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7화
7. 테라의 마수 (2)
상위국(Superior Country).
자치 왕국의 새로운 이름이며, 4명의 국왕이 선출되었다. 그들에게도 신제국의 학살 사건은 동요하기에 충분했다.
세리안 불파겐 국왕은 당장 긴급 중앙 회의를 개최했다. 중앙에서 제법 영향력을 지닌 이들이라면 말석이라도 참가하게 되었다.
가히 상위국의 모든 것이 이곳에 결정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지하 연합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국왕으로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그 위치에 걸맞게 성장한 도렌 국왕이 거칠게 발언했다.
상위국에는 순찰자의 숫자도 적었다. 대부분 신제국으로 향한 탓이다. 전(前) 자치 왕국은 드낙의 수족이나 다름없었고, 수많은 이종족과 교류도 잦았다.
인류를 위해서 평야를 버리고, 도시를 버리고, 따뜻한 침대를 버리고, 산으로 숲으로 향했던 것이 순찰자들이다. 그들은 뼛속 깊이까지 인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의 이종족 배척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오크의 손에 얼마나 많은 순찰자가 죽었는가! 숨어있는 네크로맨서에게 어떤 형제가 죽었는가!
그 모든 것을 생각한다면, 순찰자들이 자치 왕국에게 불만을 품은 것은 눈 감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종족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상위 인간의 숫자를 최대한 끌어 올리고 있었지만, 그들이 훌륭한 추적자라고는 할 수 없다. 탐색 마법을 뿌려도 의미가 없다는 정보까지 갱신된 상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신제국과 상위국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아직은 여유가 있다!”
“우리가 왜 상위국의 국명을 얻었는가. 다른 이에게 손을 빌리려고 그런 위대한 이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영토에 대한 확실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세상’이란 드낙을 말하는 것이다.
역량도 안 되면서 많은 영토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면 상위국은 축소될 것이 분명했다.
드낙은 예전과 다르다. 철저하게 움직이기도 했으며, 종종 급발진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급발진조차도 다분히 정치적이다.
‘뜨낙’의 포지션도 나름 좋을 때가 있는 법이다.
“초월자께서는 분명 이를 이해해 주실 겁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백 번이라도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정국이야말로 우리가 갖춰야 할 힘이고, 장점입니다. 우리는 인간 아닙니까?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렌 국왕의 거듭된 말에 몇몇 이들이 호응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낙 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내용 아닙니까?”
“그분이라면 유연성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당장 다종족 연합 또한 종족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 않나.”
수군거림이 커지고, 여론이 도렌 국왕에게로 넘어갔다.
다른 국왕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리안은 달랐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지하 연합 또한 바쁠 텐데, 우리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최소한도로 도와줄 것이 뻔하지 않나.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재원을 쓰도록 하지.”
“재원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거지?”
국왕들이 궁금해했다.
“잊었나? 옵시디안(obsidian)의 흡혈귀들 말이다.”
“아스톨포 샤를로트……!”
반마(半魔)의 격에 올라있으며 데몬 뱀파이어(Daemon Vampire)이기도 했다. 악마 아카타베루의 피를 받았지만 그 지배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이제는 아카타베루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는 흡혈귀 왕자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종족 연합의 초월자께서 그에게 담배 사업부터 여러 가지를 맡기고, 헌혈을 통해 그 돈을 밑에 사람들에게 퍼뜨리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피를 돈을 주고 산다.
이를 통해서 부의 재분배가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피까지도 ‘자원’으로 쓸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없는 이들은 피를 내주고 돈을 받게 됐다.
그리고 그 덕은 상위국이 보고 있었다. 각종 사업을 위해서 옵시디안 가문이 상위국의 수도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상위국의 민중들은 피를 주고 돈을 받게 되었으니 크게 환호했었다. 옵시디안 가문은 담배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도 상위국으로 가야만 했다. 그들 또한 더 많은 혈액을 확보하고 싶어서다.
가문원 또한 늘어났다. 악마의 침공이 예정되어 있었고, 샤를로트 가문은 그 전쟁에서 주축을 담당하고 싶었다. 적어도 아카타베루를 죽이는 건 자신들이 하고 싶었다.
면접을 통해서 흡혈귀를 늘리고 있었다. 종종 스카우트도 하고 있었다.
불멸자가 되는 가장 손쉬운 길이었다. 게다가 귀족이 될 수 있었으며 돈도 많은 것이 옵시디안 가문이었다.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득권층은 성 문화를 즐기면서 민초들은 성 문화를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는 풍토 때문에 더욱 흡혈귀가 되고 싶은 이들도 있었다. 귀족이 되면 미남과 미녀를 가질 수 있었다.
순식간에 사회 고위층이 되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드낙이 정해 둔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된다.
그 덕에 흡혈귀들의 숫자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사업 또한 창창했다.
“엘프들도 빠지지 않고, 지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인구수도 많으면서도 고작 도시 몇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엘프들이다. 그들을 이용하는 건 가장 손쉬운 일이었다. 엘프들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방침이 오고 갔다.
“중요한 것은 세수에 최대한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세금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대피령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신제국과 확연히 다른 판단이었다.
“그러다가 학살 사건이 이곳에서도 발생하면 어찌 됩니까?”
대신 중 하나가 발언했다.
‘대학살’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냉병기와 마법의 시대에서 수백이 죽는 건 일반적인 일이다. 대승해도 절반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중요한 건 아군의 피해가 아니라 적군의 피해였다.
거기에 기득권도 죽지 않았다. 성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가히 대학살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범죄자들과 병사들 그리고 기사 하나가 죽은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러니 대학살이라고 거창하게 띄우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학살의 책임과 대학살의 책임은 다른 법이다. 시민들의 반응도 판이할 터였다.
