이긴 해도 음식문화라는 건 그렇게 급변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써먹을 만했다.
드낙은 부인들과 함께 충실히 지하 연합을 위해서 행동했다. 그들이 준비한 것을 최대한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종전식에서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릴라 전쟁은 오늘로 끝입니다. 우리 다종족 연합은 마수를 물리쳤습니다. 마신은 도망쳤습니다!”
나쁘지 않은 연설이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 번영할 것입니다.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께서 우리를 보살피실 것입니다! 영원토록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며, 똑같은 헌신과 희생으로!”
세파리아스가 하품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시선이 모였지만 금세 흩어졌다.
‘건방진 세파리아스.’
일부러 저런 것이 틀림없다.
초월체가 하품이라니, 우습다.
드낙도 그 술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저런 하찮은 도발은 그냥 무시하는 것이 답이다.
세파리아스은 드낙을 놀리는 것일 뿐이다. 만약 세파리아스가 내전을 노린다면 차원 다리 공사를 하고 있을 리가 없다.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원과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다종족 연합은 위대했고, 앞으로도 위대해질 것이며, 다시 한번 더 위대해질 것입니다! 문명화된 지하 연합은 첨병이 되겠습니다!”
짝짝짝짝짝!
대장 쥐가 몸소 나서서 게릴라 전쟁이 끝났음을 외쳤을 때, 드낙조차도 박수를 쳐줬다.
한 번쯤 드낙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하느님이 있는데 왕이니, 황제니 그럴듯하게 행사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른 이들도 나와서 연설을 시작했다.
종전 선언 이후에는 뿔 쥐들이 준비한 ‘강철의 비’를 구경했다. 강철 인형이 서로 부딪치는 싸움이다.
무리를 만드는 고블린 강철 인형은 엉성하고, 무기도 조잡했다.
“야생 고블린 무리입니다.”
“잘 표현했다.”
드낙이 흥미롭게 바라봤다.
옛날의 고블린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창고에 몰래 들어와서 물건을 훔치고, 놈들을 죽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드낙이 주변을 훑었다.
모든 것이 마법 크리스털로 기록되고 있었다. 전장에 배치된 마법 크리스털의 개수가 많았다. 허공에 스크린처럼 영상이 보였다.
‘나쁘지 않아. 많이 고심한 흔적이 있다.’
게릴라 전쟁 때문에 파묻혔지만, 강철의 비는 중요 정책 중 하나였다. 무려 그 세파리아스조차도 강철의 비를 활성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종전식의 폐막에 보여주기 딱 좋았다.
세파리아스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 ‘강철의 비’는 한 국가에서 노력한다고 해서 효력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종족 연합 전체가 몰두해야지 쓸모가 있었다.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야만 고블린의 상대는 누구지? 숫자가 너무 많은데.”
“지켜보라.”
세파리아스의 말에 대장 쥐가 짧게 답했다. 서로 시선이 부딪쳤다. 불꽃이라도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재밌어 보이는데요.”
“이게 앞으로 우리 국민의 전략과 전술 능력을 높여줄 놀이문화…….”
잡담을 나누기도 좋았다.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자신의 앞에 있었기에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야만 고블린의 상대는 똑같은 고블린이었다. 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문명화된 고블린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상단처럼 보였다.
마차에 온갖 것들이 실려져 있었다.
이를 본 세파리아스가 눈을 빛냈다.
‘의도가 뻔히 보인다.’
고블린과 고블린의 싸움. 그런 것으로 보면 안 된다. 그냥 같은 놈들이 싸우는 것이다. 종족의 변동성을 지워서 똑같은 싸움으로 보도록 했다.
‘정확히는 문명과 야만의 싸움이다.’
종전식을 제대로 이용하겠다는 소리다.
아무리 병신이라도 종전식은 한 번 본다. 취미가 마법 크리스털 안 보기라고 정한 괴짜도 분명 한 번은 보게 될 것이다. 맞아가면서라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서 얻는 것은 ‘야만적’인 편견을 없애는 데 있었다. 지하 연합 스스로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셈이다.
‘지하 연합에 은근히 야만적인 문화가 아직도 있다는 소리다.’
이 때문에 고블린과 고블린의 강철 인형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야만은 죽고, 문명은 산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그걸 모르는 지하 연합의 일부를 위한 일이다. 그 일부가 10%라고 해도 지하 연합의 인구수를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숫자다.
‘정확한 숫자는 몰라도 이런 걸 만들 정도로 필요하다는 것이겠지.’
교육용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진형을 갖추고, 양질의 장비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전술과 전략의 중요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흠, 다만 너무 많은 강철 인형이 소모된다. 시연하기는 어렵고……. 마법 크리스털을 가져가야겠어.’
딱 처음 강철의 비에서 승리를 갈구할 때 그 동기를 더욱 활활 태우기 위해서 보여주기 좋을 것 같다.
다른 이들도 이야기하기 바빴다.
‘돈 냄새가 난다.’
드낙은 돈 냄새를 맡았다.
3천 대 1천의 싸움이다. 쉽게 할 수 있는 싸움은 아니다. 강철 인형의 체력이라고 할 수 있는 표면 마력 코팅이 벗겨지고, 몸체가 파손될 수도 있다.
‘마법 크리스털을 판매한다면 큰 흑자가 되겠지.’
“키아아악!”
“자리를 지켜라!”
“악!”
진형을 갖춘 고블린과 야만적인 소리를 낼 뿐인 고블린의 싸움이 진행됐다.
그 싸움에서 패배하는 건 야만적인 고블린이다.
결과는 뻔했다. 방진 하나 못 뚫는 것만으로도 저들의 죽음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보병이 중장보병에게 덤볐으니.’
누가 봐도 명백하다. 하지만 처음 전쟁터를 강철 인형으로 보는 이들은 짜릿할 것이다.
‘숫자는 1천의 중장보병이지만, 방진을 짰기에 고작 500마리밖에 아닌 것처럼 적게 느껴진다.’
작은 공간에 뭉쳐있어서다. 그와 반대로 야만 고블린 3천 마리는 헐겁게 있다. 몇 배는 더 많아 보였다.
무지한 이들이 보기에는 5배~10배 차이가 나는 싸움을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내 승리한다.
그 위대함이야말로 전술이다.
종전식은 끝났지만, 본격적으로 강철의 비에 대한 소식이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새로운 불이 지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