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5화
“나보다 못한 이들에게 주는 것보다는 나를 드높여서 더 많은 명예를 쌓는 것이 좋지 않나?”
하나를 주면 둘, 셋, 다섯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세파리아스다.
당장만 해도 드낙보다 초월의 권좌에 늦게 올라섰음에도 드낙과 동수를 이뤄냈다. 드낙보다 근면하게 전쟁에 임했다.
세파리아스에게 종전 선언을 하게 한다면, 그는 능히 그 효과가 만천하에 퍼지도록 철저하게 관리할 터였다.
그리고 신제국에는 또다시 부흥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끝도 없이 치솟아 올라, 기어코 황금의 시대를 만들어낼 터였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래도 정도가 있다.’
현실에선 좋은 게 좋게 끝나지 않는다. 한쪽이 강하면, 오만해지고 그 오만함은 전쟁을 불러일으킨다.
세파리아스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균형이 필요하다. 그것은 ‘다종족 연합’이라는 조직이 드낙으로부터 잉태되어 나왔을 때부터 강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격을 지닌 세파리아스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철칙이었다.
연합체의 속성을 띠고 있다면, 거기에 따라야 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연합’이란 건 그런 것이다.
부족체에 불과했던 고구려에서 중앙집권을 이뤄내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다고 볼 수 있다.
모두가 중앙집권 국가가 부족국가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또 다른 문제다.
“신제국의 신격아. 신제국을 오만하게 만들려고 하지 마라. 그리한다면 결국 신제국의 신민들은 옛 제국처럼 망가져 버릴 테니.”
다른 국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인간을 나누어 인간의 힘을 반토막 낸 채로 살아온 ‘옛 제국’. 지금은 망해 버렸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드낙이 그들을 빗대어 말하자 세파리아스가 미소를 지었다.
“연합에도 특출난 세력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게 신제국이 될 수 있어 보여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마의 권좌에 오른 드낙, 네가 열심히 국정에 임한다고 볼 수는 없지 않으냐.”
만인의 위에 섰다면 그에 걸맞게 희생을 해야 한다. ‘혹사’ 당한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해야 한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실로 그렇게 움직였다. 그는 항상 격무(激務)에 시달리며, 인간을 위해서, 더 정확히는 신제국을 위해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그걸 일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권력을 잡았고, 이를 휘두르는 일이다. 만인의 위에 서는 일이기에 재밌었다.
반면 드낙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나라를 나누고, 다양한 세력을 품고, 연합을 만들었다. 굳이 자신이 움켜쥔 권력을 다른 이들에게 억지로 안겨줬다.
그로 인하여 업(業)을 쌓으며 신격을 꽃피울 봉우리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이앤타, 세리안, 대장 쥐, 수많은 이들이 드낙을 대신하여 초월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그 권리까지 누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낙은 이를 부추기고, 벨름 퓨에르 중 한 명에게 강제로 업을 줘서 엘프신까지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대신하겠다는 것이다.”
방관하는 지배자는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패스트가 창궐했을 때, 모든 이들이 신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수많은 교인이 신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에 모여서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고 기도를 올렸다.
당연히 그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전염병이 창궐했는데, 모이다니. 어리석게 마련이다.
신은 방관했고, 그들은 죽었다. 농민이 죽고, 또 죽어 농부들의 가치가 높아지며 농노는 자영농이 되고 이내 지주가 되었다.
신은 위기를 방관했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좇는 인본주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어리석다.
드낙이 이와 같았다. 전쟁이 터져서야 움직이는 신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식량의 자유화를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도시 하나 건설하는 것에 불과했다. 왕국이 할 일을 제국이 하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보잘것없었다. 초월자가 되었다면 능히 행성을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드낙은 그러지 못했다. 그 맹점이 세파리아스의 입으로 튀어나왔다.
드낙은 결코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무협뽕을 맞아서 지배하되 군림하지 않는다, 같은 바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드낙은 정말로 권력을 양도했기에 사사건건 명령하지도 않았다. 방침만 정해 주고 그 외의 것은 모두 그들에게 맡겼다.
