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4화
* * *
“일이 많기는 많았나 보다. 하하하!”
드낙이 쾌활하게 말했다.
게릴라 전쟁이 시작되며 마수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서 행성 자원을 호로록 짭짭 먹어댔고, 이를 처리해야 하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이름 그대로 ‘게릴라’를 상대해야 하는 전쟁이었다.
“그나마 마수들의 공세가 멈춰서 다행입니다.”
“그놈들도 빠르게 죽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드낙은 싱글벙글 웃었다. 정말 보고 싶었다.
‘마신(魔神)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측근 중 하나는 입맛이 쓸 것이다.’
테라 담당 마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걸 못 보는 게 정말 아쉬웠다.
“크흠. 초월자께서는 잘 지내신 듯합니다.”
“잘 지내기는! 내가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다녔는데.”
“그래도 삼 일에 한 번씩 꼭 휴식을 취하셨다고…….”
“케헴.”
이에 드낙은 헛기침을 했다.
남들은 휴일 한 번 즐기지 않고, 악착같이 업무에 시달렸지만 그걸 즐겼다. 사회계급의 최상위 포식자들은 월급에 상관없이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에 보람을 크게 느낀다.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재능이 있고, 남들보다 위에 있다는 우월감을 느끼는 건 크나큰 쾌감이다.
“그렇다고 내가 열심히 안 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여럿의 드낙을 만든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거기에 상위국의 국왕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그림자’를 다루는 드낙만 해도 큰 도움이 되었다. 지하로 스며들어서 닥치는 대로 마수를 학살했으니까.
가장 큰 공적자는 드낙과 세파리아스였다. 정신체로 움직이며 마수를 처단한 세파리아스 또한 대단히 근면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자신이 신제국의 주인이니까.’
주인 된 자가 가장 열심히 일하게 마련이다.
‘세파리아스는 분명 권능을 만들었을 터다.’
드낙은 세파리아스가 만든 결과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권능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파리아스가 지닌 단점을 제거하는 권능이라는 점이다.
‘세파리아스는 대인전(對人戰)에서 가장 강하다.’
일대일이야말로 세파리아스의 ‘재능’이 가장 크게 꽃을 피우는 분야였다.
다수와의 전투가 약하다는 게 아니다. 일기토에서의 세파리아스가 가장 강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상대적으로 다수와의 전투에서 약하다는 뜻이 된다.
황당하지만, 그만큼 세파리아스는 범위 파괴력이 대인전에서 보여주는 압도적인 면에 비하면 약한 면이 있었다. 워낙 강하기에 강함에도 약점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놈도 이를 인지하고 있겠지.’
그 단점을 제거하려면 ‘권능’밖에 답이 없다.
세파리아스는 그간 어떤 권능을 가질지 지지부진했었다.
‘영향무력(影響武力) 때문에 더더욱 시간을 끌었지.’
세상을 벤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벨 수 있다. 다만 그 범위는 한정적이다. 신격에 도달했기에 그 범위가 넓어졌겠지만, 한계가 존재했다.
‘그걸 한계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보이지 않는 참격이다.
세상을 속이는 재능을 꽃피운 드낙이 아니었다면 그의 목도 날아갔을 터였다.
세파리아스는 약한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정도로 무르지 않다.
‘잘 해결했으니, 신제국을 넘어서서 많은 땅을 돌아다니며 마수를 토벌했겠지.’
“상위국의 상황은 어떠냐?”
경박한 드낙의 말에 도렌 국왕이 묵례를 하며 답하였다.
“피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대신 물약을 비롯한 아티팩트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게 문제입니다.”
유일한 골칫거리가 바로 ‘돈’이었다.
“통화량을 뛰어넘는 씀씀이였으니…….”
드낙이 무겁게 말했다.
이 세계의 통화는 아직도 동화, 은화, 금화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폐처럼 쾅쾅 찍어서 내놓지 않는다. 어음을 통해서 최대한 받쳐주고 있었지만 종이 화폐는 도시에서나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어음을 많이 남발했다. 죽어도 종이 화폐를 쓰기 싫다는 놈들이 많아서다. 그렇다고 지폐 사용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산주의도 아니고.’
대신 믿음으로 어음으로 대신했다.
“그 일은 빠르게 처리될 것이다.”
드낙이 확신을 내어줬다.
