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0화
정신체는 특별히 강력한 초월 형태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중립신 또한 대신 육체의 형태로 전투에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성력을 지닌 인신(人神)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권능으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세파리아스는 아직 자신의 권능을 결정하지 않았고, 만들지도 않고 있었다.
‘한 걸음.’
그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되지만,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확실한 권능을 얻고 싶었다. 마치 중립신처럼.
중립신은 패배했다. 그는 결코 승리만 하는 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파리아스가 본 초월자 중에서는 중립신이 가장 그럴듯한 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닮을 수밖에 없었다.
적이 싫다고 해서 적에게서 배울 점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세파리아스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드낙한테도 배운다. 그가 자신의 신념을 꺾고, 대중에 관한 판단 기준을 송두리째 뽑아서 바꾼 것도 드낙에게서 ‘평범한 사람’에 대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적당히 살 만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게 범인(凡人)이라는 걸 드낙으로부터 배웠다.
그렇기에 지금의 신제국은 상상 이상으로 신황제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했다. 일이 아무리 망가져도 시민들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신제국의 수도에 가장 먼저 세파리아스의 결단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퍼져나갔다.
“육체는 여기에 남아서 제국의 수도를 지키고! 신의 정신체는 마수를 때려잡으러 나섰다는군!”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신황제님을 어찌 싫어할 수 있겠는가!!”
“내가 무릎만 안 다쳤어도 군대에 들어가는 건데!”
“나이라도 속여서 들어가야겠어.”
신제국의 모병은 너무나도 쉬웠다. 체중이 미달이고, 키가 그리 크지 않아도 너도나도 병사가 되고 싶어 했다. 이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싶어 했다. 신제국의 황제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싶어 했다.
더 나아가 내 가족을 내가 직접 지키고 싶었다.
전쟁은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신제국의 황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잘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하는 것은 결국 국민인 셈이다.
다만, 아직 신제국의 군대는 건재했다.
마수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행성 자원의 약탈이다.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고, 주목적이 아니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결국 세력보다는 초월체가 움직이는 것이 확실했다.
‘권능은 아직…….’
세파리아스는 결국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로 정신체의 형태로 신제국의 영토를 돌아다녔다.
정신체는 대단히 빨랐고, 상상 이상으로 더 빨라질 수 있었지만 세파리아스는 주변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의 속력을 유지했다. 그래야 테라의 마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도망치는 상황이 아니라면 은폐해서 행정 자원을 먹고, 벌레를 집어먹는 것이 테라의 마수였다.
우드득!
나무가 쓰러졌다. 세파리아스의 정신체가 멈췄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테라의 마수가 나무 하나를 움켜쥔 채 흡수하고 있었다.
슬라임처럼 생긴 놈이다. 특이한 건 곳곳을 담뱃불로 지진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콰드득!
마수가 움켜쥔 나무가 박살이 났다. 슬라임이 길쭉해지며 마치 촉수처럼 이를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길쭉한 나무가 그 구멍이 뚫린 몸에서 삐져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마수의 몸이 엄폐된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무성하게 놈을 가렸다.
‘운이 좋군.’
나무를 뽑고 부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달리는 말에서 많은 걸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에는 더 천천히 다녀야겠다.’
세파리아스의 정신체는 그대로 놈의 바로 앞에 섰다. 그러고는 단번에 개입을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신성력이 그 몸에서 토해지면서 혹여나 있을 마수 내부의 마신의 기운을 싹 털어버렸다.
‘신성력은 신성력이다.’
신성력에 파괴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의 힘을 너무 많이 담는다고 한들, 밖으로 토해지면 그만이다. 게다가 테라의 마수는 테라의 것. 그림자 편린마저도 사라져 있었다.
그렇기에 정신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물론 마법을 사용하면 되겠지만 세파리아스는 마법의 ‘ㅁ’도 배우지 않았다.
그는 오직 검만 닦아온 기사였다.