세력의 세력 발전이 제각각인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
드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세파리아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들으라, 이 회의에 참석한 지배자들아. 자신의 알량한 세력을 드높이려고 애를 쓰는 자들아! 대륙의 힘이 너희의 숫자만큼 나뉘었으니, 그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앙집권체제는 어디에서나 잘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불만을 작은 영향력만으로도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장에 필요한 최대치가 무궁무진하게 높았다. 부족국가가 1을 투자할 수 있다면 중앙집권 국가는 10을 투자할 수 있다.
각각의 부족국가 내부에 있는 부족만큼 비효율성까지 따지면 그 격차는 10배가 가볍게 넘는다.
세파리아스는 이를 지적하고 있었다.
“…웃기는구나.”
드낙이 거기서 다시 입을 놀렸다.
“넌 어차피 밖으로 팽창하여 정복 전쟁을 펼칠 놈인데, 누가 너한테 그 많은 자원을 주겠느냐?”
“중립신의 대계가 있을 때, 테라의 행성은 무한히 팽창하게 되었지만, 그가 패배한 이후로 테라는 성장한계가 뚜렷해졌다. 대형 행성은 되겠지만, 무한히 팽창하는 행성은 되지 못한다.”
결국, 외부팽창을 해야만 했다.
“아주 먼 미래다. 지금 언급해 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드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명 대륙은 한계가 있지만, 아직 행성의 자원을 100% 활용한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 지구조차도 행성 에너지의 100%를 활용하지 못한다.
그 시대가 되려면 한참 걸린다. 수백 년, 길게는 천 년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영생을 살아가게 될 이들이 많아질 테니, 천 년을 내다보고 행해야 한다. 인간의 잣대는 이제 버려야 해.”
드낙이 그 말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정말로 신제국이 종전식을 행한다면, 대륙에 신대륙의 이름값이 크게 오를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드낙으로 인하여 굉장히 좋아진 지금은 원한다면 이민도 쉽게 가능했다.
신제국은 인구를 끌어 당겨먹을 생각을 하는 듯했다.
“불가(不可).”
고민했음에도 드낙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신제국은 신격을 획득한 세파리아스만으로도 충분히 송곳처럼 툭 튀어나와 있다.
“이번에는 네가 양보해라. 내가 나중에 한 번 챙겨 줄게. 내가 약속 하나는 끝까지 지키잖아?”
“흥.”
세파리아스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자들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흥이 식는군. 지배자란 것들이 힘의 논리에 발언 하나 하지 않는 건 우스운 일이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지. 찍찍.”
꿈틀.
세파리아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장 쥐는 태평했다. ‘뜨낙―!’이라고 외치지도 않았고, 가만히 있다가 마지막에 한 소리를 했다.
“건방진 쥐새끼.”
대장 쥐의 얼굴이 웃는 상이 됐다. 그는 실로 그것을 즐기는 듯했다.
세파리아스는 진짜 버러지는 상대조차 안 한다. 그만큼 지하 연합을 이끄는 대장 쥐는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 한 세력의 대표자에게 그 무슨 소리냐?”
드낙이 대장 쥐를 두둔했다.
결론 없는 말싸움을 계속하던 세파리아스는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종전식이 신제국에서 열리지 않으면 신제국은 불참한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디까지 폭주하려는 거냐? 앉아!”
세파리아스는 드낙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정말 떠날 생각은 없는지, 회의장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무래도 신제국의 황제는 회의를 오랫동안 하고 싶은 듯합니다.”
중요한 일이니 오래 할수록 이득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을 미리 결정하도록 하지.”
드낙이 콧김을 내뿜었다.
‘목줄이 이미 채워져 있는데도 저렇게 나대다니. 진짜 미친놈은 미친놈이다.’
다만 그 생각은 이내 빠르게 진리에 도달했다.
세파리아스는 드낙을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 언뜻 보면 개소리처럼 들리지만 그게 드낙을 위한 길이었다.
세파리아스는 후방에 어떤 영향력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드낙이 있으니 걱정을 하지 않았다.
