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0화
“무엇이냐. 뭘 봤느냐.”
“후하하!”
세파리아스가 순식간에 돌변한 드낙을 보며 크게 웃었다.
그는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참았다. 그는 드낙을 죽이는 검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그는 드낙을 등지고, 밖을 향해 뻗어나가는 인류의 검이다.
그게 바로 드낙이 세파리아스를 아직도 살려두고 협력하는 이유였다. 그 이용 가치가 사라지면 결국 드낙과 세파리아스의 관계는 금이 가고, 이내 썩고 부서질 것이다.
강력한 힘은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물며, 변수가 많은 인류가 낳은 최강의 존재가 세파리아스 불파겐이다.
검은 꿈으로 성공한 드낙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던 인간이다.
세파리아스의 기세가 사라졌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뉴에이지 시티였던가? 그곳의 식량이 탐나는데…….”
“내가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지구인을 포로로 삼았으니, 몇 년 내로 식량이 썩어 넘칠 것이다.”
현대 맛을 보고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배추가 비싸다고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도 값이 제대로 안 나온다며 배추를 싹 다 엎어버리는 게 농민의 심보다. 중간 유통 상인들의 횡포 또한 대단하다.
‘하지만 테라는 다르다. 내가 지배하는 곳에서 그런 일은 용서할 수 없다.’
이득은 얻되, 폭리는 취할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처럼 개인이 50조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구조가 될 수 없었다.
드낙조차도 수중에 돈은 많지 않다. 유동성을 만들기 위해 끝없이 사업을 만들어내고, 소비를 촉진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테라는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는 경제 성장률을 이룩해 내고 있었다.
모두 죽기 살기로 내달리고 있다. 누구 하나 저축도 하지 않고, 쏟아붓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정말로 몇 년 뒤에는 식량이 썩어 넘칠 수 있었다. 단순 과학 기술이 아니라 마법에 신성력까지 있는 곳이 테라였다.
세파리아스의 걱정은 드낙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인 셈이다.
눈치를 챘는지 신제국의 황제가 빵긋 웃었다.
“생각 이상으로 과학 기술이 주는 효용성이 대단하군. 네가 그 정도로 확신하다니. 걱정을 크게 덜었다. 사실, 악마가 침공하기 전에 다른 세계를 침공할 생각이었거든.”
“자중하라고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다른 세력이 발을 걸치려는 것은 내가 알아서 잘라낸다. 간접적 지원은 받는 것으로 끝내도록 한다.”
“말귀를 알아먹어서 좋아. 하하하.”
드낙이 웃었다. 이내 그가 음습하게 말했다.
“오크들이 뭘 꾸미고 있지? 내가 봤을 때는 큰일을 벌이는 것 같지 않은데.”
“아직도 널 신앙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들이 번성하는 만큼 녹슨 도끼만 좋다. 어디까지 그들을 용인할 생각이냐.”
“…오크들은 날 섬기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다.”
“바다를 지배해도 오크들의 인구 증가율은 비정상적이다.”
드낙은 그제야 세파리아스가 생각하는 ‘위협’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늦게 알아차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저 세파리아스가 아득할 정도로 먼 미래를 생각하고 있어서다.
“테라의 신은 나 혼자뿐인 줄 알았는데, 너도 테라가 망하는 꼴은 못 보는 것 같네?”
“흥. 자기 본진이 내분으로 불타는 걸 볼 기사가 세상 어디에 있느냐.”
“…….”
드낙이 혼자 고민에 빠졌다. 경박한 기세는 싹 사라졌다.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의 끝없는 번목.
드낙을 믿지 않는 오션 오크들은 녹슨 도끼를 믿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의 끝에는 반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파리아스는 외부로 팽창하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오션 오크는 다르다. 이 테라에서 살아가고 있다.
중립신이 만든 테라는 영원히 팽창하는 행성이지만 미완성으로 끝났다. 중립신이 도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드낙의 테라는 한계가 존재했다. 행성은 더는 커지지 않는다. 중립신이 약속한 필멸자들의 세상은 그가 죽음으로써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결국에 오션 오크들은 정복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힘이 쌓이면 풀 곳이 필요하다.
“…너무 너한테 좋은 이야기 같은데. 네놈의 정복 전쟁에 오션 오크들이 참가하게 되는 거니까.”
