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1화
수준이 낮은 그림자 드낙의 목표는 테라의 마수가 아니었다.
‘그건 세파리아스한테 맡겨야지.’
드낙의 목적은 벌레와 토양 그 외의 모든 것을 잡아먹는 마수 기생충들이었다. 보잘것없는 놈들이었기에 차원 이동도 쉬웠다. 굳이 차원 항해나 차원 다리를 건설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조잡한 놈들이다.
문제는 그런 놈들이 테라의 행상 자원을 빨아먹고 덩치가 커진다는 점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드낙이 여럿이 되어야만 했다. 테라의 종족은 아직도 진행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물론 총력전을 선포한다면 승기를 가져갈 수 있다.’
전략적 가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건 그냥 기분이 좋을 뿐이다. 애국 국채를 구매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겨우 그 정도의 기분이 나는 일이다.
그래서 선택하기 꺼려졌다.
행성이고 나발이고 인간 입장에서 모든 경제를 쏟아붓고, 모든 청년을 쏟아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하면 성장이 멈추니까.’
그게 바로 마신과 마신의 세력이 원하는 일이었다. 적이 원하는 의도에 따라가 주는 건 바보 같은 지휘관이다. 고로 드낙이 움직여야 했다.
또 하나의 드낙. 여럿의 드낙.
그림자로만 이동하던 드낙이 멈춰 섰다. 주변을 면밀히 살폈고, 특히 싱싱한 이파리의 뒷부분을 까뒤집어 보았다.
잎의 윗부분에 있는 벌레는 드물다. 보통은 뒷부분에서 몰래 잎을 먹는다. 깻잎이나 상추를 먹을 때 항상 뒷부분을 봐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벌레가 까놓은 알이 있을 수도 있고, 벌레의 사체가 들러붙어 있을 수도 있다.
씻어도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반드시 한 번은 실패하게 되어있다. 그 실수를 가볍게 넘어가느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먹지 않아야만 한다.
벌레를 씹었을 때 터지듯이 나오는 체액. 그 씁쓸하면서도 차가운 맛. 맛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바짝 구워도 먹기 싫은 게 벌레였다. 생으로 먹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 경험을 진리라고 귀히 여긴다면 능히 추적술에 쓸 수 있었다.
‘이 근처가 확실하다.’
또 하나의 드낙은 다시 그림자로 변했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빨리 이동하는 그림자는 아니었다. 질척거리고, 농밀했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며 땅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테라의 행성 자원을 갉아먹는 마수 기생충은 대부분이 땅속에서 활동한다. 땅속은 지상 종족이 쉽게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하 연합이 아니었다면, 더 힘들었겠지.’
또 하나의 드낙은 땅속에서 갉아먹는 소리를 들었고, 그곳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 어떤 공격력도 없어 보이는 마수 애벌레가 야무지게 광석 하나를 붙들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카각. 카각.
어떻게든 이 광물을 약탈해서 테라 행성 자원을 한 톨이라도 지워 버리겠다는 악독한 심보가 느껴졌다.
‘이기적인 놈. 오직 마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기적인 새끼!’
드낙의 그림자가 놈을 둘러싸고 단박에 압착시켜 죽여버렸다. 독가스와 체액이 뿜어져 나왔지만 드낙에게 상처 하나 주지 못했다.
그림자가 지하를 누비기 시작했다.
땅을 팔 필요도 없었다.
드낙은 그런 식으로 수많은 드낙을 만들었고, 악마의 육체를 지닌 또 하나의 드낙은 그림자로 변하는 능력만으로도 강력한 암살자가 되었다.
신제국에서 시작된 이 행동은 곧 수많은 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드낙의 힘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싹 다 나눠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반란을 막기 힘들다.’
세파리아스가 자신의 절반을 나눈 것처럼, 드낙 또한 크게 투자하지 못했다. 사람이란 간사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드낙에게 반역하지 않겠지만,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그림자 드낙은 그 외에도 다양한 일을 했다.
“홀로 떨어졌네?”
“히익!”
피난 와중에 도적의 습격을 받은 어린이가 까무러치듯이 놀랐다.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걸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누구세요?”
“마수 죽이는 아저씨. 근처 마을에 옮겨줄게.”