이에 상위국의 국왕들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역시, 새로운 권속 악마는 일반적이지 않다던데, 그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머드 만티코어(Armored Manticore).”
세리안 불파겐 국왕이 그 이름을 언급했다.
“맞다.”
정보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상위국왕들에게는 확실하게 최상급의 정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상위 권속 악마, 아머드 만티코어에 대한 정보는 그들에게 확실하게 전해졌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권속 악마는 언제나 경계해야 할 일이지.’
드낙으로부터 잉태되어 나오기 때문에 그들의 충성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리 만티코어들이 학대당하던 놈들인데도 권속 악마가 되자마자 드낙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점이다.’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맹목적 충성을 하는 권속 악마는 다른 지성 종족에게는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드낙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것이다.
전쟁 세대가 투표권을 지닌 나라라면 전쟁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이를 생각한다면, 상위국왕들이 권속 악마에 대한 큰 경계심을 지닌 것도 이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머드 만티코어는 전란에서도 큰 공을 세웠지만, 그들은 전쟁 이후에 더 크게 활약할 것이다.”
구리 브레스를 사용하는데, 권속 악마까지 되었다.
한 개체가 어마어마한 구리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동화로 만들 수 있었다. 즉, 어음을 틀어막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
“평화가 찾아왔으니, 종이 화폐를 쓰게 만들 궁리를 하면 된다. 지금은 그렇게 알고 이해해라. 응?”
“예. 알겠습니다.”
동화의 화폐가 나오면 어음은 쉽게 해결된다. 은화나 금화의 가치가 더 커질 수 있었지만, 전쟁이 일어났었기에 이 정도 부작용은 감사하고 받아먹어야 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쓴다 해도 전쟁만큼 쓰지는 않는다.
드낙은 세리안 국왕을 바라보았다.
“많이 수척해 보이는데……. 별 다른 일은 없지?”
직접 다가가서 속삭이자 세리안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 문제죠.”
“힘들게 굴었어?”
“경험이 부족해서 생기는 실수뿐이었어요.”
게릴라 전쟁은 드낙의 아들, 딸들이 활약하기에 좋았다.
드낙의 슬하에 자식만 15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역시 잠자리가 최고야.’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사랑은 초월자가 되어서도 행복한 기분을 들게 하였다.
‘괜히 크리스마스에 그거 판매량이 피크를 찍는 게 아니지.’
잠자리를 해야 후손을 낳을 수 있다. 그렇기에 관계는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필수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드낙의 자식은 벌써 15명이 넘어갔다.
장남이라 할 수 있는 크레시미르와 막내의 나이 차이만 해도 띠동갑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드낙은 후손을 많이 낳고 있었다. 우월한 혈통을 많이 만드는 건 드낙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나중에 내 혈족이 천 명을 넘어서고, 만 명을 넘어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한 제국의 가문이라고 부를 정도가 된다.’
그 정도는 되어야 드낙이 마음 편하게 놀아도 테라가 제대로 기능할 것이다.
“나중에 다 좋게 돌아올 거야. 경험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 줘.”
“그럴 거예요. 차라리 레이시아 왕비가 편해 보일 지경이에요. 그녀도 나름대로 힘들겠지만…….”
전투를 수행하는 세리안에 비할 바는 못됐다. 그래도 실력 없는 자식을 레이시아 쪽으로 돌릴 수 있어서 그녀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전장을 보는 눈이 없으면서 야망에 활활 불타는 자식이 안 나오리라는 법은 없지.’
미술관을 운영하며 문화와 복지에 관심이 많은 레이시아 왕비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미대에 떨어져 세계 2차대전을 벌였던 히틀러.’
그런 히틀러가 들어갈 미술관이 있도록 조치해 두는 건 아주 중요한 임무였다.
‘식량 혁명이 가능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지.’
적은 노동력으로 압도적인 양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었다. 마법과 과학이 힘을 합친 결과였다.
‘현대처럼 기껏 만들고 돈이 안 된다고 갈아엎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다른 이들도 빠르게 등장했다.
가장 마지막에 세파리아스가 등장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10분 지각이었다.
“건방진 세파리아스.”
“조금 늦은 것뿐이다.”
“다른 사람도 바빠.”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지만 세파리아스는 쿨하게 무시했다. 자신의 가치가 ‘지각 10분’보다 못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랬기에 그저 하지 말라는 소리밖에 못 했다.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처 방안이 적었다.
