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3화
6. 테라의 마수 (1)
지상의 마을 농촌을 다니는 드낙의 행보는 당연히 느릿느릿했다.
선행을 베푸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자신을 칭송하는 것도 기분이 절로 좋아지고 콧대로 뿜뿜 올라갔다.
특히 드낙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일했었던 현대인이다.
현대판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드낙은 신제국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준비를 하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풍족한 삶을 살 것 같지는 않았다.
‘농업 골렘과 목축 골렘 덕분에 기본적인 의식주는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대도시와 깡촌의 차이와 같았다. 돈이 몰리는 곳에 모든 편의 수준이 높았다.
‘고민해 봐야 할 일이겠지.’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성과 도시 또한 늘어날 것이다. 이를 골고루 분배하여 균형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 최대한 많은 인간이 행복할 방안이다.
그런 드낙의 일정에 방해꾼이 들어왔다.
“뜨나아아아악!”
“우리들의 살아있는 신을 뵙습니다!”
“기색을 보니 급한 모양이구나. 무슨 일이냐? 마수의 침공은 느껴지지 않거늘…….”
하루에 한 번. 파동과 그림자로 이동하며 마수의 기운이 있는지 파악하고 있는 것이 드낙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급하다?
‘반란?’
생각할 수 있다. 드낙이 죽었다는 괴소문을 퍼뜨린다면, 거기에 속을 놈이 충분히 있었다.
‘내가 악마의 격에 올라선 것도 거짓이라고 여길 놈들도 있지.’
인간은 어리석을 땐 끝없이 어리석다.
‘반란이다. 반란이 틀림없다.’
“반란이구나! 이럴 줄 알았지.”
“아닌데요? 찍찍.”
이에 발데마르가 코를 훔쳤다.
“그럼 무엇이냐?”
그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잭폿 터지듯이 근거 없이 딱 맞추지 못해서다. 나름 감이 살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영 아닌 듯했다. 위기가 몇십 년 뒤에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그래도 나름 노력했는데, 무뎌진 것인가. 이 드낙이…….’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목적의식도 없이 괜히 신제국까지 찾아왔다.
아마, 드낙의 감각이 무뎌진 것을 드낙이 모르는 사이에 드낙의 본능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그 덕에 구상은 해뒀지만, 하지는 않았던 일을 하게 됐다. 바로 신제국의 작은 마을을 돌며 선정을 베푸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뿔 쥐들이 들이닥쳤다. 그 숫자는 단 한 마리뿐이다.
‘구색이 다르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뿔 쥐들이 어떤 이들인가. 드낙의 앞에 홀로 나타나는 경우도 제법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산업화의 초반. 전 종족이 성장을 위해서 내달렸다. 지하 연합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죽하면 쉐도우 위스퍼까지 축소될 정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드낙의 행보가 명확할 때 혼자만 오는 건 아니었다. 최대한 드낙을 보고 싶어 하는 뿔 쥐가 많은 탓이다.
그런데 한 마리만 왔다는 것은 그만큼 파동으로 이동하는 드낙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인근의 각 마을에 뿔 쥐들이 한 마리씩 갔다는 소리다.
‘나를 한 번 보는 것보다 실리를 추구했다.’
뿔 쥐가 단번에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미증유(未曾有)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범죄자 광산이 박살이 났고, 정규병은 물론이고 간수와 범죄자들이 모조리 죽었습니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고 피로 인하여 땅이 검게 변할 정도인 데다, 무기나 옷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드낙은 그렇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희 뿔 쥐들이 조사를 해보았으나,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부릅!
드낙의 눈이 크게 떠졌다.
중급 권속 악마의 격(格)에 올라선 것이 뿔 쥐들이다. 거기에 드낙의 형질마저도 계승 받았다. 사냥의 재능이 있었고, 추적의 재능이 있었으며, 암살자로서의 능력도 타고났다.
드낙을 닮은 중급 악마 권속이다. 다른 악마 권속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분야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다.
“정말이냐? 그 어떤 흔적도 못 찾았다고?”
“예! 죄송합니다. 저희의 역량을 뛰어넘는 일이었습니다.”
“네 말대로 보통 일이 아니다. 위치를 읊어라.”
뿔 쥐가 이에 대해 말해 주자 드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세상을 속여’ 파동으로 이동하려고 했지만 이내 뿔 쥐 정보원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탓하지 마라. 지금 이 순간도 중요하지만, 10년. 100년 뒤가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 끝까지 향상심을 잃지 않고 노력한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훌륭히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부르르!