사람을 구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기점으로 다종족 연합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만
마수의 공세는 결코 멈출 줄 몰랐다.
‘마신은 테라에 눈을 두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드낙은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며, 마신은 이곳에 전쟁을 벌일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이 어떤 놈들인지 동태를 살피지 않는다는 것이 컸다.
‘마수를 업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마신의 권능. 혹은 힘. 그 지배력이라 불리는 괴이쩍은 초월의 힘은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힘이었다. 마신을 제외하고는 재활용도 할 수 없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만한 세력을 가질 수 있었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이미 검은 돔 사건 때, 테라의 좌표도 얻었으니…….’
이미 이곳은 언제든지 전쟁터가 될 수 있다. 그럴 가치가 없을 뿐이다. 그저 업을 가져가고 테라의 성장도만 늦추면 된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더 확실한 카드들이 필요하다.’
드낙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이 났다.
드낙을 여럿으로 쪼갠 덕분에 신제국의 대피령은 사그라졌다. 모든 이들이 다시 생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마치 유행 바이러스가 사라진 것처럼 모든 이들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
“봤어요? 이 도시가 드디어 깨끗해졌어요!”
도시나 성에 사는 이들은 대피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헐뜯기 바빴다.
패션도 촌스럽고, 좋은 옷을 입지 않는다. 거기에 소비성향이 강한 도시나 성의 사람들에 비해서 그들은 아껴 쓰고, 돌려쓰고, 다시 쓰는 인간들이었다.
“남이 쓰던 신발을 어떻게든 자기가 또 쓰려고 별짓을 다 하더라니까요.”
“어머. 신발 치수가 안 맞을 텐데, 어떻게요?”
“무식한 칼로 깎던데. 보는 제가 살이 떨려서 서둘러 갈 길을 갔다니까요.”
“길바닥에서 그런 짓을 하면 쓰레기가 남을 텐데…….”
“환경미화원분만 힘들게 생겼다니까요.”
자신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드낙은 부의 재분배를 실행했지만 사실 잘 버는 사람들은 떼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돈을 세금으로 내고, 또 축적하지 않고 또 사업을 벌였기에 그 성장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강제로 그렇게 만드니, 실력 있는 사람들은 정신없이 달리는 경주마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들이 아무리 재산을 축적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의미 있는 사치를 부리고, 삶에 여유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 성이고 도시였다. 사람이 모이면 돈도 모이기 마련이었다. 한 명이 금화 10닢을 버는 것보다 10만 명에게 은화를 받고, 물건을 십만 개를 파는 게 더 이득이었다.
부의 집중은 강력한 힘이다. 이는 드낙조차도 쉽게 빼앗을 수 없었다. 그것마저도 빼앗게 된다면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노력할 리가 없었다. 공산주의 꼴 난다.
반면 마을에 사는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할 일이 태산이야.”
“집에 먼지 쌓인 것만 생각해도…….”
“엄마, 내 텃밭은? 잡초 뽑기 도와줄 거지?”
“아니. 그건 네 텃밭이니까, 딸이 알아서 해야지.”
“골렘으으은?”
“안 돼. 마을 공용인데, 농사짓기도 바빠.”
그들은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가득했다.
신제국이 다시 정상화가 되어가면서 동시에 하나의 성과가 모습을 드러냈다.
굉장히 단기간에 큰 성과가 드러났는데, 지금까지 최대한 조용하게 지내고 있던 백색 빛 엘프(White Shine Elf)로부터 나온 성과였다.
그 소식은 당연히 다종족 연합 전체에 알려졌다. 자신들의 종족이 대단하다는 것을 드낙에게 알리기 위해서, 다른 종족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으뜸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최대한 숨겼다면 이제는 최대한 드러내서 자랑하기 바빴다.
[백색 빛 엘프들이 큰 성과를 냈습니다. 행성에 퍼져나가는 마신의 사악한 기운을 정화할 방법이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순수한 마력을 가공하여 마신의 기운을 마주하면 상쇄를 일으키는 방식입니다.]
신문을 통해서 가장 먼저 퍼져나갔다. 최대한 빠르게 퍼뜨릴 수 있었고, 어느 곳에서도 쉽게 제작 가능했다. 글자만 찍을 수 있으면 족했다.
