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8화
단종되었던 이스핀 백작이 제작한 산딸기 주는 최근에 재생산이 되고 있었다.
괴이하게도 이스핀의 손맛이 들어가야지만 그 맛이 난다. 특히 그 산딸기 주는 특히나 인간 외의 종족에게 풍미가 폭발적으로 맡아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굳이 외종족이 아니라도, 인간도 탐을 내는 술이었다.
“저, 저도 한 모금 해도 괜찮겠습니까?”
“이것도 어렵게 받은 거라…….”
보급으로 받는 것 자체가 지하 연합이 얼마나 막강한 세력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지하 연합 외의 세력과 전면전을 펼쳐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저 가정일 뿐이지만, 그런 가정까지 할 정도로 지하 연합의 세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지하 연합은 끝도 없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었다.
이스핀 산딸기 주를 보급 용품으로 쓸 정도의 저력이 있었다. 물론 매달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소중했다.
레드몰이 매몰차게 거절하자 촌장은 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기에 더는 못 참고 일 이야기를 꺼냈다.
“언제부터 일하는가?”
말투도 싹 바꿨다. 치졸한 인간이었지만 레드몰은 무덤덤했다. ‘레드몰 레퀴드’라 불리는 연금 물약을 매일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붉은 털의 혈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지만, 그 이상으로 진정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드몰이 단독으로 지휘관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일백적계획의 예상치를 뛰어넘은 지휘력을 갖추게 됐다. 혈력을 진정시키고, 전투 용병으로서만 이용될 레드몰은 뜻밖에도 뿔 쥐의 피와 진정제가 섞인 연금 물약 덕분에 지휘관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게 되었다.
상상 이상의 인내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평타는 치는 지휘관이 될 수 있다.
“바로 내일부터 하겠다.”
“식량은…….”
“현지에서 조달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는데?”
“그래도 인심이 있지. 어떻게 우리가 다 보급을 대주나?”
“따로 준비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 비율은 3할을 넘지 못한다.”
“그래. 잘 부탁하네.”
촌장은 잘 부탁한다는 상투적인 말을 내뱉었고,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두더지 인간과 그냥 인간의 만남이었다. 서로 할 이야기는 돈 이야기뿐이었고 그것이 끝났으니, 서로 헤어져야 한다.
‘건방진 인간 놈.’
멸망한 로마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지닌 것이 촌장이었다.
‘자기들의 생명을 남에게 맡기다니, 어리석다.’
적어도 지하 연합은 이런 식으로 싸우지 않는다. 자신들의 평화는 자신들이 지킨다. 그리고 힘이 있어야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다. 그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그게 지하 연합의, 뿔 쥐의, 고블린의, 크놀의, 두더지 인간의 정의였다.
‘그러니까 우리 지하 연합이 이득을 보는 거지만.’
레드몰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마을 밖으로 향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두더지 전사들이 야영지를 꾸리고 있었다.
그들은 밤바람을 막기 위해서 한쪽에 흙을 쌓고, 그곳과 맞닿게 천막을 친다. 바람이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서는 흙벽을 쌓는 것이 중요했다.
화덕도 자리 잡았다. 그곳에 숯이 놓였다.
나무를 소모해서 만드는 숯은 대단히 귀중한 자원이었다. 나무 수백kg을 쏟아부어도 생산되는 숯은 적다. 그런데도 지하 연합은 숯을 좋아했다. 나무보다 오래 잘 타기 때문이다.
목탄의 맛에 제대로 물들어 있고, 천막 내에서 켜두고 뜨끈하게 지내기 좋았다. 지하 연합의 종족들은 땀이 날 정도로 뜨거운 걸 좋아하기에 그들에게 화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마법사 하나 없이 게릴라 전쟁을 치러야 한다. 상대가 전면전을 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서로 사상자가 꾸준히 나와도 그런 싸움에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눈앞의 손해 때문에 나중의 재앙을 일으키는 셈이다. 상대의 전력이 생기자마자 최대한 깨부숴야 하는 것이 이번 전쟁에서 다종족 연합이 가진 제1원칙이었다.
그 속에서도 지하 연합은 인간 범죄자들을 죽일 권리를 위해서 이곳에 군대를 파견했다.
