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8화
5. 신제국의 그림자
칠흑의 후작.
로노베(Ronove).
테라에서 손을 뗀 것처럼 보였지만 마수들의 침입은 확실히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테라에 대한 데이터는 꾸준히 수집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마신(魔神)은 로노베를 배정했다.
마계(魔界) 하위 차원, 카르보른 행성에서 활약하도록 명령서를 내렸다. 마신이 원했던 대로 로노베는 성공적으로 테라에 진입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일부만이 진입에 성공했다.
그 누구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노베는 좌표만 있다면 그 어떤 ‘초월의 힘’의 소모 없이 자신의 일부를 전이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마수가 지닌 무서움이었다.
수많은 마수가 존재했고, 그 종류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았다. 지금도 마계에서는 온갖 종류의 마수가 태어나고, 죽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인간이 지닌 변수를 창출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마수가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지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 속에서 태어나 최상급 존재로 우뚝 선 것이 로노베였다. 아쉽게도 그림자 후작은 생식 기능이 존재하지 않아서 자손을 퍼뜨리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로노베’라는 마족 종족은 한 마리뿐이다.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그림자. 질량조차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작은 그림자는 꾸준히 테라에 전이되었고, 이내 손가락 마디만큼 커졌다.
그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깡. 깡. 깡.
땅을 타고 소리가 퍼져나갔다. 아주 멀리 있었다. 작은 그림자는 조용히 꾸준히 끝없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림자는 손바닥 수준으로 커졌다. 그 정도로 커졌음에도 그 어떤 ‘초월의 힘’도 감지되지 않았다.
완벽하게 초월자를 카운터 치는 존재가 이등신의 고블린처럼 조잡한 육신을 지닌 마수(魔獸), 로노베이며 그렇기에 그는 칠흑의 후작이라는 칭호를 마신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지금 로노베에겐 이 테라를 지키는 가장 거대한 파수꾼인 드낙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어떤 신도, 악마도 그를 직접 보지 못하는 이상,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이는 그림자의 크기가 매우 작아서 가능했다. 그 그림자는 그만큼 미약했다. ‘초월의 힘’ 내지는 대기에 존재하는 마력. 그런 것과 크게 특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했다.
드낙은 주기적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있었으나, 그는 파수꾼보다는 암살자와 추적자다. 개미 한 마리를 위협적으로 느끼는 사냥꾼은 없었다.
최소한의 근거.
최소한의 위험이 있어야 했는데, 지금 이 손가락만 한 그림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마치 단세포처럼 새겨진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이질적이지만, 미세하다. 육체도 무엇도 가지지 못한 그림자 조각에 불과했다.
다만, 고작 그림자 조각이다.
그 이상으로 커진다면 드낙의 감각에 반드시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테라의 파수꾼이며, 초월자다.
특히 드낙은 그림자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그림자로 변하여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요령, 또 하나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계속 주기적으로 테라를 순회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자주 이동방식을 바꾸는 건 드낙답지 않다.
수련하듯이 이동방식을 바꾸는 건 세파리아스가 무서운 기세로 자신의 처세를 실현하고, 밖으로 팽창함과 동시에 ‘신’으로서의 면모 또한 빠르게 움켜쥐고 있어서다.
그는 아직도 향상심을 지니고 있었고, 이 때문에 드낙 또한 거기에 걸맞게 움직여야 했다.
‘세파리아스는 독이 든 성배지.’
마실 수밖에 없다. 안 마시기엔 너무 가치 있는 놈이었다. 그걸 버티면 개꿀이고 못 버티면 망한다.
세파리아스는 그 정도 도박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드낙을 대신해서 신 노릇을 할 수 있는 놈이다.
최대한 편하게 지내다가 차원 다리를 뚫어 현대문물의 아름답고 자극적인 문화를 들어와서 재미나게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드낙이다. 신이 되었다고 해서 그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 욕망은 되레 확장하여 다른 이들에게 자극적인 현대문물의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였다.
‘뉴에이지 시티’ 같은 제국의 대산맥 자체를 밀어버리며 만든 거대한 개혁을 추진할 정도로 드낙은 안달이 난 상태다.