물론 인구가 많은 성이나 도시에는 이미지 크리스털을 통해서 어디서든 엘프에 대한 소식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술집, 광장, 공원. 가리지 않았다.
[보이십니까? 이 진주 같은 색깔의 마력은 가공된 마력입니다. 백색 빛 엘프들은 또 하나의 마도 기술을 개발해 냈습니다. 오늘을 위해서 수많은 엘프 마법사들이 고생했다는 것을…….]
진주 마력 기술은 모든 이들에게 공개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생산 공정이 까다롭다는 이유였고, 무엇보다 마력 가공 기술을 다른 종족에게 주기 싫어서였다.
또한 마력 공정 기술은 만신전(萬神殿)의 기술을 모방한 것이었다. 신성력을 가공해서 정보를 취득하는 등의 일을 했던 것이 우주 낙원의 막강한 시스템이었다.
그걸 보고도 이를 따라 하지 않는 것은 힘든 일이다. 무조건 해야 했고, 가장 적합했던 것이 백색 빛 엘프들이었다. 그들은 현존하는 세력 중에서도 가장 많은 지식과 실무자, 연구원들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지.’
드낙은 그들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억지로 기술 개방을 하지 않았다.
그런 기술 외에도 배울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론이고 지하 연합조차도 아직 엘프의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배 터져서 죽는 일이지.’
드낙이 만약 마력 가공 기술을 먼저 터득하라고 한다면 다른 종족에게 있어서는 까무러칠 일이었다.
‘엘프들한테도 기분 나쁜 일이고.’
신기술을 쪽쪽 빨아먹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엘프들은 현재 원하는 것이 딱히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현상 유지였다. 신이 되는 것조차도 거부하고 허겁지겁 드낙에게 업을 보내는 종족이다.
“최대한 합리적인 가격으로 풀어라.”
“마진은 15%로 하겠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드낙은 엘프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줬다. 여럿의 드낙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여유였다.
운송까지 생각한다면 적어도 30% 이상의 가격 상승을 불러오겠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구X처럼 30% 수수료를 먹지는 않는 것만으로도 드낙에게는 대견한 일이다.
엘프들은 마력 가공의 물약을 건물 곳곳의 단지에 넣어두는 것을 조언해 줬다. 물약의 가격은 당연히 상당한 가격이었다. 마을에서 직접 이를 구매하지 않았고, 국가가 구매하게 됐다.
“이게 그렇게 중요하다며? 마수 놈들이 내뿜는 기운을 피할 수 있다더라!”
“애들 방에 먼저 놔둬야겠는데…….”
“거실에 둬야지. 하나밖에 안 사 왔는데.”
민간에서는 마치 방향제처럼 사용했다. 돈 있는 사람들도 일단은 많이 구매해서 곳곳에 두었다.
다만 그들의 노력은 쓸모가 없었다. 대기 중으로 증발한 가공 마력은 바람을 따라 세상을 떠돌며 마수가 뿌린 마신의 기운과 상쇄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 개발한 만큼 그 정도는 해줘야지.’
엘프들이 기술을 개발했다면, 다른 이들이 이를 구매해서 도움을 보탠다.
‘엘프 혼자서 마신의 기운을 물리친 것이 아니게 되는 거지.’
백색 빛 엘프들이 감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드높이며 다른 종족을 멸시하려 한다면 드낙은 이를 짓누를 생각을 가졌다. 간사하기 짝이 없었다.
지능을 가지면 호랑이의 아가리와 정면으로 싸우기보다는 함정을 파기 마련이다.
드낙은 그들이 개발한 ‘가공 마력 물약’을 손에 쥐었다.
‘독특하다.’
마력을 가공하여 그 속에 무언가를 새기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설비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이 정도의 정교함은 드낙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권능이면 몰라도…….’
드낙의 눈이 빛났다. 오랜만에 엘프들의 도시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억지로 이런 곳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 너희는 알아서 돌아가라.”
드낙에게 소식을 전하고 거기에 더해서 가공 마력 물약을 눈앞에서 보여주기 위해서 운송 임무까지 해낸 엘프들을 격려해 줬다.
“그리고…… 너희들의 업을 깡그리 태워주마.”
“감사합니다!”
드낙의 마지막 말에 엘프들이 그제야 기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