세파리아스는 단번에 정신세계에 들어갔다. 마수의 정신에 개입했고, 자신의 정신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풍경이 바뀐다. 존재의 격이 있다. 테라의 마수는 결코 이를 막지 못했다.
“키엑?”
정신세계에서 놈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당장 놈을 죽이지 않았다.
테라의 마수가 지닌 정신세계를 구경했다.
느긋하기 그지없었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마구 뒤엉켜 있구나.’
하늘도 엉망이다. 어린아이가 그린 하늘처럼 색이 엉망이었고, 전체적으로 어둡다. 소용돌이치듯이 모든 것이 뒤엉켜 있었다.
그것은 흙과 사람이기도 했고, 나무와 새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뒤틀린 세상이었지만 기본적인 재료는 그냥 창문 밖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그저 그림처럼 엉망이 되어있을 뿐이다.
흙과 인간의 눈이 뒤엉킨 넝쿨 같은 것을 세파리아스가 발로 건드려 보았다. 이상한 감촉이었다.
“끼에에에엑!”
그림자 편린에서 태어나 테라의 것으로 새롭게 탄생한 마수는 정신세계에서도 꾸역꾸역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끔찍하군.’
세파리아스는 놈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급한 지능이다. 편협하게 조종되고 있는 괴물이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고, 다른 것은 그 무엇도 하고 있지 않았다.
비디오 게임의 AI나 다름없었다.
‘인형.’
오직 마수 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한 존재였다.
세파리아스는 정신세계를 통해서 테라의 마수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놈들은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것이 너무나도 화가 났다. 만약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을 터였다.
세파리아스는 조종당했던 삶을 살았다. 살아서는 엘프들의 실험으로 탄생한 인간의 혈육인 불파겐의 혈족으로 태어났었다.
그에 반기를 들었지만, 히드라의 독과 수많은 공작 아래 죽임당했다. 그 속에서 한 줄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는데, 심장이 멈춰서도 엘프 한 놈을 더 데리고 갈 수 있어서였다.
그 사후에는 중립신에게 사로잡혀서 망령이 됐다. 제대로 된 망령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조잡한 쓰레기에 불과했다. 중립신이 가진 힘이 부족해서다. 이성을 잃고, 뜻하지 않게 드낙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조작된 삶이었다. 그렇기에 세파리아스의 분노는 대단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더 큰 힘이 있었다면 마신을 죽였을 텐데.’
그 분노 속에서도 차가운 냉철함이 돋보였다. 아직 마신의 차원을 침공하지는 못했다. 승산이 없어서다.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파리아스는 능히 승산을 점지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변수가 커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파리아스가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이 현실이란 놈은 그런 놈이다. 다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뚜껑을 열어보면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온다.
“키아아아아!!”
테라의 마수가 발악했다. 세파리아스는 놈의 정신을 단번에 둘로 쪼개버렸다.
정신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간단했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세파리아스 불파겐이라는 개체가 지닌 정신력이 너무 대단했을 뿐이다.
‘이걸 권능으로 하는 게 어떨까?’
세파리아스는 실전을 겪었고, 그에 대한 욕망이 생겼다. 정신세계를 두 쪽으로 내버리는 권능이 있다면 실로 강력할 것이다.
초월체를 상대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겠지만, 정신적 피해를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세파리아스에게도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시답지도 않은 놈들이 초월체라는 놈들이다.’
중립신조차도 정신세계에서 세파리아스에게 패배했다.
이를 다시 눈여겨봐 기회를 마주했고, 그는 수긍했다. 드디어 세파리아스는 자신의 첫 번째 권능을 결정했다.
정신 파괴의 권능.
수준에 따라서는 그저 정신적 피해로만 남을 것이다. 피로감이 대단할지도 모른다. 다양한 방식으로 크고 작게 영향을 받는 권능이었다.
세파리아스의 정신체가 전과는 다르게 더욱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했음에도 언덕을 내려 달리는 말보다도 빨랐다.
세파리아스는 청각보다는 시각에 의존하여 테라의 마수를 쫓고, 정보를 들으며 보다 확률을 높여나가기 시작했다.
