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3화
드낙은 엘프들이 행한 것을 마주했다.
마신의 기운. 그 간사한 힘이 테라에 퍼지고 있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게릴라 전쟁이 계속된다면 제법 그 양이 많아지고 행성에 점점 축적될 것이 분명하다.
게릴라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는 마수들의 침공 자체가 멈춰야 한다. 상대가 멈춰야 했기에 그전까지는 이렇게 계속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짜증 나는 일이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난 후발주자니까.’
모든 경기가 그렇다. 선두주자가 치고 가고 난 다음에 스타트를 끊으면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시작 지점이 달랐다.
‘금수저 생각나네. 씨팔.’
드낙은 오랜만에 욕지거리를 날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세상이란 건 왜 이 지경인지 모르겠다. 언제나 자신은 선두주자가 될 수 없었다.
정말 거지 같은 일이었다.
뭘 해도 뭘 해도 이미 그곳은 누군가가 단단히 박힌 돌이 되어있었고, 자신은 그저 굴러들어온 돌에 불과했다.
게릴라 전쟁이 그걸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드낙의 다종족 연합 혹은 테라가 신대륙이라면 마신은 그 신대륙을 침공한 모험가나 다름없었다. 원주민을 몰아내고 미국을 세우는 것과 같다. 그만큼 막대한 자원 차이가 있었다.
‘이 땅에서 죽는 마수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그런데도 마신은 계속 보내고 있지. 심지어 그는 여기에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암담하지만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가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 중요했다.
‘적당한 교두보.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는 거지.’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즉, 진짜로 쳐들어올 생각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게릴라 전쟁만 해도 드낙으로서는 발목 덫에 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테라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
검은 돔의 마수 군단이 수집한 정보는 상당할 것이다.
‘더욱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수많은 이들에게 권력을 양도하고, 수많은 직책을 만들어 사회 자체를 발전시켜야 했다. 이를 수많은 권력자에게 충분히 인지시켜야 했다.
‘게릴라 전쟁이 끝나면 공표해야겠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었다. 극단적인 효율성으로 게릴라 전쟁을 이어나갈 정도는 되어야 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다치는 이들이 매일 3,800명 나오는 상황 속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에 한하면 1,000명일 수도 있고, 사망자가 없다는 것이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확실하게 테라의 국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초월자시여? 보고 있습니까?”
“그래. 잠깐 딴생각에 빠져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훌륭히 지어냈다. 하하하.”
드낙이 웃었다.
이처럼 놀라운 것을 봤으니, 더 많은 것을 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백금 마법진의 성질 변환이 어떤 기능을 가진다고?”
“균열을 만들어 냅니다. 보통 힘든 것이 아니기에 백금을 쓰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찬란한 지우베르투가 손으로 윗부분을 가리켰다.
강철 마법진에서 나온 마력은 오직 엘프 서클 시티에서만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다. 그리고 이내 백금 마법진에 마력이 접촉했고, 곧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하얀색.’
균열이 일어나며 마력 전체가 흰색으로 변해갔다.
“균열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변형이 되기 쉽습니다. 공정을 하기 쉽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내 백금 마법진이 위로 올라가고, 다른 마법진이 옆에서 서서히 움직여서 자리 잡았다. 무지막지하게 컸다.
“이번에는 특성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마신의 기운과 마주하면 상쇄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희는 안티 데블(Anti Devil)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균열을 낸 이유가 이 특성을 더 손쉽게 부여하기 위함인가?”
“예. 이 마신이 힘이라는 것이 실로 괴이하여 그 힘과 반응하여 반발력을 지니는 힘을 만드는 것 또한 막대한 힘이 소모되기 때문에 그 특성을 부여하기 전에 마력을 변질시켜서 그 특성을 받기 쉽도록 미리 기본 작업을 해둬야 합니다.”
안티 데빌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고 해서 또 공정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거대한 마력 덩어리를 작게 가공하여야 합니다. 소분(小分) 작업 또한 또 다른 힘이 필요합니다.”
