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6화
지배자들이 모였으니, 종전식에 대한 회의가 끝났다고 해서 바로 흩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미뤄두고 생각만 했던 것을 이야기하며 많은 이권을 서로 교환했다.
“종전식에 참가할 상위국왕은 최대한 많았으면 한다.”
“이번에도 우리 상위국에 많은 식량을 들여올 수 있겠는가?”
대장 쥐의 마음은 상위국왕 전원이 참석했으면 했다. 그만큼 탐욕이 컸다.
반대로 상위국은 식량을 노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지하 연합의 식량은 여전히 다종족 연합 모두에게 좋았다. 특히 가축을 기르는 데에는 지하 연합의 싼 식량이 뭣보다 중요했다.
그저 풀만 먹여서는 가축의 살을 찌우기 어렵다. 전투마조차도 곡기(穀氣)를 얼마나 주느냐, 마느냐에 따라 기병 싸움이 판결 날 정도다.
빛만 있다면 지하에서도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단백질로 이루어진 곤충 가루 또한 훌륭한 수출품이지만, 지하 연합은 드낙의 의도처럼 식량 단가를 최저가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있었다.
드낙이 식량에 집착하는 만큼, 지하 연합 또한 식량에 집착했다.
그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었다. 다종족 연합을 받쳐주는 훌륭한 기둥이다.
‘식량은 많을수록 좋다.’
자연히 가격이 낮아지며, 식량 생산 외에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인구가 늘어날 기회가 된다. 거기에 배춧값이 낮다고 그냥 배추를 엎어버리는 경우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격이 낮아져도 무시하고 무식하게 시장에 공급했다. 조금 흠집이 나도 그냥 판매하기 때문이다. 버려지는 식량을 최소한으로 하고 있었다.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서민들을 생각했을 때 가장 병신 같은 개소리였다.
임대 아파트에서 아무것도 못 한 채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때로는 값싸고 흠집이 가득한 감자도 필요한 법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했을 때, ‘프리미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게 다종족 연합의 식량 시장이었다.
‘프리미엄 과일도 출범하겠지만…….’
우주 낙원으로부터 사로잡은 지구인들을 통해서 확실하게 그런 쪽으로도 향하고 있었다. 돈 있는 이들을 위한 먹거리도 세금을 생각하면 필요한 일이다. 결국 중요한 건 ‘소비’에 있으니까.
“당연히 가능하지.”
대장 쥐의 주둥이에 달린 긴 수염이 꼼실거렸다. 세리안의 눈이 대장 쥐의 윤기 있는 검은 털로 잘 뒤덮인 토실토실한 배에 향했다. 원탁 위로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귀엽기 그지없었다.
쿡쿡 손으로 찔러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들끓었다.
뚱냥이들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풍만함! 그게 뿔 쥐들에게 있었다.
쥐들은 지방을 축적하는 유전자가 대단하다. 하여 쥐의 속성을 지닌 뿔 쥐들은 금방 살이 찌는 체질이었다.
‘만지고 싶다!’
그 욕망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참아냈다. 다른 이들도 움찔거렸다.
대장 쥐가 숨을 쉴 때마다 그 포동포동한 살이 움직이기에 만지고 싶은 욕망이 참기 힘들었다.
“음? 왜 그러지?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대장 쥐가 어리둥절했다.
무슨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되레 이상했다.
“아, 아니다.”
“그럼 상위국은 모든 국왕이 참석하는 건가?”
“그러지. 어차피 마수들의 게릴라도 사라졌다. 다시 평화를 되찾았으니, 당장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날 리도 없다.”
대장 쥐가 일어서서 세리안과 악수를 했다. 이미 정해 놓았기에 세리안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리안 국왕은 악수하며 경고의 말을 했다.
“중요한 건 식량의 수입이다.”
“5년 동안 확실하게 밀어주겠다.”
세리안이 그 말을 듣고 빙긋 웃었다. 산업의 변화를 위해서는 잉여 식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렇기에 수많은 종족에 대한 방침을 미리 결정하고 왔다.
대장 쥐는 곧바로 오션 오크들에게로 향했다.
‘바보 같은 상위국 놈들. 이대로 지하 연합이 손해만 본다고 생각하지 마라.’
“오랜만이다. 규르소모스 대족장! 이번에 오크가 나누어졌다고 하던데…….”
“마음에 안 드는 일이지. 흥! 대주술사라니! 기도 안 찬다!”