정신체가 지닌 우월함으로 닥치는 대로 테라의 마수를 때려잡기 시작했고, 그 숫자는 순식간에 50마리를 헤아렸다.
신제국의 영토에 한하지 않고, 다른 세력의 땅까지도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하며 전 대륙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 * *
‘내가 여럿이 된다.’
그 상황에서 행성 자원을 빨아먹는 벌레들을 처리해야 한다.
드낙은 그 상황을 계획했지만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는 조금 주저하고 있었다.
‘악마의 힘은 육체에 깃든다.’
그렇기에 드낙이 여럿이 된다면 그 힘은 크게 떨어질 것이 자명했다.
‘세파리아스도 자신을 나눈다면 위험할 수 있기에 하지 않았지.’
드낙은 그런데도 이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거나 삭초제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럿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권속 악마를 만들면 가능하겠지만, 권속 악마를 탄생시키는 것은 업(業)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
드낙이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내부에는 아직 신이 되지 못한 봉우리가 잠들어 있다. 개화를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업이 필요했다. 평범한 초월자가 아니기에 더 많은 업을 요구하고 있었다.
적어도 세파리아스가 인신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신격을 획득하는 것보다 10배 이상이다. 무지막지한 양의 업이 쌓이길 기다려야 했다.
‘까마득하지는 않다.’
뿔 쥐가 있고, 다종족 연합이 있었다. 오션 오크 빼고는 드낙을 믿는 이들이 많았고, 실제로 그들의 신앙심을 통해서 드낙은 업을 얻고 있었으며 엘프들에게서는 명확하게 그들의 업을 전달받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엘프들이었다.
“나는 여럿이다.”
드낙의 몸이 두 쪽으로 나뉘지는 않았다. 대신 그림자 위로 또 하나의 드낙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이내 눈이 꿈틀거렸다.
“…흐입! 흡!”
전신에 힘을 주며, 눈을 뜨려고 한껏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드낙은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씩 생긴 것 같은 기분이다.’
다만 그 등급은 낮았다.
‘악마의 힘은 실로 놀랍다.’
“합!”
또 하나의 드낙이 눈을 기어코 떴다. 그러고 나서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뜨며 초점을 맞췄다.
“으…….”
“제대로 보이냐?”
“응.”
드낙의 말에 또 하나의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또 하나의 드낙이 다리를 달달달 떨며 짝다리를 짚었다.
“뭐 하냐? 똑바로 서.”
“내가 왜? 난 다종족 연합의 초월자 드낙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마수 기생충들을 잡는 위대한 용사지.”
“…….”
드낙이 날카롭게 또 하나의 드낙을 쳐다보자 그제야 놈이 싱긋 웃었다.
“깜짝 놀랐지? 하하하.”
“농담할 기분 아니다. 지금 바로 움직여라.”
“힘을 조금만 더 주면 안 되겠냐?”
“충분하다.”
사냥꾼의 재능, 암살자의 재능이 뛰어난 것이 드낙이었다. 작은 힘으로도 행성 자원을 좀 먹는 마수를 처단할 수 있고, 테라의 마수에게서도 능히 도망칠 수 있다.
“테라의 마수는 못 죽이잖아.”
“애초에 테라의 마수는 움직이면서 행성 자원을 먹어치운다. 네가 싸움을 안 걸면 놈도 널 건드리지 않는다.”
드낙이 단언하자 결국 또 하나의 드낙은 투정을 부렸으나, 이내 그 얼굴이 변모했다. 드낙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됐다.
“으악! 뭐야!”
또 하나의 드낙이 발작하듯이 껑충 뛰었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악마의 격은 실로 놀랍기에 너에게 지능을 주었지만 넌 내 분신에 불과하다.”
드낙에 의해서 멋대로 자신의 몸 구성이 변하는 걸 깨달은 또 하나의 드낙이 그제야 조용해졌다.
“가라.”
그 명령에 또 하나의 드낙이 고개를 숙이고는 그림자로 변해서 사라졌다. 파동의 세계로는 들어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