큰 마력을 나누는 것 또한 공정이라 불릴 만했다. 마력을 다루는 일이기에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툭 튀어나와 있는 정교한 벽들. 단순한 장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이 빛을 발하며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각 벽에서 변형되고 특성이 만들어진 마력을 흡수합니다. 이다음 공정은 옆으로 가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세 개의 방에서 따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분 작업은 그만큼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일이었다.
드낙과 지우베르투는 그곳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벽이 튀어나와 있었지만 다른 점은 튀어나온 구리로 된 벽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바닥까지 튀어나와 있다는 점이었다.
그 바닥 아래로 이어진 파이프 같은 구조물은 다시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
중심에는 거대한 가마솥이 있었다.
“신기한데. 어떻게 과정이 이루어지지?”
“구리 벽기둥이 마력을 소량으로 채취하고, 이 가마솥으로 보냅니다. 가마솥에는 특수한 물약이 담겨 있고, 그 물약이 마력을 담게 됩니다.”
그제야 완성된다.
사실 물약으로 만들지 않으면 몇몇 공정은 필요가 없다. 대량 생산을 위해서, 소량을 수많은 곳에 퍼뜨리기 위해서 만든 공정은 드낙에게 큰 메리트가 없었다.
“대단하다.”
드낙이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
“모두 테라를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마수가 죽으면 마신의 기운이 퍼집니다. 그걸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하다.”
그 대답에 드낙은 만족했다. 이런 이들이 많아질수록 테라의 미래는 밝았다.
‘엘프들의 도시를 더 많이 지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엘프들의 부흥이야말로 최고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걸 제어하고 견제하는 것이 힘들어서 반쯤 포기한 것이었는데, 이런 성과를 내니 절로 사람을 뽑아서 관리토록 하게 하고 싶었다.
‘엘프들로 엘프들을 통제하는 건 지금도 하고 있지만, 그보다 외부 고문을 뽑아야겠다.’
결코, 방심하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하는 건 시기에 맞지 않는다.’
책이 잡혀야 벌을 줄 수 있었다. 엘프들은 지금 잘하고 있었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 고문을 세워야 했다. 그래야 명분이 있다. 지금 드낙이 엘프들에게 ‘고문’을 파견한다면 벌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야 누가 날 위해서 일을 할까.’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는 어둠이 그림자처럼 그에게 따라붙겠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잘못도 하지 않은 엘프에게 채찍을 때리는 건 옳지 않았다.
결국, 생각으로만 끝낼 수밖에 없었다.
‘엘프들의 지배자, 18인의 벨룸 퓨에르들도 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생각보다 더욱 간사해졌다.
“이게 바로 마신을 기운을 반발하는 힘.”
“효율성은 낮습니다. 마신과의 전투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일반 마수에게도 공격 마법을 날리는 것이 더 이로울 것입니다.”
“말 그대로 찾기 힘들고, 없애기 어려운 마신의 기운만을 처리하기 위한 물건인가.”
“예. 아까 말씀드렸지만, 백금 마법진을 통해서 마력에 균열을 냈습니다. 이는 곧 대기 중의 마나와도 잘 맞아떨어져서 대륙 모든 곳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래.”
드낙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에 여덟 번째 도시 하트라(Hatra)의 시장이자, 지우베르투(Gilberto)는 입을 다물었다. 인기척도 내지 않았고,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효율성이 나쁘다.’
드낙은 확실히 이를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힘 자체를 가공하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연구한다면 내 피. 악마의 피도 확실히 가공할 수 있을 것이다.’
물건이다.
‘하위, 중위 권속 악마에는 쓸 수 없다.’
효율이 높아진다면 생각을 바꿀 수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버렸다.
‘성질을 변환하면 무조건 효율이 안 높아지니까.’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상위 권속 악마에는 훌륭히 적용할 수 있다.’
“당장에라도 하고 싶은데…….”
드낙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하긴 하고 싶은데.’