규르소모스가 불만을 터트렸다. 물론 이미 대장 쥐는 그 대주술사와도 만나고 왔다. 그가 어찌 되었든 국가 간의 신뢰는 겨우 그 정도에 불과했다.
“종전식 때문에 그렇지? 당연히 참가하겠다. 하지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거지. 찍찍!”
규르소모스의 눈이 활처럼 휘었다. 황소다운 덩치와는 다르게 실로 뱀 같은 눈이다.
“그래서?”
“우리는 식량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가 아닌가. 거기를 긁어주겠다.”
대장 쥐가 쥐 소리를 냈다.
규르소모스는 등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식량 권역인가.”
“그렇다. 찍찍! 해안가에 인접한 곳에 지하 연합의 식량이 점진적으로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물고기값이 뛴다.”
상당한 이득이 될 것이다.
“다른 국가에서 딴소리가 나오지 않게, 빈틈을 잘 메꿔야겠군.”
“만약 그게 실패하면, 우리도 개입할 수밖에 없다. 섣부른 가격 상승은 분명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고, 만약 식량이 도시로 들어가지 않으면 식량 가격이 폭등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구도가 만들어지는 건 막아야 했다.
“나중에 최대한 손발을 맞춰야겠는데.”
“적법한 권력을 지닌 관리를 보내도록 하겠다.”
“나 또한 그렇게 해두지.”
규르소모스와 대장 쥐가 우악스럽게 악수를 나누었다.
대족장은 대장 쥐의 힘이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초월자, 드낙으로부터 업(業)을 받아먹으며 지하신이 되려는 건 들었는데, 상상 이상이군!’
악마의 길을 걷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악마는 곧 육체의 힘.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육체 강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정도면 좋게 마무리했다.’
상위국에 더 많은 식량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로 인해 막대한 식량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오션 오크의 권역으로 이동하는 식량을 당겨쓰게 됐다. 동시에 오션 오크에게는 선심 쓰듯이 굴어서 이득을 쟁취했다. 어차피 뺄 거, 생색을 낸 것이다.
오션 오크가 바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션 오크와 상위국이 그 정도로 긴밀하게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였다.
‘종족이 다르니까.’
피부색만 달라도 ‘다른 인간’ 취급하는 것이 기본이다. 조금만 달라도 큰 차이가 나는 것처럼 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종족 차이는 컸다.
드낙만 아니었어도, 벌써 균열이 일어나 전쟁의 조짐이 보였을 것이다. 한 행성을 지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초월체가 등장했기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신제국의 ‘타차원 팽창 계획’도 훌륭한 방지책이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권력과 그에 따라서 나타나는 야욕을 지닌 이들은 신제국으로 향하면 될 일이다.
‘다음은… 신제국인데.’
대장 쥐가 실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파인애플로 만든 피자를 바라보는 이탈리아 사람의 표정이다. 그만큼 뿔 쥐들에게 있어서 신제국은 그리 평판이 좋은 곳은 아니었다.
사사건건 드낙과 각을 세우며 자신의 영향력과 명성을 드높이는 세파리아스만 해도 건방지다.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을 이용하는 가장 악독한 권력자지.’
그런 놈까지 품은 드낙은 진실로 위대한 자였다.
“찍찍.”
천장 위에서 쥐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대장 쥐의 눈은 천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장 쥐 님. 엘프의 대표자가 만나기를 청합니다.”
“스스로 오다니, 진짜 엘프는 전설이다. 찍찍! 서둘러 데려와라!”
“찍찍!”
대장 쥐가 엘프를 맞이했다.
찾아온 엘프는 늠름했다. 사각 턱에 강인한 눈매를 지녔다.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전투의 선두에 설 것 같은 호방함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 이살탄(Isaltan)의 지도자, 군림의 레굴루스(Regulus)가 지하 연합의 지배자, 대장 쥐를 뵙습니다.”
“조용하던 엘프 지도자 중 한 분이 나를 직접 찾아오다니, 기쁘다!”
대장 쥐가 그를 크게 우대했다.
“아닙니다. 더욱더 위 서열에 있는 엘프 지도자가 찾아오지 못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레굴루스는 18인의 벨룸 퓨에르 중 딱 중간에 위치하는 존재였다. 스스로를 낮추기에는 그렇게 낮은 위치는 아니다. 오직 18곳의 도시에만 있는 엘프의 영역을 다스리는 자 중 하나다.