“사과는 해라.”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회의를 시작하지.”
‘이 새끼가.’
뒷말을 굳이 내뱉어서 마치 자신이 회의를 주도한 것처럼 말했다. 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내가 참는다.’
드낙이 생각하는 테라의 미래에는 세파리아스도 있었다. 이런 거로 걷어찰 수는 없다.
“오늘 모인 건 당연히 종전 선언 때문이다.”
“마수들의 공세가 사라졌으니 그 시작점이 되었던 신제국에서 해야 한다.”
“결국에는 모두가 피해를 봤는데, 어찌 처음 맞았다고 종전 선언을 신제국에서 하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럴 거면 마수들이 공격 종착지였던 오션 오크의 땅에서 하는 것이 옳다.”
혈수병. 그게 게릴라 전쟁 속에 숨겨진 가장 강력한 비수였다.
“인어들이 그 역할을 맡는 게 좋겠지.”
“사실상 드낙 님께서 해결하신 것이니, 연합 도시에서 종전 선언을 해야 하오.”
수많은 이들이 제각각 의견을 냈다.
혼란이 목적인 것처럼 굴었다.
‘세파리아스는 못 먹는다. 이거지…….’
드낙이 속으로 웃었다.
신제국은 신격을 획득한 신인 세파리아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니, 반대로 세파리아스가 신제국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런 세력에게 종전 선언을 맡길 리가 없었다.
‘흠. 그걸 알고 세파리아스가 시작부터 땡깡을 부린 거구만.’
애초에 세파리아스도 종전 선언을 가져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할 일은 이 회의에서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으로 충분한 듯했다.
“가장 많은 전공을 올렸다. 일등 공신으로서 종전 선언도 하지 못한다면 누가 공을 세우고 싶어 하겠는가?”
‘혹은 아닐 수도 있다.’
그만큼 세파리아스의 적극성은 대단했다. 까딱 잘못하면 정말 신제국이 가져갈 것 같아 보였다.
웅성웅성!
순식간에 회의장이 시끄러워졌다.
“이 무슨……!”
“논리가 강하다…….”
정신체로서 마수 ‘정신’을 순식간에 죽이고 다닌 세파리아스였다.
그 권능의 뿌리에는 중립신과의 전투가 있었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정신세계에서 중립신을 꺾었다.
그의 첫 번째 권능은 ‘정신 죽음’이었다. 영향무력(影響武力)이 오직 재능으로 꽃피워진 것이라면, ‘정신 죽음’은 신격으로서 만든 첫 번째 기적이었다.
이를 통해서 ‘그림자 드낙’을 여럿 만든 드낙과 처리한 마수의 숫자가 비슷했다. 드낙이 3일에 한 번 놀지만 않았어도 크게 차이를 벌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너무 즐겼나…….’
누가 3개월 내내 게릴라 전쟁을 할 줄 알았는가? 3개월 동안 휴가 한 번 못 즐기는 건 말이 안 된다. 거기에 자신은 악마의 권좌에 앉은 초월체다.
현대인도 주5일이니, 뭐니, 주 56시간 도입이니, 뭐니 하는데 초월체 정도 되면 3일에 하루 정도는 놀아줘야 한다.
이 때문에 회의는 말 그대로 시장바닥이 되었다.
세파리아스는 자기 생각을 피력하고 팔짱을 꼈다. 더는 나서지 않겠다는 수동적인 태도였다.
‘놈.’
드낙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지금 세파리아스를 이기는 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인재가 없나.’
아쉬울 따름이다.
하긴, 세파리아스의 인생을 생각하면 저 정도로 성장하는 건 당연했다. 재능도 있었을 테고, 엘프의 음흉한 계략에 의해서 탄생한 혈통이기 때문이다.
‘저런 인간은 다시 보기 힘들겠지.’
수명과 상관없이 신의 권좌에 오른 것을 축복해 줘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하하, 우리 세파리아스. 많이 컸네?”
“뭐라?”
드낙의 말은 난리 통 속에도 정확하게 귀에 쏙쏙 박혔다. 악마의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세파리아스를 막아낼 사람이 없으니, 드낙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경박한 소리를 내는군. 초월체로서의 권위를 지켜라.”
“그렇게 권위를 챙기시는 놈이, 어째 동전 하나짜리 이권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드낙의 눈이 활처럼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