“애새끼처럼 칭얼거리지 마라.”
“부딪치지 않는다고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서로의 눈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드낙의 몸 곳곳이 그림자로 변하고, 파동으로 변했다. 그 기척은 세파리아스를 포위하듯이 퍼져나갔다.
새로운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드낙은 세파리아스의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 그 자체를 베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도달하기 전에 베어버리니 세파리아스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무(武)의 극의(極意).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 드낙은 매번 테라를 돌아다니며 노력하는 편이다.
“보인다.”
그때, 세파리아스가 한마디 했다. 그리고 드낙이 눈을 부릅떴다.
그 찰나에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림자와 파동으로 변했던 드낙의 몸이 다시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주룩.
손가락에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림자로 변했던 손가락이다.
‘세상을 속이는 파동에는 닿지 않았지만, 그림자에는 닿았다.’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괜히 쫄았네.’
“깜짝 놀랐네.”
“방심하지 말라는 소리다. 언제 네놈의 파동을 내가 베어낼지 모른다.”
황제가 되었음에도 세파리아스는 수련을 하고 있다. 익히 들어서 귀에 딱지가 내려앉을 지경이다.
세파리아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는 드낙과 오래 대치하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내몰린다면 결국 승리하는 것은 드낙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기에 드낙도 장담은 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와 드낙은 다르니까.’
세파리아스는 수련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성장하지만 드낙은 그저 조깅만 해도 숙련도가 오르고, 실력이 조금이라도 상승한다.
그 재능의 차이는 크다.
인류가 낳은 인간과 중립신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끌어당겨 진 인간의 차이였다.
“오션 오크들은 이미 나에게 동조했다. 너의 허락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나보고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어지간히 네놈을 무서워하는 것 같더군.”
오죽하면 신제국의 황제가 더 낫다고 여길까.
“내가 오션 오크를 괴롭힌 적은 없는데.”
“보지 않았기에 그 공포는 더욱 커지는 법이지.”
“너랑도 싸우지 않았잖아.”
세파리아스는 거기에 답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를 못 느끼는 듯했다.
“대답은? 오션 오크도 결국은 땅이 필요하다. 그들은 나도 물론이고 너 또한 믿지 않는다. 녹색 도끼를 믿을 뿐이지. 이 테라에서 놈들은 주(主)가 될 수 없다.”
근본이 잘못되어 있었다. 다른 신을 섬긴다는 건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했다.
지금은 마신(魔神), 악마(惡魔), 지구의 인신(人神)들까지 이곳을 노리고 있기에 용인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난다면 군대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오크는 호전적이니까. 당장의 평화에도 결국 그들의 송곳니는 어느 한 곳으로는 향해야 한다. 하지만 세파리아스에게 오크들까지 가세하는 게 바른 일일까?’
“인류의 힘으로 신적 존재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나? 오크까지 함께하게?”
“이중전선으로 나아가면 되니까. 하하하하!”
세파리아스가 크게 웃어 보였다. 아주 자신만만했다. 드낙이 식량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를 철석같이 믿는 눈치다.
아직도 식량이 부족한 곳이 있었기에 드낙은 이를 부수기 위한 식량 계획을 무려 두 번이나 사용했다.
부족하면 세 번, 네 번 하게 될 것이다.
‘즉, 지금 부족해도 거기서 포기할 드낙이 아니란 소리지. 놈은 평범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식량 자유 계획이라는 거창한 것까지 실행했었던 놈이었다.
테라가 안전할수록 세파리아스와 오션 오크들은 전쟁을 끝도 없이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확신하자 드낙 또한 그를 돕기로 했다. 오션 오크의 호전성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세파리아스. 그렇다고 너무 죽이지는 마라.”
“죽이지 않는다. 광산노동형에 처할 뿐이다. 네 말대로 그렇게 하는 게 시민들에게 좋고, 국가에도 좋으니까. 범죄를 여러 번 치르면 평생 사회로 돌아오지 못한 채로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생을 마감할 것이다.”
“크크큭.”
드낙이 실로 기분 좋게 웃었다. 범죄자들이 몰락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최고의 여흥이다. 매번 볼 때마다 재밌다. 항상 또 보고 싶었다.
“신제국의 작은 혼란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냐?”