실제로 신제국에서는 기사의 장례식을 철저히 비밀리에 치르고, 최소한의 인원만 보냈다. 물론 그 인원에 들어간 인원의 직함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들 가족이 만족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대신에 범죄자들의 죽음을 크게 다뤘다.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 자들인지, 얼마나 사회에 필요가 없는 존재인지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우리가 신제국처럼 하지 않는 건 그들의 위협이 그들의 영토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까지 대피령을 내린다면 세상 사람들이 어찌 보겠는가? 적이 없음에도 도망치는 꼴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동안 일을 하지 않으면서 사라질 돈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 탐욕이 득실득실했다. 부의 재분배가 국가 단위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하나같이 재산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사회 최상위층이라 할 수 있었지만 부족한 건 부족한 것이다.
수천억 원이 있어도 돈 모으려고 수많은 청탁을 받는 기득권층의 탐욕을 본다면 이들의 모습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100명 뽑는 데 150명이 청탁을 해서 돈을 적게 한 50명이 떨어지겠는가?
모든 국가는 그렇게 썩어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놓고 탐욕을 부리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그 대신에 생산 활동, 경제 성장률을 감소시키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게 됐다.
그게 현 상위국의 현실이었다.
하루에 만 명이 전염병에 걸려도 경제가 더 중요했다. 국가의 지배 권력층인데도 물질적으로 얻는 것이 상대적으로 낮은 탓이다.
그것이 드낙의 처세였고, 그들은 그것에 적응해야 했다. 그 속에서 어떻게든 손에 무언가를 움켜쥐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군대를 퍼뜨려야 한다. 어떻게든 전조 현상을 찾아낸다면, 학살 전에 미연에 이를 방지할 수 있다. 적이 누군지도 모르니까.”
신제국이 인구를 똘똘 뭉치게 했다면, 상위국은 군대를 퍼뜨려서 정찰병으로 쓸 생각을 가졌다. 적을 먼저 찾아낸다면 능히 대처할 수 있다고 봤다.
곧 회의가 끝이 났고, 상위국왕들은 아스톨포 샤를로트를 호출했다.
그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있었다. 반마(半魔)의 격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며, 가문을 키우는 대신에 정치적 영향력을 포기하여 상위국의 지배층과 타협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지?”
그렇다 하여도 아스톨포 왕자는 확실히 왕자였다. 거기에 몇 없는 반신급의 존재였다.
악마 전쟁을 위해서 흡혈귀 가문인 옵시디안 가문의 세력을 늘리고 있었음에도 상위국 정치에 참가하지 않았기에 그 기세가 실로 대단했다.
흡혈귀들의 불정치(不政治) 약조는 그만큼 상위국의 4명의 국왕에게 아주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아스톨포가 이를 철회한다면 또 하나의 정치 세력이 탄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중이 좋아할 수밖에 없지.’
수많은 사업을 하긴 하지만 드낙에게 받은 담배 사업이기에 독점하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피를 구매하는 구입처다. 민중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녀니 뭐니 해도 헌혈하면 양에 따라서 최대 은화 10닢까지 받을 수 있었다. 상당한 돈인 셈이다. 현대로 따지면 한 번 헌혈에 10만 원을 받는 격이다.
그런 가문이 정치에 참여한다면…… 끔찍했다.
“신제국의 학살 사건을 들었을 것이다. 흉수는 아직도 못 찾아냈지.”
“테라에 숨어든 악마일 리는 없겠군.”
아스톨포 왕자가 단번에 판단했다. 그 말속에는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악마, 아카타베루를 잡아서 복수하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업이다. 그 외의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남아있다고 해도 그때까지 대악마와 일전을 벌일 정도로 흡혈귀 가문을 키워야 했다. 긴 시간이었기에 더욱 열정을 태워야 한다.
“여유가 없지는 않을 거 아닌가.”
“하다못해 시조(始祖)라도 나서는 것이 어떤가.”
상위국의 국왕들의 시선이 아스톨포가 가지고 있는 마검(魔劍) 샤를로트(Charlotte)에 머물렀다. 그러나 마검은 반응이 없었다.
하기 싫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상대가 국왕이다. 아스톨포가 마검을 잡아 뽑으며 말했다.
“시조시여. 저들에게 한 말씀 해주소서. 무시할 이들이 아닙니다.”
이에 검이 변하여 아름다운 흑발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피부는 우유처럼 백색이었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유리처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내 후손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나. 들어라, 드낙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아 국왕이 된 이들아.”
그들은 그런 도발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 정도 도발은 얼마든지 받을 만했다. 또 도발에 이끌린다고 해도 샤를로트 선조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위국과 함께 가는 것이 옵시디안 가문 아닌가. 지금 이럴 때 도와줘야지. 악마를 처리하고 난 뒤에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인가? 아니지 않은가.”
담배 사업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했으니 다른 땅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많은 투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투자금을 확보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드낙 때문이었다.
국가는 물론이고 수많은 이들이 재산을 대량으로 축적하기보다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 풀기를 원하는 것이 드낙이다. 특히 아직도 동화, 은화, 금화가 유통되는 경제 구조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엘프들은 화폐 개혁을 통해서 그들만이 취급하는 화폐를 만들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기에 그 생산 가격은 종이 화폐보다 비쌌다. 기술의 발전이 대단치 않아서 위조가 쉽기 때문이다.
차원 낙원에 소속되어 있던 과학자와 수많은 현대 기술을 약탈하여 노획했음에도 부족한 건 부족한 것이다. 지구의 모든 기술이 차원 낙원에 있는 건 아니었다.
이를 지적하자 샤를로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 때 돕는 것이 친구라지만, 시간을 허비했으니 받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군인 헌혈세를 도입하도록 하지.”
이에 샤를로트와 아스톨포가 흥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