‘돌격대장처럼 생겼는데, 하는 행동은 영 딴판이다. 이게 벨룸 퓨에르.’
드낙은 그저 한 명을 엘프신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대장 쥐는 그것이 잘 싸인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았다.
‘한 명을 엘프신으로 만들고 난 다음에, 또 한 명을 지목해서 엘프신으로 만들 것이다.’
드낙이라면 분명 그렇게 할 터였다.
‘최종적으로는 18명 모두 엘프신이 되겠지. 복 받은 녀석들!’
대장 쥐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을 위해서 일하기 싫어하다니. 신이 되고 싶지 않다니. 건방졌다.
그 분노는 밖으로 표출되기도 전에 사그라들었다.
결국, 엘프들 또한 현 다종족 연합에 중요한 이들인 탓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찾아왔다는 건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소리를 하기 위해서겠지? 분명 그럴 터다!”
“예. 굳이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날, 모든 엘프의 지도자가 검은 돔에 모여서 종전식을 함께 거행할 것이며 그 광경은 마법 크리스털에 새겨져 만인들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다!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오션 오크 쪽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제 가서 말해 봐야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던 차에 그대가 와줬다.”
“신중하시군요.”
“점점 복잡해지고 있잖나. 그대도 들었겠지? 오크들 말이다.”
“두 쪽이 났지요.”
“인어와도 부딪쳤지.”
“거기에 지하 연합이 개입해서 사이가 안 좋다던데… 맞습니까?”
“몇 가지를 내어줘야 해서 고민이었는데, 엘프가 이렇게 먼저 와주니 오션 오크들을 회유하는 데 도움이 되겠어.”
물론 거짓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역량을 소모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엘프들은 지하 연합을 얕볼 것이다.
‘물밑작업은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지하를 개발하는 속도는 느리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지성 종족이 대부분이다.
‘서투른 놈들.’
지하 연합의 가장 큰 힘은 머릿수에 있다.
고블린만 봐도 머릿수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식량 걱정이 사라진 고블린 사회의 번식은 토끼와 비슷하다.
‘질병도 중요하지.’
의외로 고블린은 병에 잘 걸린다.
대장 쥐는 진실을 몰랐다. 고블린들이 이상하게 허약하다고 여길 뿐이었다.
고블린들이 질병과 전염병이 잘 걸리는 이유는 그들의 유전형질이 기이할 정도로 비슷해서였지만 대장 쥐는 이를 몰랐다.
과일로 치면 바나나가 고블린과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질병이 한 번 퍼지면 그걸로 끝. 어마어마한 전염이 이루어진다.
역설적으로 마법적인 해독 물약과 회복 물약은 고블린의 머릿수를 수직으로 올렸고, 고블린은 우월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약초부터 약물 제조까지 그들의 손으로 이루어나갈 수 있었다.
‘1년을 모르고.’
10년을 착각하고, 100년 동안 그들을 과소평가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지하 연합은 어마어마한 역량을 축적할 수 있었다.
‘백 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무역량과 경제 지표만으로도 서서히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 보일 터다. 그렇게 되면 결국 경계를 받게 되리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때는 이미 지하 연합만으로도 눈덩이를 굴릴 수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내수 경제가 시작될 것이다.
대장 쥐는 복잡한 경제 단어를 모른다. 하지만 확고한 목표가 있다.
‘고블린끼리 자체적으로 무역하는 것만으로도 지상의 모든 생명체의 무역량을 뛰어넘는 것.’
그게 가능하면 지하 연합은 홀로 드낙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종족이 필요가 없을 터다.
“정말 기대되지 않나? 종전식 이후에 우리는 한층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테니까.”
“실로 그렇습니다. 마수들이 손을 뗄 정도 아닙니까?”
게릴라를 벌이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패퇴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전쟁이었다. 하나의 기준을 돌파했다고 해석해도 괜찮다.
마수는 더는 게릴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다른 형태의 전쟁을 벌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
마수는 더는 테라를 노리지 않을 것이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중립신도 이곳에 없으니까 매력을 못 느끼겠지.’
대장 쥐의 입 주위에 있는 긴 털이 꿈실거렸다.
‘남은 전쟁은 악마와의 결전뿐.’
변수로 친다면 우주 낙원을 끌고 침공했던 만신전이지만, 그들이 전면전을 할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