“응? …내가 여기에 왜 왔더라?”
“실없는 녀석.”
드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그의 순찰은 테라의 행성 적도 부근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끝낸다. 악마가 되었기에 모든 것을 일일이 순찰하지 않아도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수에 대한 기운은 더더욱 알기 쉽다.’
마신의 종복인 마수들은 그 기운이 실로 특이하다. 만약 어딘가에서 수작질을 부린다면 능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외에는 가족끼리 식사를 하거나, 현대 지구의 문물을 구경하며 문화의 힘을 체감하며 자신의 사업 거리를 떠들기도 했다. 실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드낙이었다.
‘내가 왜 여기 왔더라? 그냥 와본 건가. 괜히 세파리아스를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어.’
* * *
신제국 범죄자 32번 갱도.
“소문 들었어?”
범죄자 광부 여럿이 모였다. 그들은 결코 가져서는 안 되는 날카로운 돌칼을 하나씩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말을 하면서도 갱도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수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것이 범죄자 노동 광산이다. 조금 어둡다고 해서 곳곳에 등불을 피우지는 않는다.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빛으로 가득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들은 벌을 받는 것이다. 범죄자에게 쓰일 돈은 최소로 해야만 한다.
“빌어먹을. 이러다간 그냥 죽을 뿐이야. 어둠의 존재라고, 어둠의 존재.”
“분명 드낙, 그 초월자가 우릴 재미로 죽이고 있는 거라고! 너희도 알잖아! 그림자를 다루는 거! 지금 우리를 농락하고 있다고…….”
로노베 후작이 만든 그림자는 극히 일부분만 마수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드낙의 기감에도 잡히지 않았다. 가까이 있다면 드낙이 낚아챘겠지만 드낙은 이 정도의 양으로 순찰에 꼼꼼함을 발휘하지 않는다.
마수의 기운이 크면 위협적이다. 놈들이 수작질을 벌인다면 능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수 로노베 후작은 달랐다. 그가 퍼뜨린 그림자는 테라의 것을 사용하여 몸집을 불렸다.
즉, 테라의 생명체라고 오인할 만큼 기운이 자연스러웠다.
그 송곳니는 빠르게 지하 광산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의문스러운 죽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신성력도, 물약도, 그 어떤 의료 행위도 없었기에 자연히 은폐되었지만, 실제로 어둠 속에서 광부 짓을 하는 범죄자들의 촉은 확실히 달랐다.
그림자가 그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나는 확실히 죄를 지었다. 근데, 죽을죄는 아니다. 죽을죄는 아니라고!!”
그가 벌벌 떨었다. 그는 다시는 자기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는 있었다.
‘근데 지금은 아니다! 난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을 거야! 그림자한테 잡아먹혀서, 다른 놈들처럼……!’
“나도다. 나도 죽을죄는 안 지었다.”
“이대로 그림자한테 잡아먹혀 죽나,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나, 거기서 거기다.”
“술이라도 한 병 근사하게 먹고 그냥 죽으련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며 가오를 잡았다. 그래도 모두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가서 간수를 죽이고 튀어버리는 것이 더 좋았다.
“우리랑 같은 생각을 하는 놈들이 제법 된다. 누군가 먼저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럼…….”
“우리가 시작을 딱 끊으면 다른 놈들도 난리를 칠 테니, 금방 성공할 거다.”
그렇게 말하는 놈이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상하게 뻐근해서다.
그의 그림자가 마구 움직였다.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같았다. 로노베 후작의 그림자 생명체가 다른 곳으로 향하여 그들의 감정을 충동질했다.
생존본능을 충동질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간단한 계략을 짰고, 그들은 서로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동시다발적으로 탈주를 감행했다.
“죽어어어엇!”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어디 탈옥을 하려고!”
그렇게 고함을 지르던 간수들의 표정이 싹 변했다.
‘한둘이 아니다!’
“병영으로 가자! 이대로는 개죽음이다!”
서둘러 도망쳤다. 당장은 도망치는 게 먼저였다. 물론 혁대에 달아둔 아티팩트를 조작했다. 메시지 마법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단순한 ‘신호 마법’이다. 멀리 퍼져나가지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댕댕댕댕댕!
맑은 종소리가 단번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반 간수들과 병사들을 모두 병영으로 불러들이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