그 상황 속에서 이 음습한 그림자 조각은 곧 사그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마신(魔神) 또한 그리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몇 번이나 간을 보고, 테라에서 이득을 쟁취해왔다. 거대한 차원 영토를 지니고 있음에도 테라에까지 손을 뻗고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 거리는 대단히 멀어서 손해라고 할 만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신이 테라에 크게 관심이 있는 이유는 당연히 중립신이 부활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중립신의 낙인’이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초월자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림자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깡! 깡!
진동이 느껴지는 곳으로 꾸준히 움직인 끝에 이내 흙과 물, 돌을 헤쳐나가고 있는 죄인들에게 닿았다.
죄인들은 발목에 간단한 가죽 아티팩트를 차고 있었다. 일정 시간 혹은 일정 속력 이상으로 달리면 발목의 가죽 아티팩트에서 불꽃이 치솟아 오른다. 폭발은 하지 않는다.
불꽃이 폭발하는 건 마력이 제법 필요한 일이었다. 가죽끈으로는 만들 수 없었다. 그렇다고 쇠를 찰 수도 없었다.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탓이다.
“빌어먹을, 겁나게 덥네. 오늘 할당량은 또 언제 채우냐.”
한 놈이 말을 내뱉자 너도나도 곡괭이질을 멈췄다. 개 같은 세상이었다.
“제기랄! 난 그냥 뒷돈 좀 굴릴 것뿐인데, 왜 광산노동형이냐고!”
“요즘 징역이 있기는 하냐? 죄다 광산으로 보내고 있을걸?”
신제국은 잔혹한 나라였다. 그곳은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가혹한 곳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전시체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른 놈들은 이제 준비를 하는데, 무식하게 마법진을 그리고, 땅을 다졌으며 그 땅에 쇠를 부어 넣어 마력을 담을 거대한 그릇을 마련하고 있었다.
말해서 무엇하리.
세파리아스 불파겐. 신제국과 황제는 벌써 차원 침공의 토대를 만들고 있었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거기에 투입하는 만큼 다른 곳이 삐걱거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범죄인력을 생산적인 일에 써야 했다.
좀도둑. 사기꾼.
그런 놈들에게 가혹하리만치 큰 광산노동형이 부여됐다. 토지 자본에서 산업 자본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드낙의 말을 들어 그들을 산업노동자로 쓰기 위해서다.
그 덕에 신제국의 발전은 제법 그럴듯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발전을 대충 따라만 가도 신제국은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도 먹을 건 많이 주잖아?”
“그건 그렇지.”
반론은 없었다. 먹는 것도 거지 같이 줬다면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을 것이다. 인간이란 건 참으로 단순해서 의식주만 해결되어도 거기에 안주하기 마련이다.
드낙을 통해서 대중을 이해한 세파리아스의 흉포한 단검이 바로 먹을 것만은 풍족하게 준다는 점이다. 거기에 하루에 동화 몇 닢이라도 일당으로 저금이 된다. 물론 그들에게 쥐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복역을 마치고 나왔을 때, 지급한다.
이 또한 매우 똑똑하다 할 수 있었다.
광산 징역형은 최소 3년이다. 좀도둑도 예외는 없었다.
그 정도로 범죄자를 악독하게 다루고 있는 게 신제국이다. 남의 것을 탐하려 했다가 3년 동안 국가와 시민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즉, 일당으로 동화 몇 푼을 쥐여주는 것조차 당장 돈이 빠져나가는 게 아니다. 3년 뒤에 지급된다. 3년짜리 채권이나 다름없다. 채권과 다른 점은 이자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료 봉사나 다름없었다. 시급 30원짜리에 동원되는 군역보다 더했다. 광부 일은 그만큼 힘들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곳에서 나갈 때가 되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좀도둑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일한 만큼 남이 잘되는 꼴이다. 내 죄를 뉘우치는 건 상관없지만 남 좋은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광산형은 비틀린 인간에게 가장 효과적인 형벌이다. 만약 범죄자들이 일한 일당이 전국적으로 모여져서 일반 시민에게 로또처럼 지급된다면, 죄를 저지르기 전에 한 번 고민하게 될 것이다.