뿔 쥐가 오열하려는 것을 참았다. 파동으로 변해 사라지는 드낙을 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뜨나아아아악!”
그 목소리만큼 드낙에 대한 신앙심이 가득했다.
‘지구의 인신들. 그들일까?’
악마는 아니다. 마수도 아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지구의 인신들이다.
차원 낙원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이끌며 이곳에 도착한 놈들이 바로 지구의 인신이다. 차원 낙원은 함락당하여 악마의 요새, 가비노가 되었다.
‘그랬다면 내가 알아차려야 한다.’
차원 낙원은 육안으로도 충분히 크게 볼 수 있다. 그리고 행성 위에 떠 있는 가비노가 이를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결국, 돌고 돌아서 의문이 남았다. 해답 없이 헤매는 의문을 해결하려면 결국 진앙지로 향해야 했다.
발데마르의 마음에 지진을 일으킨 놈을 추적해서 명확하게 마주해야 했다.
스슥.
홀연히 드낙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대지에 드낙의 발이 놓였다.
다른 이들은 느낄 수 없었지만 평범한 흙보다 훨씬 딱딱해져 있었다.
드낙이 허리를 숙여서 검게 변한 흙을 움켜쥐었다. 독특한 질감이 느껴졌다.
흙은 평범한 방식으로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특별한 걸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뿐이다. 대신 조금 더 깊게 팠다.
제법 들어갔음에도 피 때문에 검게 변한 흙은 여전했다.
‘시체가 이곳에 있었다.’
피가 고일 정도로 시체가 쌓였다. 그 덕에 깊은 곳까지 침투했다. 잔뜩 고였기에 꾸준히 아래로 깊이 침투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시체도 못 구했다고 했지.’
시체가 쌓일 정도로 방치되어 있다가 치워졌다는 뜻이다. 하나의 근거에서 일어난 드낙의 추론은 더욱 깊게 들어갔다.
‘전투가 길어졌다면, 인원수가 수비군에 비해서 적었다는 뜻. 그에 반해서 범죄자들의 시체까지 없다.’
모순이다. 경기병이 다가오기 전에 일을 끝냈다. 거기에 시체 소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수준이 높다. 대신 소수.’
인간을 통째로 잡아먹었을 것이다. 덩치가 클 수도 있지만, 민첩하다. 도망치는 놈들까지 싹 잡아먹어야 했으며, 은밀하게 움직여서 인간들이 최대한 자신이 존재를 늦게 알아차리게 하였다.
까다로운 조건을 성공적으로 끝냈고, 훌륭히 마무리하여 완전범죄가 되었다.
피에 의해서 땅이 검게 변한 것만으로도 드낙은 상대가 소수이며 덩치가 크면서 은밀 기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방팔방 도망치는 놈들을 모두 파묻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인원수가 많았다면, 쉽게 전투를 끝냈을 터다. 거기에 범죄자들까지 처리했다는 것은…….
‘적어도 트롤과 오우거 사이에 있는 놈이다.’
상황이 좋다. 은밀성에 체급까지 큰 놈이라면 능히 인간을 단번에 죽일 수 있었다.
‘거기에 은밀성까지 있을 것이다.’
그게 없었다면 벌써 들켜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한 퍼즐 아닌가.’
인간을 죽이기 위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드낙은 몰랐지만, 로노베 후작이라 불리는 마수가 만든 그림자 조각은 처음 만난 생명체의 카운터로 성장하게 된다. 물론 그 시작이 ‘로노베 후작의 그림자 조각’이었기에 그림자를 다루는 건 당연하다.
마수 카테고리, 로노베.
오직 그만이 그 카테고리에 들어간 마수이며, 그림자를 다루기에 특별대우 받은 존재가 로노베 후작이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며, 단독으로도 행성을 혼란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마수였다.
마신(魔神) 성현(Seonghyeon)이 그를 잘 쓰지 않은 까닭은 당연히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노출하기보다는 크게 우대하여 조용히 써먹으며, 때를 기다렸다.
로노베 후작이 필요한 때는 반드시 올 것이기에 중히 여기면서도 많은 곳에 써먹지 않았다.
중립신이 부활한 땅이라면 로노베 후작을 쓸 만하다. 그곳에는 온갖 세력이 뒤엉킬 것이 뻔했기에 조용히 이득을 보는 게 좋았다.
