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3화
14. 종전식
인어와 드워프가 바위섬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 소식은 다종족 연합 전체를 뒤흔들었다.
‘강철의 비’라는 문화를 즐기고, ‘강철의 탑’을 쌓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드워프 제국이 바위섬에 정착한 인어와 함께하게 되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대단히 조용하고, 큰 이슈가 없어서 망정이지 드워프 제국은 다종족 연합의 강력한 세력을 일구고 있었다.
드워프 자체가 죽기 힘든 종족이고, 지금도 ‘발굴’되어 깨어나고 있었다.
드워프 제국이 있는 지하를 파고 캐다 보면 파묻혀서 죽은 것처럼 보이는 드워프가 발견된다. 하지만 그들은 정신이 잠들어 있을 뿐, 각성제를 먹이면 눈을 뜬다.
그 개체 수는 아직도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드워프의 탄생보다 발굴로 얻는 인구수가 많으니 말 다 했다.
그런 드워프들에게 강력한 우군이 생길 수 있는 일이 터졌다.
인어들은 쥐뿔도 없는 신생 종족이다.
오죽하면 드워프와 어울리는 종족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 ‘드워프의 손길’이 담긴 것을 거래하면서도 드워프와 깊은 관계를 맺은 이들은 없었다. 심지어 지하 연합조차도 드워프와 어깨동무를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 그 이상으로 드워프와 친하게 지내는 종족은 없었다.
그들 종족이 지닌 무시무시한 힘 때문이다. 우주 공간에서도 활동할 수 있기에 드낙으로부터 강철의 탑을 건축하게 되었다.
무식하게 쌓고 또 쌓아서 우주 공간에 닿는다.
그런 무식한 짓을 실제로 하고 있었다. 그 탑은 하중을 버티기 위해서 피라미드처럼 변하고 있었고, 드워프의 힘이 더욱 많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구조물로 변모하고 있었다. 무식한 짓이었지만 우주 공간에 있는 적을 타격하려면 강철의 탑이 필수적이다.
틀딱 드워프와 아기 인어의 조합은 강력했다.
당장 바위섬에서 드워프들은 크게 대우를 받았고, 인어들로부터 해공석을 포함해 여러 물품을 교역하기 시작했다.
그 시너지는 상상을 초월했지만, 딱히 견제할 수가 없었다. 지금 드워프와 인어를 견제하다간 드낙에게 호되게 당할 것이 분명했다.
게릴라 전쟁 이후로 드낙의 활동력은 사상 최고점을 찍고 있었다.
‘일단 전쟁을 끝마쳐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일을 벌일 수 있다.
“찍찍. 우리는 게릴라 전쟁의 종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게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께서 원하는 일이시다.”
뿔 쥐들은 눈치도 좋았다. 드낙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악마의 핏줄과 그릇으로 드낙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드낙을 배신할 리도 없었다.
지하 연합의 기준이 그렇게 되자 다른 이들도 더욱 게릴라 전쟁에 임하였다.
그로부터 3개월 하고도 18일이 지나고 나서야 마수들의 공세가 사라졌다. 마수가 너무나도 빨리 죽어간다는 걸 깨닫고, 공세를 멈춘 것이다.
테라의 상황은 알 수 없어도 자신들이 만든 마수들의 죽음은 알 수 있었다.
마수(魔獸) 미노타우르스가 뒤늦게 공세를 멈춘 건 테라와 마신들의 차원이 대단히 멀리 있어서였다.
“드디어 종전(終戰) 선언을 할 수 있겠다.”
드낙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근 3개월간 드낙은 열심히 마수만 때려잡았다. 그로 인해서 얻은 업(業)은 많았지만 사실 크게 욕심이 나지 않았다. 테라의 종족들이 주는 업의 양과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종족신을 뛰어넘어, 행성을 지배하며 오션 오크를 제외한 모든 지성 종족으로부터 업(業)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게릴라 전쟁이 무려 3개월 넘게 지속하였으니, 드낙이 속으로 안도할 만했다.
‘악마의 권좌에 오르면 재미나게 쉬면서 인생을 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늘 위에는 또 하늘이 있었다.
‘그래도 막아냈다.’
마수들의 무분별한 행성 자원 약탈이 드디어 멈췄다.