마을 입장에서도 좀도둑 놈이 계속 광산을 드나들며 평생을 자기 마을의 자원을 빼앗는 것보다는 그냥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거기에 지나지 않고, 군대까지 빌려 쓴다? 마을 입장에서는 땡큐였다. 곳곳에서 군대가 시민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음 날부터 레드놀 용병 군대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마기를 찾고, 삽질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마수의 애벌레가 기어 나왔고, 전투가 시작됐다.
할버드를 움켜쥐고 레드몰이 독기를 내뿜으며 스스로 자멸하는 마수 애벌레를 죽였다. 그 독기에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너끈히 버텨냈다.
“그아아아아!!”
독가스 속에서 레드몰의 흉포함이 절로 드러났다. 이들은 테라의 자원을 좀 먹는 마수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했다.
곤충 형태의 마수들은 전 대륙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로노베 후작의 그림자 편린에서 태어난 테라의 마수는 확실하게 지배자들을 끌어냈고, 시간을 벌었다. 그사이에 작은 마수 벌레는 테라의 자원을 좀 먹으며 덩치를 키우며 마신에게 업(業)을 보냈다.
전쟁 속에서 마수들은 죽어갔고,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종족 연합에게 연달아서 승리가 기록되었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다.
세계와 세계의 싸움이었다. 테라는 전쟁터였고, 마신의 차원은 평온했다.
어떤 세계가 손해를 보고 있는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거기에 마신의 역량은 압도적이다. 고작 마수 벌레를 죽인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었으며, 테라의 마수도 테라의 자원을 써서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드낙이 말하지 않아도 수많은 세력이 총공세를 퍼붓듯이 마수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일백적계획 한 번에 사람이 250~300명이 죽고 있는데도 드낙이 용인하는 까닭이다. 범죄자를 죽여서라도 마수를 잡아 죽일 인적 자원이 절실하다.
레드몰 용병 군대는 충분히 삽질할 줄 알았고, 충분히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여서 만들 가치가 있는 유닛이 레드몰이었다.
지하 연합은 레드몰을 통해서 지상의 일에 크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 * *
북부 불모지.
권속 악마들의 세계였지만 그 변질된 흙을 수출하면서 정화된 땅이 곳곳에 새로 마주하게 됐다. 인간 또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적응력은 실로 대단했고, 그들은 작은 일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하루하루 배부를 수 있으면 족했고, 내 가족이 뭘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이를 지원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북부 불모지의 복잡한 마력이 담긴 흙을 운송하는 일은 대부분 인간이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와서 일감을 찾았다. 내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보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네.”
길가에 마차를 두고, 많은 이들이 한곳에 모였다.
이들은 금방 자리를 펴고, 모닥불을 지폈다. 바짝 말린 밀알을 넣고 물을 끓였다. 씹는 맛이 있는 죽탕을 먹으려는 것이다. 거기에 말린 채소를 집어넣고 푹 우리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다른 것도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군인이 아닌 운송업자였기에 자연히 군인보다 더 많은 돈을 자신을 위해서 쏟아부을 수 있었다.
군인이 사용하는 보급품은 모두 최저가에 낙찰한 회사가 납품하는 것들이다. 그 수준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
다종족 연합처럼 기득권의 재산 축적에 견제를 하며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 돈을 털어야 하는 세상이었기에 이 시대의 군인은 가장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오늘도 육포야?”
“씹는 맛이 있어. 요즘에는 매콤한 것도 나왔다고.”
“나도 한 번 먹어봤는데, 너무 비싸더라.”
“비싸도 맛있으면 됐지. 너도 먹어.”
“그거 먹다가 이빨이 부러졌다.”
“난 괜찮던데. 낄낄!”
운송업자들이 운송하는 불모지의 흙은 도시로 이동하여 그 도시의 마력 발전소로 향하게 될 것이다. 불모지는 과거로부터 엘프들의 마법 실험이 이루어진 곳이었기에 평범한 방법으로는 써먹을 방법이 없었다.
그저 마력 자체를 거대한 발전소를 통해서 쓸 만하게 가공하여 도시에서 소모하는 방법만이 유일했다.
