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9화
* * *
일류의 싸움. 프로의 싸움을 하고 싶었던 드낙이지만 7일 동안 진전 없이 놈을 쫓고 있기만 했다.
‘더는 못 참겠다. 다른 방법을 써야지.’
편법은 결코 좋은 게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놀고 싶은 마음도 크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서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테라의 마수가 드낙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는 보이지 않았지만 드낙을 공격했다.
덫을 팠고, 드낙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흔적을 찾기 위해서 파동으로 다니지 않았기에 가능한 유효타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드낙이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손바닥에서 피가 흥건하게 나오고 있었다. 소름이 전신을 쫙 훑었다.
‘당했다?’
아무것도 없는 야지다. 하지만 드낙은 무엇이 자신을 노렸는지 인지했다. 당하고 나서 인지했지만, 그마저도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마나가 나를 노렸다.’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상대의 ‘초월의 힘’은 대기 중에 존재하는 마나와 똑 닮았다. 즉,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렇기에 드낙을 속이고 날카로운 한 방을 먹여줄 수 있었다.
드낙은 인간의 형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상처를 내는 건 쉬웠다. 다만 그 상처는 금방 재생되었다. 고통마저도 사라졌다.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드낙은 그 속에서도 강력한 저항을 느꼈다.
‘기괴하다. 대체 놈은 뭐지?’
마나와 닮은 초월의 힘이라면 저항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게 마나다. 대자연에 퍼져 있는 마나는 체내에 있는 마력과는 또 다른 성질이다. 그것을 닮으면 악마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며 밀려나야 정상이다.
실제로 순응하듯이 밀려났지만 드낙은 속지 않았다. 은근한 압력. 아주 미세한 저항을 느꼈다.
‘덫.’
근육을 사용하는 것보다 초월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존재에게 유효한 함정이었다. 드낙은 이를 ‘마나 함정’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이 덫은 놈이 성장했음을 의미했다.
적어도 초월의 힘을 담는 그릇이 넓어지거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요령 혹은 노하우를 익히거나 찰나의 번뜩임으로 새로운 방법을 깨우쳤다는 뜻이다.
드낙은 다시 한번 마나 함정을 마주하게 됐다. 이번에는 당하기 전에 그림자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육안으로는 너무 잘 보이네.’
잔디나 흙에 수딩젤이 묻혀 있는 것과 같았다. 다만, 흡수는 안 되는 수딩젤인 셈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드낙이 지나치기 쉬웠다. 고속도로를 최고 속력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로 많은 걸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를 노린 덫이다. 그리고 그 덫은 정확하게 초월의 힘을 다루는 이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초월의 힘에 이끌리는 덫이다. 손으로 움켜잡아도 발동하지 않는다.’
초월의 힘을 사용하고 있을 때 발동하는 덫이다. 악독했다.
‘테라의 것이 아니지만, 테라의 자원으로 만든 함정이다.’
초월자들의 전쟁을 자주 겪은 세력이 생각할 법한 덫이었다.
예를 들면 대단위 텔레포트 따위를 막는 데도 쓰일 수 있어 보였다. 비무장 지대에 뿌려진 지뢰와 비슷한 용도지만 더 확실한 명중률을 가지고 있었다. 사정거리에만 들면 덫이 껑충 뛰어서 적을 노리는 식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드낙은 마나 함정을 통해서 하나의 발상을 떠올렸다.
‘악마 종족의 힘을 써야겠는걸.’
업을 소모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악마 본연이 가진 힘이다.
우드득! 콰드득!
드낙의 살이 뒤틀리고, 뼈가 움직였다. 악마의 육체 변이는 그들 종족 고유의 것이었다. 별을 파괴하는 종족이 악마였다.
‘물리적으로 빨리 달린다면 놈에게 닿을 수 있다.’
상대는 초월의 힘을 노리고 있었다. 현실적인 육신을 지니고 있다면 마나 함정에 걸려들지 않는다.
발데마르가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놈의 흔적을 쫓아야 하기에 날아갈 수는 없었다.
대신 다리가 길고, 날렵한 모습을 지닌 짐승처럼 변했다. 털도 필요 없었다. 춥지도 않았고, 방어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는 털이 없는 것이 낫다.
앙상한 뼈다귀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만은 그대로였지만 대신 몸 곳곳의 살덩이가 돌기처럼 생겼고, 축 늘어졌다. 그곳에 뼈가 자리 잡고 근육이 들어찼다. 이내 닭 머리가 자리 잡았다.