‘우리가 놈들을 막아낼 획기적인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사실 그냥 무식하게 대처한 것뿐이었다. 그림자만 다룰 줄 아는 또 다른 자신을 여럿 만들어서 대처한 것만 해도 정말 무식한 짓이었다.
‘다시는 못 할 짓이지.’
마수들의 공세가 멈추자 바로 다시 자신의 몸으로 회수했다. 제법 부담이 되었다. 여럿으로 나누었다고 해서 드낙이 드낙이 아닌 것은 아니었기에 모두 공유되고 뒤섞인 탓이다.
‘여러 번 할 짓은 안 된다.’
마수들이 물러가 줘서 감사할 지경이었다.
드낙은 바로 ‘강철의 비’ 같은 멋들어진 문화를 즐기지 못했다.
종전 선언은 그냥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없는 일이다.
먼저 그 회의가 개최되는 곳부터 정해야 했는데 거기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곤란할 따름이지.’
게릴라 전쟁은 신제국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니 종전 선언도 신제국의 수도에서 해야 한다.
그럴듯하다.
드낙이 자신의 본거지로 삼은 ‘연합 도시’에서 종전식을 개최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했다.
어찌 되었든 드낙이 동분서주하면서 큰 역할을 했으며 종족들 또한 그가 없었다면 하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결정되는 곳의 종족이 크게 부흥하게 되는 것은 분명했다.
2020년에는 올림픽은 적자 도시 만들기였지만 88올림픽 때는 아니었다. 그때는 올림픽은 엄청난 수혜를 일으키고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수의 게릴라 전쟁은 사람들의 일상까지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전쟁이 끝났다. 그러니 가볍게 끝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시대를 알리듯이…….’
크게 해야 했다.
어디서 회의해야 하는 것조차도 신경전이 대단해서 드낙의 ‘연합 도시’에 모든 지배자들이 모였다.
마수의 공세가 멈췄다는 것을 확인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걸 확인했으니, 이런 회의가 개최될 수 있었다.
‘속앓이도 많았지.’
한 달이면 이를 종식시킬 수 있다.
시일이 딱 떨어졌고, 자리가 마련되었다.
연합 도시는 처음에는 크게 시선을 모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저 드낙과 그의 자식들이 사는 곳이 되었다.
자식 중에서 장성한 이들은 다른 곳에서 활약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의미가 퇴색되어 조용한 도시가 되었다. 엘프들을 열여덟 곳의 도시에 나눠서 배치한 것도 컸다.
연합 도시는 더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는 곳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드낙이 거주지가 있는 곳에 불과했다.
‘권력을 나누었기 때문이지.’
초월자의 격에 올라섰다.
더는 다른 이들의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세파리아스 불파겐 또한 신격을 획득했지만, 그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전에는 의심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드낙을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자신 가문의 이름을 쓰고 있었고, 불파겐의 후손을 낳았다. 그의 딸을 부인으로 두고 있었으며 테라에 남아서 든든하게 자신의 등 뒤를 지켜줄 사위였다. 거기에 자신의 제자이기도 했다.
‘의외로 날 신경 써주고 있다.’
세파리아스가 차원 전쟁을 일으켜서 다른 차원으로 공세를 취하고 있는 한 둘이 부딪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달라서 할 수 있는 협력이었다. 그 협력은 강철과 같다.
그렇기에 드낙은 자신의 권력을 양도했다.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가장 병신 같은 일이지.’
상식적으로 핵심적인 일은 내가 하는데, 보스는 저 새끼다? 칼로 찌르고도 남는다.
회사를 나와서 자기가 회사를 차릴지도 모른다. 나 혼자서 회사의 핵심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고, ‘진짜’ 비즈니스를 한다면 굳이 월급을 받고 일할 필요가 없었다.
그걸 사장은 ‘배신’이라고 여기겠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또 다르게 마련이다.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면, 사회가 만들어지지도 않지.’
중장갑으로 무장한 10만 군대를 상대로 100m짜리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해서 단번에 죽이는 광경과 같았다. 애초에 오러 블레이드가 있는 세상이면 그런 군대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
너도나도 소드 마스터만 키우고, 군비는 최소한으로 줄였을 것이다. 그 돈으로 로비를 해서 적국의 소드 마스터를 가문 채로 옮겨올 테니까.