“다종족 연합의 초월자를 뵙습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드낙에게 기사가 무릎마저 꿇으며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에게는 가볍게 여겨지는 무재를 지닌 것이 드낙이었으나, 다른 이들의 처지에서는 이미 하나의 걸출한 탑을 세운 실력자다.
무엇보다 앞으로 신제국은 외부 차원으로 침공을 나간다. 그때가 되면 드낙이 후방에 있다. 자연 드낙에 대한 예우가 대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 가장 위험한 곳이 후방이다. 정수리를 대놓고 노출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드낙은 단번에 기사의 뒤를 점했다. 이에 기사가 섬뜩함을 느꼈다. 어깨를 두드리며 드낙이 속삭였다.
“세파리아스는 왔느냐?”
신황제의 이름을 감히 입 밖에 내놓았지만 드낙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하하하! 신제국도 너무 중앙에 집중한다니까! 균형 발전이 좋다니까!”
그 말에 기사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 좋다. 생각만 좋았다.
‘중앙발전은 무조건 옳다.’
기사도 알 정도로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게 답이다. 대한민국에 서울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강국이 되었을 수 있었을까? 결코 아니다. 그만큼 집중했기에 그만한 순위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전 세계를 봤을 때, 초거대 도시가 지닌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수많은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막대한 밀도로 똘똘 뭉쳐야 했다.
대구와 대전, 구미나 부산이 어찌 뉴욕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서울이라면 나쁘지 않게 여겨진다.
세계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서울처럼 중앙 집중 발전한 도시가 하나쯤은 필요한 법이다.
신제국 또한 마찬가지다. 외곽은 소홀하게, 중앙은 단단하게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 덕에 그가 늦었지만 크게 본다면 그게 옳았다. 세력과 세력. 국가와 국가의 싸움에서는 서울 같은 집중 도시를 여럿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거기에 다종족 연합의 초월자께서도 집중 발전을 택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돈을 뿌리고 있지만, 백색 빛 엘프(White Shine Elf)들을 열일곱 개의 엘프 서클 시티(Elf Circle City)에 집중하여 분배한 것도 그러했다.
엘프 전 종족이 고작 열일곱 개의 도시에 집중되었다. 그 규모와 거기서 나오는 효율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뻔했다.
한 민족이 아니라 한 종족이 열일곱 개의 도시에 집중되었다. 그게 어찌 집중 발전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드낙이 베풀어주는 균형 발전은 실로 모순적이었다.
남들이 따라 할 수는 없고, 드낙 정도 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드낙이 국가다. 그의 말이 있었기에 밑에 사람들에게 그냥 갑자기 세금 명목으로 돈이 떨어지기도 한다.
도렌의 기본 소득이 실질 경제에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 밝혀져서 기본 소득제는 보편적으로 퍼져갔다.
재산의 정도에 따라 차등이 있었기에 기본 소득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실질 경제에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돈이 바닥인 사람에게 돈을 줘서 소비를 시키기 때문에 바로바로 경제에 도움이 됐다.
물론 그렇게 많이 주지는 않았다. 너무 격한 경쟁은 좋지 않았다.
‘뭐든지 적당히가 좋지.’
적당히 먹고살 만하면 세상에 대한 불만은 딱히 하지 않는다.
그게 민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별다른 일은 없고?”
“예. 조용합니다. 벌레 한 마리조차도 없다는 것이 너무 이상합니다.”
기사의 말에 드낙이 실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심각한 표정이다.
“그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닌데.”
드낙은 주변을 걸어 다녔다. 기사는 남고, 보좌할 이들이 따라다녔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기록했다. 신제국의 황제가 온다면 이를 넘길 생각을 가졌다.
드낙은 굳이 방해하지 않았다. 굳이 세파리아스와 자잘한 것으로 각을 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물은 있다. 그런데 벌레가 없다. 이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안 그런가?”
“예. 실로 그러합니다.”
마법으로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단순히 불을 지르는 게 아니라, 벌레만 쏘옥 빼먹었다는 소리다. 개미핥기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기에는 그 규모가 컸다.
일대의 벌레가 싹 다 박멸된 상태였다.
‘무슨 무슨 생태계적 학문에 따르면 벌레가 없으면 큰 문제가 된다고 하던데…….’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식을 축적하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아무튼 무슨 무슨 이유가 있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현대인의 명예를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