닭 머리가 이리저리 움직여도 고정된 것처럼 그 자리를 고수한다. 그렇기에 달리는 와중에 정확하게 사물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런 닭대가리가 드낙의 몸 수많은 곳에 수백 개가 자리 잡았다. 드낙은 이미 훌륭한 악마였고, 초월자에 어울리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괴하지만 이게 가장 낫지.’
드낙이 한 걸음을 움직였다. 발에 다닥다닥 붙은 닭대가리들은 무중력 상태처럼 머리가 아주 안정된 상태로 딸려 나왔다.
그 시각 정보를 받은 드낙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했다.
드낙이 다시 내달렸고, 그 속에서 닭대가리를 통해 시각 정보를 획득했다. 마나 함정을 달리는 와중에 포착했고, 멈추는 일도 없었다.
* * *
3일을 내달렸고, 그제야 질주하는 놈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만변하는 살덩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끝없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그림자가 곳곳으로 뻗어나가 벌레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벌레만 잡아먹는 게 아니다. 날아오르려는 새. 도망치려는 사슴. 웅크리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토굴 속의 토끼와 새끼들.
그 모든 것이 그림자에 낚여 잡아먹혔다.
놈이 지나가는 곳에는 마나 함정이 남았다. 초월자가 못 쫓아오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낙은 기어코 이곳에 도달했다.
악마 종족이 본래 지닌 육체 변이를 통해서 여기까지 도달한 드낙의 모습은 더욱 기괴해져 있었다. 체고는 한없이 낮았다. 끽해야 140cm에 불과했다.
하지만 넓적하게 펼쳐져 있었다. 피막처럼 살덩이가 주렁주렁 달렸고, 그곳에 닭대가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천막과 비슷한 구조였다.
그 몸이 찰나의 순간에 사라졌다. 세상을 속이고 모든 존재로부터 관측되지 않게 되었다.
펑!
테라의 마수의 일부분이 터져나가며 나뒹굴었다. 나무가 쓰러지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그저 살덩이에 불과한 테라의 마수가 온갖 기괴망측한 생명체로 변형되었다. 어떤 곳은 오우거였고, 어떤 곳은 트롤이었으며, 어떤 곳은 사자의 다리였다.
키메라와 비슷했지만, 더욱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더 혐오스러웠다.
어느새 인간이 모습으로 돌아온 드낙이 빙긋 웃었다.
“잡았다. 요놈.”
테라의 마수가 입을 쩍 벌렸다. 그곳에서 마력이 응축되며 쏘아졌다. 마법이라기보다는 그저 마력 응축포에 불과했다.
드낙은 이를 고스란히 맞아주지 않았다. 그림자로 변해 움직였다.
이때를 노리고 테라의 마수가 지닌 그림자가 쏟아져 내려왔다. 마수는 드낙과 똑같은 그림자의 힘을 다루고 있었다. 마수의 그림자를 때렸지만,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파동의 세계로 들어간 드낙이 테라의 마수 등판을 찢어버리며 튀어나왔다.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키아아아악!”
테라의 마수가 몸집을 크게 부풀렸다. 그러고는 마치 분열하듯이 쩍 갈라졌다.
동시에 드낙에 의해서 양단되며 피가 비산했다. 그 핏속에서 박쥐 한 마리가 튀어나왔지만 드낙의 그림자에 움켜잡히더니 짓눌려 죽었다. 땅에 떨어진 살덩이가 흙에 흡수되듯이 지하로 빠져들어 갔다.
도망치려는 모습이다.
태세 전환이 빠르다. 결코 자신이 드낙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알아차렸다.
콰드드득!
드낙의 팔이 한순간에 커지면서 땅을 크게 틀어잡았다. 그리고 허공으로 내던졌다. 드낙의 마력이 그 팔에서 쏟아져 나왔다.
육체가 크면 그릇도 크다. 거대해진 팔에서 나온 마력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12문장 이상의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불.”
마력이 이글거리는 화염이 되어 땅을 헤집었다.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테라의 마수가 잠자리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서걱!
드낙이 어느새 검을 들고 테라의 마수 위에 모습을 드러내 날개를 잘라내며 등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그의 발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며 테라의 마수의 전신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악마의 피다.
테라의 마수가 전기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벌벌벌 떨었다. 이내 추락하여 땅에 그대로 내려 찍혔다.
꽝!
체중이 대단했기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기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악마의 힘은 곧 육체다. 그렇기에 피 또한 드낙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의 혈주술과는 다르다. 말 그대로 계통, 학문의 노력 없이도 가능한 일이었다. 전에는 그런 일은 꿈에도 못 꿨지만, 악마의 좌에 오르고, 이놈을 추적하면서 육체 변이를 여러 번 하면서 깨우치게 됐다.
“키익! 크익!”