악마의 피를 가공하여 더 강한 힘을 지니게 한다. 그건 실로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좋은 상위 권속 악마를 확보한다면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쉬워질 것이 분명하다.
무력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후발주자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군사력이 절실하다. 당장 마신만 해도 시답잖은 짓거리를 하며 행성 자원이나 빨아 처먹고 있었다.
‘강한 놈이 이런 짓거리까지 하고 자빠졌는데, 군사력을 안 높일 이유가 없다.’
정말 지독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있었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걸 하고 싶지 않다.’
실로 욕심쟁이의 심보였다. 제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수십 년간 화력발전소의 효율성 하나 이겨내지 못한 것이 인류의 과학이란 놈이다.
그런 위대한 과학도 그러할진대, 효율적인 것만 먹고 싶어 하는 드낙의 심보는 고약했다.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드낙이 자신의 손바닥을 뒤집었다.
발상의 전환. 그걸 하려고 노력했다.
손바닥 뒤집는 건 쉽다. 하지만 정말로 현실의 문제를 발상의 전환으로 깨부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굳이 악마의 피를 가공할 필요가 있나? 요는 상위 권속 악마가 강한 놈이면 되는 거잖아.’
드낙은 디아볼로스들을 떠올렸다. 엘프들이 악마의 피를 받아 마시고 단번에 강력한 악마 권속이 된 경우였다. 즉, 이미 종족값이 놈은 놈들을 권속 악마로 삼으면 드낙이 지닌 악마의 피가 강하든 약하는 아무 상관 없다는 소리다.
변명이나 다름없었지만, 드낙은 빙긋 웃었다.
‘악마의 피는 가공할 필요가 없다. 초월체의 힘인데 더 강해져 봤자 효율성만 떨어질 뿐이지.’
그걸 재확인하는 시간이 됐다.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겠지.’
드낙이 음흉하게 웃었다.
이미 자신을 여럿으로 만들어서 그림자 드낙이 마수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세파리아스만큼 죽이는 걸 좋아하는 놈도 없다.’
그는 전공 욕심도 대단하다. 자신의 시민들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될 듯했다.
“앞으로도 열심히 보급하도록 해라.”
“예. 저, 그런데 벨룸 퓨에르 내부에서 논란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머메이드……. 인어들에 대한 것입니다. 바다에 마신의 질병이 퍼져나가고 있는데, 오크들 때문에 쉽게 도와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크?”
“지하 연합이 인어들과 크게 함께하게 되면서 자연히 오크들의 경계심이 커진 상태입니다. 그들은 결국 바다가 새로운 집이 되지 않았습니까.”
인어들을 도와주는 척을 하며 최소한의 지원만 하면서 명분만 챙긴 엘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명분이 될 만했다. 이를 통해서 엘프들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드낙에게 간사한 혓바닥을 놀렸다.
‘지하 연합과 인어가 함께하게 되면 우리로서도 버겁다.’
드낙이 해결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 내가 한 번 확인해 보겠다.”
“감사합니다.”
그는 엘프 도시에서 하루를 머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상상 이상의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게릴라 전쟁 때문에 무기한 연기에 들어간 인형 전쟁을 오랜만에 할 수 있었다.
‘전쟁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흥해야 할 문화인데…….’
일단 시민조차도 전술적 지능을 가지고 있게 하는 건 드낙의 꿈이기도 했다.
‘영국에서 장궁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궁술 대회를 연 것도 이와 같은 논리지.’
대회는 훌륭한 병사 교육이 될 수 있었다.
‘전술가 꿈나무들을 키운다.’
모든 종족이 재미를 붙이도록 전 종족의 강철 인형을 만들어야 했다.
‘최대한 빨리 게릴라 전쟁을 끝내야 한다.’
드낙은 빈둥거리면서 하루를 보낸 뒤에 지하 연합을 찾았다. 그곳에 들렀다가 바다로 향해서 인어들과 오랜만에 마주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인어들을 너무 밖에 내놓고 있었지.’
오크들과의 조율도 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