다만, 최근 들어서 소도시가 많이 만들어지면서 마력 흙은 큰 가치를 지니게 됐다.
“예전에는 우리 같이 작은 마차로 옮기면 큰돈은 못 벌었는데, 지금은 제법 욕심이 날 정도로 벌리잖아.”
“우리도 중간에 상인한테 팔아서 그렇지, 도시 하나만 더 지날수록 나날이 값이 달라진다던데.”
“그렇게까지 멀리 가면 조금 위험하지 않겠어?”
“무슨 소리야! 이건 나라의 재산이라고. 그런 걸 탐할 사람이 어딨겠어?”
사박. 사바박.
“응?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무슨 소리?”
“저 숲에서…….”
파바박!
화살이 단번에 손가락질하며 숲의 어둠을 가리켰던 운송업자를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렸다.
“이 새끼들아아아아!!”
“다 죽여라아아아!!”
화살이 쏟아졌다. 그 화살은 대부분 촉이 뭉툭했다. 꽂혀도 죽지 않을 정도로 뭉툭했지만, 살상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적이다!”
“강도? 이런 곳까지!”
게릴라 전쟁으로 뿔뿔이 군대가 흩어졌고, 그 기회를 노린 약탈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산 징역형을 모두 훌륭히 수행하며 나라와 시민에게 많은 이익을 내어주고 출소한 이들은 다시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땀 흘려서 일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대한민국만 해도 재범률이 64%를 뛰어넘는다. 피의자 세 명 중 두 명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꼴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 누구도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사회에 들어와서 ‘또’ 범죄를 이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범죄자들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범죄자들 또한 투표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한 권력이었다.
이를 생각한다면 광산 노동형은 결코 해결 방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광산 노동형을 한 번 해본 범죄자는 다시는 안 잡히려고 소매치기할 것을 살인하고, 은폐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벌이 무거우니, 들키지 않기 위해서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 균형을 갖추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범죄자들을 아예 다른 행성에 처박아두는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 부작용의 송곳니가 불모지의 경계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한탕 친다.’
적당히 돈을 먹고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그러다가 돈이 부족하면 또 죽여서 얻고 그런 삶을 살아갈 범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송업자들은 모여들었지만, 그들은 그저 마차에 들러붙어서 그저 이 시간이 끝나기를 기도했다.
“제발, 제발!”
울먹이는 이들과 품에서 가족사진을 꺼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 척박한 땅에 올 만큼 그들은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었다.
“크크크. 병신 새끼!”
같은 남자였음에도 흉포함의 차이가 컸다. 살면서 사람과 주먹다짐을 한 횟수도 적었다. 그런 놈과 끝없이 싸우고 훔치고 살아온 남자가 지닌 흉포함은 격이 달랐다.
단번에 머리통을 내려쳤다.
남자가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아악!”
몸부림도 없이 그저 웅크릴 뿐이었다. 이런 남자가 왜 야지를 돌며 운송업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뭐야……?”
도끼를 내려찍은 남자가 자신의 도끼를 확인했다. 멀쩡했다. 날은 달빛에 번뜩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남자를 내려쳤다. 하지만 둔탁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으잉……?”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닥불의 불빛에 의존하여 덜덜 떠는 놈을 살폈다. 이내 반들거리는 액체 같은 막이 그를 보호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 마법?”
바닥에서 진흙이 튀어 올라와서 무장 강도를 덮쳤다. 머리 빼고 싹 다 휩쓸려서 뒤로 넘어지더니 땅에 결박당했다. 해변에서 흙에 사람이 무덤처럼 들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머리만 삐쭉 튀어나와 있다.
“으악! 이게 뭐야!”
“마법! 마법이다! 마법사를 죽여!”
“마법사를 죽여! 개새끼들아! 뭐해!”
자기는 못 하면서 남 탓을 하기 바빴다. 전형적인 병신이었다. 자신을 객관화할 수도 없고, 남을 객관화하여 볼 수도 없고, 세상을 객관화하여 볼 수도 없는 불쌍한 인간들이 이곳에 있는 무장 강도들이었다.
사태는 순식간에 끝났다. 하지만 그 어떤 운송업자도 일어서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눈알만 굴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