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5화
가슴이 웅장해지는 순간이었다.
‘아쉽다.’
드낙은 아쉬움을 느꼈다. 저 위대한 모습에도 그는 실로 씁쓸함을 느꼈다.
‘게릴라 전쟁에서는 쓸 만한 놈이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거대한 덩치의 테라의 마수를 때려잡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는 대마법사인 청기사왕과 적기사왕도 그러했고, 세파리아스의 정신체도 그러했다.
땅속으로 숨어들어 가서 행성 자원을 갉아먹는 마수의 발러데르 또한 ‘여럿의 드낙’이 지닌 그림자의 힘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업(業)을 소모해서 만티코어를 변모시키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뭔가 특별한 걸 원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물론 충분히 거체화되어 질주하며 행성 자원을 집어 먹는 테라의 마수를 때려잡을 수는 있었다. 비행이 가능하기에 멀리 나아갈 수도 있었고, 갑피를 생각하면 방어력도 좋아서 쉽게 죽지 않는다.
여러모로 어디든지 투입하기 좋아 보였다.
‘뭔가 혁신적인 건 아니지.’
악마와의 싸움에서나 쓸 수 있어 보였다.
“나와라. 가서 테라의 마수를 죽여라. 내 피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아머드 만티코어(Armored Manticore)는 그대로 빠져나갔다. 몸이 작은 디아볼로스와는 다르게 드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육체 자체가 악마의 힘.’
덩치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악마적인 힘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드낙만 해도 덩치가 커지면 마력 출력량부터 시작해서 온갖 초월의 힘을 단번에 방출할 수 있었다.
거대한 화력에 압살당하지 않으려면 상대 또한 덩치를 키우는 수밖에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큰 그릇에 담은 물을 쏟아붓는 것과 작은 그릇에 담은 물을 쏟아붓는 건 또 다르다. 작은 덩치로 큰 힘을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을 자르고, 세상을 속이는 것 같은 괴이한 법칙이 스며든 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 덩치는 곧 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머드 만티코어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며, 강력한 권속 악마이기도 했다.
드낙은 자신의 피가 스며들어 있는 아머드 만티코어의 모든 것을 훑어보았다.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관계를 못 하잖아?’
생식기능이 존재하지 않았다. 황당했다. 이는 곧 종족 번식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그럴 만도 하지.’
업의 소모 없이 아머드 만티코어를 만드는 건 욕심이라 할 수 있었다.
‘괜히 악마들이 행성을 파괴하고, 차원을 침공하는 게 아니구나.’
디아볼로스들은 덩치가 작았기에 가능해 보였다. 덩치가 커지면 생식기능을 자연히 잃게 되는 듯했다. 권속 악마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덩치가 크면 불구다.’
드낙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고자는 불구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항상 괄약근을 틈틈이 조여야 할 것이다.
‘게릴라 전쟁에 꺼낼 카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카드도 아니다.’
고심 끝에 드낙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구리 만티코어를 권속 악마로 삼기로 했다.
‘내가 바다로 향한다면, 테라의 마수를 막을 필요가 있다.’
아직도 테라의 마수가 왜 생기는지. 어떻게 그렇게 큰 덩치를 지녔음에도 마수의 기운을 가지지 못한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추적의 드낙이라고 해도 ‘그림자 편린’을 아직 마주하지 못했다. 단순히 운이 없어서다. 테라의 땅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아머드 만티코어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물량 공세나 다름없었다.
‘업(業)을 모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수의 음흉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게릴라 전쟁은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었다. 이를 막으려면 많은 소비를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드낙은 빠르게 아머드 만티코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힘을 거부하지 않았다. 짐승이고, 괴물이었기에 당연히 힘을 원했다. 강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드낙을 아버지라 부르며 충성하게 되었다. 강력한 충성이다.
드낙의 피가 그들에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드낙의 피는 악마의 피며, 초월의 힘이 깃들어 있다.
수많은 아머드 만티코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대단히 독립적이었다.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실시간으로 원하고자 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드낙이 허락한 지식이라고 해도 능히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만 그 대가로 그들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 피해조차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였다.