테라의 마수가 버둥거렸다. 하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말을 할 줄도 모르는 놈이었고, 고문을 해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결국, 드낙은 놈을 죽이고 전신을 얼렸다.
그리고 거인으로 변해서 이를 짊어지고, 근처 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엔 뿔 쥐들의 별동대와 마주할 수 있었다.
“뜨나아아악!”
“신제국의 땅에서 왜 군대를 놀리고 있느냐?”
그 숫자는 500마리에 달했다.
“우리들의 살아 숨 쉬는 신을 뵙습니다! 신제국으로부터 허락을 받았습니다! 초월자께서 통 보이지 않아서 신황제 또한 걱정한 듯합니다!”
지축을 흔들며 거인의 상태로 걷고 있었기에 드낙을 찾을 수 있었다.
꽁꽁 언 테라의 마수를 드낙이 그들에게 보여줬다.
“어떠냐.”
“키메라 같습니다. 하나같이 테라의 생물들입니다.”
뿔 쥐들이 큰 관심을 가졌다. 테라의 마수는 아직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놈만 문제인 것이 아니다.
마수(魔獸) 로노베 후작의 흉계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엘프에게 맡겨야겠지.’
연구를 통해서 무언가를 알아낼 것이다. 다만 그전에 세파리아스와 마주해야 했다.
드낙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테라를 계속해서 방해하려는 세력은 어디에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대한 의문은 그 뒤에 해야 한다.
신제국의 황제와 드낙의 만남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이건가?”
“그래. 팍 떠오르는 건 없지?”
“악마적이군.”
세파리아스가 짧게 대꾸하며 얼음에 꽁꽁 언 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무인인 세파리아스에게 특별하게 여겨지는 건 없었다.
신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절대 전지전능하지 않았다.
“엘프에게 보낼 생각이다. 신제국은 이걸 조사할 역량이 없으니까.”
“연구에 대한 정보는 바로바로 볼 수 있겠지?”
“당연하다. 이 테라는 다종족 연합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가 되어있으니까. 무엇보다 이런 피해가 이번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정도로 강하더냐.”
이에 드낙이 말을 아꼈다.
“나와 마주했을 때 도망부터 생각했지. 죽이기 까다로운 놈이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세파리아스가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드낙 또한 그 마음을 이해했다.
적이 자꾸 자신의 영토 내에서 견제하는데, 그 적의 본진으로 쳐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발목을 잡히겠어…….”
드낙이 전투에 있었던 일을 보여줬다. 말 그대로 압도했지만, 그와 똑같이 싸울 수 있는 이들은 이 테라에 없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고난에 묶여있다면 적의 생각대로 이루어질 뿐이다.”
“생각해 둔 것이 있느냐?”
이에 드낙이 말을 이어나갔다.
“대기 중의 마나와 아주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그림자의 힘을 다루는 놈이지. 즉, 대기 중의 마나 밀도가 높아지면 놈이 나타날 전조 현상이나 다름없다. 이를 통해서 조기에 대피하고, 필요한 인력을 투입한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대단히 합리적인 결론이다.
실제로 사람을 죽일 정도의 힘을 얻었다면 테라의 마수가 지닌 마력량은 자연히 높은 상태였다. 탐지 마법으로 쉽게 걸러낼 수 있었다.
아무리 대기 중의 ‘마나’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밀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걸릴 수밖에 없다.
“너는?”
신제국의 수비를 할 것이 분명한 것이 세파리아스였다. 하지만 드낙은 아니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그를 대신해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라의 마수가 지닌 맹점까지 찾아냈으니, 무언가를 더 할 필요는 없었다.
이에 드낙이 시원하게 웃었다.
“불모지로 향할 거다.”
북부 불모지. 그곳에서 테라의 마수를 카운트 칠 권속 악마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이에 세파리아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곳에 간다면, 흰여우 세린에게 연금 물약을 더 만들도록 해라.”
“왜?”
“……?”
세파리아스가 의문을 띄웠다. 이에 드낙이 배를 내밀며 말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건데~”
“놈.”
드낙의 경박한 짓에 세파리아스가 화를 내자 드낙이 몸을 빙글 돌렸다. 세파리아스의 청탁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신제국을 줬다. 세파리아스. 그건 네 문제다. 권속 악마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합당한 거래를 해라.”
“그저 쉬운 길이 있기에 말한 것뿐이다.”
“그럼 그 쉬운 길은 이제 무너졌네.”
드낙은 예전 같지 않았다. 세파리아스는 그게 껄끄러웠다. 마치 신제국의 자원을 권속 악마들에게 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다.
그가 테라의 마수를 들고 단번에 날아올랐다.
남은 세파리아스는 한 가지 고민을 떠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