드낙은 그리 큰 욕심이 없다. 이는 중립신과의 결전에서 확인했다.
그러니 세파리아스는 후방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드높이기보다는 신제국의 적을 마련해 두는 편이 좋다. 적어도 신제국과는 협력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지배자들이 많아져야 했다.
세파리아스의 카리스마는 가만히 있어도 충성을 끌어낼 정도다. 그러니 일부러 불만을 끌어내야 했다. 그래야 후방이 드낙에게 결집된다.
지배자가 되면 알게 된다. 지역유지가 되어도 알 수 있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은 자신의 호감을 끌어내기 위해서 쓸데없는 일을 한다.
신좌에 올라서고, 악마의 권좌에 올라선 두 명의 초월자 중 누구를 선택하든지 마음대로 움직이는 광신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정신 이상자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수를 써놔야 한다.
세파리아스는 자신이 후방과 척을 지더라도 드낙이 확실하게 틀어쥐도록 할 생각이었다. 신제국의 땅 외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은 까닭도 이 때문이다.
혹여나 세파리아스가 신제국 밖을 노린다면, 거기에 감화되는 필멸자가 나올 수 있다. 그 필멸자가 의외로 ‘선동가’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괜한 일에 수천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드낙이 원하지 않든,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들을 싹 치워 버려야 한다.
‘종전식은 이를 위한 포석 깔기구나.’
아까는 자신도 흥분했지만 드낙은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도 깜빡 속을 정도이니, 다른 이들도 속았을 것이다. 세파리아스가 야욕을 드러낸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시간을 질질 끌려는 것도 세간에 신제국의 황제가 고집을 부린다고 퍼져나가게 할 생각이겠지.’
드낙이 작게 웃었다.
하여간, 세파리아스는 못 말리는 놈이다.
‘나한테 말해 주면 될 것을. 꼴에 자존심이라고.’
무슨 그런 것에 자존심을 세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그 뒤로 사사건건 부딪쳤다.
신제국의 황제답게 온갖 수작질을 부렸고, 정치적으로 다양한 곳에 접촉해서 흔들어 놓았다.
신제국은 많은 걸 소비하는 곳이었다. 동시에 많은 걸 생산하는 곳이기도 했다. 차원 전쟁을 위해서 차원의 다리를 건설하고 있었기에 가장 활기차고 열기가 들뜬 곳이기도 했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 제법 ‘광적’으로 일을 하는 이들이 다분히 많았다.
그 덕에 막대한 물자를 세금으로 구매하기도 했다.
준전시 상황이 꾸준히 이어지고, 막대한 이들이 그 부채를 함께 짊어지고 가고 있는 곳이 신제국이었다. 당연히 그 덕을 보는 곳이 많았다.
거래처를 끊는다는 소리에 동분서주하는 이들이 가득했다.
세파리아스의 말은 곧 국가가 나서는 일이기에 혼란을 주기에 효과적이다.
결국,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뒤에 종전식에 대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모든 지배자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파리아스의 흔들기에 제대로 혼이 빠진 모습이었다.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해라.”
의도를 알아도 행동을 해야 한다.
신제국은 항상 대체재가 존재했고, 거래하려는 세력이 가득하다. 결국 밥그릇을 지키려면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는 시늉을 해야 했다.
결국 돈 쓰는 국가가 갑이다.
“종전식은 지하 연합의 수도. 검은 돔에서 개최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발언하라.”
드낙의 말에 그 누구도 발언하지 않았다. 심지어 세파리아스도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종전식이 어디에서 개최되든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대장 쥐로부터 받은 것도 있으니.’
이 정도까지만 할 생각을 가졌다.
“종전식은 검은 돔에서 개최하겠다.”
대장 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찍찍.”
수많은 자원을 통해서 로비를 벌였고, 기어코 성공했다.
‘지하 연합의 평판을 올려야 하니까.’
지하 연합은 지하에 있기에 잘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검은 뿔 쥐 종족이 주종족이다. 부종족 또한 크놀, 고블린 그런 부류였다. 당연히 업신여겨지는데, 이번에 종전식을 통해서 그 편견을 부술 생각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