사람으로 치면 근육통이다.
그들은 빠르게 전선에 투입될 수 있었다. 날개가 네 장이 되었음에도 둔하기 짝이 없었지만, 속력 자체는 좋았다.
“공장은 유지한다. 만티코어를 계속 생산해야 하니까.”
만티코어를 유지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그들이라고 수명이 무한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구리 또한 여전히 필요했다.
드낙은 공장에 있는 만티코어의 절반을 아머드 만티코어로 만들었다. 아머드 만티코어가 되면 더는 생식 활동이 불가능하기에 모든 만티코어를 권속 악마로 삼지는 못한다.
그렇게 해서 만든 아머드 만티코어의 숫자는 1,800마리에 달했다.
“쿠오오오오오―!”
아머드 만티코어가 포효했다. 구름 아래에서 날갯짓을 하며 직선으로만 무식하게 날아가던 그의 눈에 테라의 마수가 들어왔다.
놈은 산 정상의 그늘진 곳에서 굴을 파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서 지하 깊은 곳으로 들어갈 생각인 듯했다. 근처에는 사람도 살지 않았으며, 그 어떤 지성 종족도 보이지 않았다.
햇빛에 그 몸을 뒤덮고 있는 갑피를 볼 수 있었다. 척 봐도 단단해 보이고, 새빨갛고 검었다. 윤기는 나지 않았고, 무광택의 빛바랜 검붉은색이었다.
아머드 만티코어의 포효에 테라의 마수는 수많은 촉수를 이용해 더욱 빠르게 땅을 파고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수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상상 이상의 속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머드 만티코어는 끝까지 멈추지 않았고, 네 장의 날개 또한 모두 접었다.
초신속이라 말할 정도로 끔찍한 가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아머드 만티코어가 굵직한 앞발을 들어 올렸다. 네발 모두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도망치고 있는 테라의 마수에게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테라의 마수는 도망을 선택하지 않았다.
하늘의 것은 지하로 들어가면 약해지고, 지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장점이 갉아 먹힌다.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강행했다.
부상을 입더라도 끈덕지게 내부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꽝!
거세게 부딪쳤다. 무지막지한 충격이 땅을 울리고, 공기를 때렸다.
테라의 마수의 몸이 충격파로 인해 거세게 출렁거렸다. 그건 아머드 만티코어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어떤 경직 시간도 거치지 않고 바로 입을 쩍 벌렸다.
발끝은 저려와서 움직이지 못해도 입은 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갑피. 거죽. 살덩이. 근육. 뼈.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진 장기는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악!
브레스가 입에서 쏟아졌다. 테라의 마수를 노렸다. 구리 만티코어의 브레스와 같고, 그저 거대해졌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다만, 상위 권속 악마가 되면서 초월의 힘이 육체에 깃들었기에 브레스의 성질 자체는 대단히 악마적이었다.
테라의 마수가 지닌 초월의 힘과 부딪쳤고, 순식간에 상쇄 현상이 일어났다.
테라의 마수는 무지막지한 재생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행성 자원을 먹기 위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오래 버티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초월의 힘과 초월의 힘이 부딪쳐 자연히 재생능력이 반감되었다. 육체 자체에 깃든 재생력은 그대로였지만 초월의 힘을 소비하여 재생하는 기능이 떨어졌다.
게다가 구리는 끓어오르며 매캐한 독가스를 내뿜었다.
치이이익!
테라의 마수의 단단한 촉수 피부가 타기 시작했다. 피와 재가 뒤섞이며 재생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쿠웅!
아머드 만티코어가 더욱 덤벼들며 몸을 부딪치며 부비적거렸다. 그것만으로도 테라의 마수는 순식간에 반쯤 뒤집혀 버렸다. 촉수가 아머드 만티코어의 몸을 속박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머드 만티코어는 무식하게 밀어붙이며 끝없이 브레스를 토해냈다. 촉수가 끊어지면 다시 숨통이 트였기에 만티코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꾸직!