소드 마스터가 있는 세상은 미국의 금권정치(金權政治)처럼 로비스트가 최고로 대우받는 세상이 되어야 정당하다.
말 그대로 정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정치에는 돈이 많이 필요한 법이다.
잠깐 딴생각에 잠겨있던 드낙은 이내 생각했다.
‘아, 양판소 읽고 싶다.’
대륙전쟁 속에서 살아남고, 악마의 권좌에 올랐다. 그런데도 아직 사방에는 적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당장 올해만 해도 게릴라 전쟁으로 테라는 홍역을 앓아야 했다.
막대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소모되었다.
그 소모된 양만 하더라도 5년은 지나야 회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전쟁의 참혹함은 범인의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비효율적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
고통받는 건 가진 자들이 아니라, 못 가진 자들이었다.
게릴라 전쟁으로 인하여 굶어 죽는 이들이 수백 명에 달했다.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교통의 발전이 아직 원활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었다.
‘쪽팔려서 식량 배급소에 가지 않아 자식을 굶겨 죽이는 놈까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으니.’
드낙은 헛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테라는 아직도 많은 것이 부족했다. 고작 어린애조차도 복지의 따뜻한 땅에 서도록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도 그랬지.’
외쳐야 도와준다.
요청해야 도와준다.
그런 거지 같은 복지 시스템으로 할 수 있는 건 실로 많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어린이를 돕지는 못한다. 그들은 요구하지 못하고, 고함지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걸 바꿀 수 있을까? 오크들처럼 공동 육아를 해야 할까?’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건 드낙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권력의 양도가 필요하다.’
드낙은 수많은 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 왕은 드낙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들의 명령으로 공작을 삼고, 백작으로 삼는다.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권력이 쏠리게 된다.
드낙의 눈치를 보던 이들도 이내 그들의 눈치를 보게 변한다. 드낙이 건들지 않아서다.
그게 드낙이 만든 세상이다. 자신이 없어도 충분히 굴러갈 수 있는 세계가 드낙이 원하는 바였다.
그가 원하는 바를 지배자들에게 말하면 지배자들의 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을 최대한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시어머니처럼 굴지 않는 게 중요하지.’
게릴라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드낙은 그렇게 해왔다.
‘뉴에이지 시티’를 제외하고는 드낙의 입김이 들어간 곳은 거의 없을 지경이다. 드낙이 원하는 바를 알아서 행하며 자신들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건 종종 드낙이 원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지만 드낙은 꾹 참았다. 책임을 지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는 평생 일만 하다가 죽게 될 것이다.
‘놓아야 한다.’
놓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실력 있는 이들은 왕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드낙이 한 소리하면 자신의 꿈이 박살 나 버리니까. 그렇게 되면 그 누가 드낙을 위해서 왕이 자리에 앉고 싶어 하겠는가?
자기 기분 내킬 때만 나서서 싹 다 정리하니, 뭐니, 판을 엎네, 마네 하며 쿨병 걸린 짓은 어리석은 춘몽에 불과하다.
전쟁만 아니었어도 드낙은 그렇게까지 전 종족을 들쑤시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실각(失脚)한 지배자가 없다는 점이지.’
삐끗해서 낭떠러지로 떨어진 지배자가 하나도 없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모두 재능이 있는 이들을 앉혀놨기에 가능했다. 그게 큰 위안이 되었다.
‘앞으로도 두둑하게 챙겨주고, 테라의 운영을 맡긴다.’
거기서 얻는 건 바로 업(業)이다.
‘신격의 발아(發芽).’
악마와 신.
두 가지의 초월격을 얻게 되면 드낙을 상대로 덤빌 놈은 없을 것이다.
‘더 많이 태어나고, 더 많이 활동하고, 더 많이 죽어가라…….’
덧없는 인생. 원 없이 누리고 가기를 바랐다.
생각에 젖은 드낙은 홀로 회의장에 있었는데, 곧 한 무리가 나타났다.
종족 회의다.
혼자서 올 리가 없었다. 하나같이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요약했음에도 분량이 제법 되어서 여럿이 나눠서 서류를 챙겨야 했다.
가장 먼저 온 것은 상위국(Superior Country)의 국왕들이었다.
사실상 전쟁은 끝났지만 이를 공표하지 않았다.
종전(終戰)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었다. 당장 국왕뿐만 아니라 지배계층 모두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피곤함에 절어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