낙하의 피해로 움직이지 않았던 앞발로 촉수를 짓밟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촉수를 조각냈다. 거칠게 한 걸음 더욱 나가자 테라의 마수가 밀려서 자신이 파고 있던 구멍의 벽에 부딪혔다.
“크허허헝!”
만티코어가 브레스를 뿜는 아가리로 포효하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숨을 들이쉬더니 이내 또 구리 브레스가 쏟아져 나왔다.
용광로처럼 달구어진 구리 브레스가 바닥에 쏟아지고,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라 왔다.
그 달구어지고 끓어오르는 구리는 테라의 마수가 지닌 피부에 들러붙고, 그 피부를 태워 버렸다. 막강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빠르게 소실되어 갔다. 실로 악마적인 브레스였다.
테라의 마수는 그제야 아머드 만티코어를 공격했다.
속박하여 조여서 만티코어를 물러가게 하려고 했지만 이게 실패했으니 더 확실한 공세로 돌아섰다. 그렇게 피해를 입었음에도 건재했다. 그간 훔쳐먹은 테라의 자원이 많아서다.
쿠구궁……!
날카로운 촉수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동굴은 대형급의 괴물 두 마리가 날뛰기에 좁았고, 결국 흙이 무너지고, 돌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도 두 마리의 괴물은 서로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콰아아아아아!!”
만티코어의 구리 브레스는 상상 이상으로 오래 뿜어졌다. 그것이 테라의 마수에게는 가장 큰 패착이었다.
꽝!
만티코어가 살짝 몸을 들어 올리며 앞발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테라의 마수는 엉망으로 휘청거렸다.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서 생긴 일이었다.
한 마리는 도망가려고 했고, 다른 한 마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서 죽기 살기로 싸우고자 했다. 똑같은 수준이라도 한쪽의 승리를 점칠 수 있었다.
싸움은 3시간 이상으로 길게 늘어졌다.
테라의 마수는 끝까지 반항했고, 놈의 심장이나 머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구잡이로 짜깁기된 생명체.
그것이 테라의 마수였다. 때문에 지형이 완전히 변하고 나서야 죽었다. 거품을 내며 끓어오르는 구리 브레스에 의해서 시체도 남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었다.
망치로 부수면 쩍쩍 갈라질 정도였다.
겨우 한 마리를 죽인 아머드 만티코어가 조금 자리를 옮겨서 주저앉았다. 그의 숨은 거칠었고, 몸 곳곳의 갑피는 균열이 간 곳도 없었다. 어떤 곳은 뜯겨 나가 있기도 했고 뚫려서 피가 흐르는 곳도 있었다.
테라의 마수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상위 권속 악마.
그것도 기본 베이스가 만티코어인 존재와 격전을 치를 정도로 강대한 존재였다. 그런 상위 군속 악마를 1,800마리나 만든 드낙이 얼마나 많은 업을 받아먹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테라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건 드낙의 인식마저도 초월했다.
기득권층이 싸우지 않는 세상인 것만 해도 발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기득권의 재산 축적을 제한하며 더 많은 사업에 뛰어들게 한 것이 드낙의 세상이었다. 엘리트들은 말 그대로 달리는 경주마처럼 끝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크릉. 크릉.”
아머드 만티코어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푸른 하늘을 날던 새가 만티코어의 새하얀 갈기에 내려앉았다. 대단히 푹신한 갈기였다. 새가 갈기를 부리로 쪼았다.
단단히 들러붙어 있는 갈기는 뽑히지 않았지만 몇몇 갈기는 손쉽게 뜯겼다. 계속해서 갈기가 자라고 있어서다. 털을 새 한 마리가 가져가기 시작하자 다른 새들도 뽑아갔다.
아머드 만티코어의 털은 그만큼 양질이었다. 자신의 새 둥지에 장식을 하기 위해 뜯어가는 것이다.
수많은 새들이 아머드 만티코어의 백색 갈기를 노리고 이곳저곳 들쑤셨다. 하지만 전투를 치른 아머드 만티코어는 세상 모르게 꿀잠을 자고 있었다.
그가 일어났을 때, 그는 땜빵 가득한 갈기를 지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