“후끈해서 쉬는 게 쉬는 것 같지 않네.”
지열 때문에 그냥 더웠다. 쉬려면 밖에 나가서 쉬는 것이 더 낫다.
그들은 몸에 물을 뿌리고,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그들이 캐낸 광물은 적법한 과정을 거쳐서 거래된 뒤에 시민들이 낼 세금을 낮추는 데 사용될 것이다.
‘범죄자 광산 면세’는 신제국의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면세법 중 하나였다.
범죄자 새끼들이 벌어오는 돈이다. 직접 돈은 받지 않지만, 세금을 덜 내는 데 도와줬다. 기특한 범죄자 새끼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의 그림자에 그림자 조각이 스며들어 갔다.
거기서 마수(魔獸) 로노베(Ronove)의 진짜 무서운 면모가 드러났다.
스스슥…….
그림자보다 어두운 그림자. 그것이 서서히 옅어지며 펼쳐졌고, 밀도가 낮아지며 테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림자의 성질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이질적인 마수의 면모가 아니라, 그것은 분명 테라에서 나온 초월의 힘 내지는 마력이라 여겨지는 속성으로 변환되고, 뒤섞여졌다.
그것은 실로 모호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됐다. 그 존재는 로노베라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로노베라고 할 수도 없다.
그 마수는 1%의 로노베이며, 99%의 테라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자 혼합’이야말로 그림자 후작, 로노베의 진짜 무서움이라 할 수 있었다.
로노베는 테라의 생물에 가까운 구성물질을 지니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범죄자의 척추에 들러붙어 그가 지닌 생체 에너지를 조금씩 빼앗기 시작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빨아먹지 않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하루를 빨아먹고, 이내 다른 범죄자로 옮겨가며 ‘초월의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 * *
쾅!
신제국의 제국인이 단상을 내려쳤다. 그의 주위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소! 우리는 역사에 유례없는 이중세에 시달리고 있소! 자식은 징병되고, 부모는 병역세를 내야 하오! 심지어 그 부모는 일 년에 5주에 달하는 훈련을 겪어야 합니다!”
“이게 나라냐!”
“나이 40 먹고 예비군 훈련이 말이 되나!”
이중세 이슈에 대한 논란은 벌써 3개월째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세파리아스는 그걸 진압하거나 어떤 대책을 내놓은 것도 아니었다.
‘어리석은 자들.’
세파리아스는 실로 잔혹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대중들의 니즈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개 같아도 먹고살 만하면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신제국은 경범죄자는 중범죄자든 죄다 산업 인력으로 투입하고 있다.
그들이 흘리는 피땀은 시민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제국의 황제는 그런 걸 가능하게 할 권력이 있었다. 그 덕에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수백에 달했고, 그들 외에도 술집에서 떠들 때도 신제국의 개 같은 점을 논하긴 했지만 정작 횃불 하나 들고, 행진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저 입으로 떠들기만 하며 그 악독한 법들이 사라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겠다는 허황된 생각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구심점(求心點)도 없었다. 실력 있는 이들을 모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밥그릇이 준비되어 있는 게 신제국이다. 당장 차원 다리를 짓고 있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신념과 야망을 지닌 이들이 투입되고 있었다.
정복욕!
그것에 눈이 먼 수많은 영웅이 자신들의 출세욕을 그곳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들의 꿈을 펼치기에 충분한 것이 세파리아스의 꿈이다. 인간에게 빌붙어서 업(業)을 받아먹고 있는 기생충 같은 외신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죽이는 것이 그 꿈이다. 여기에 혹하지 않을 인간은 거의 없었다.
일반대중들은 당장 자신한테 큰 피해가 오지 않았기에 거기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냥 들어도 인류 찬양적인 꿈이었기에 동참하면서 자존심도 높일 수 있었다.
신제국은 명백히 이 테라에서 밖으로 겨누어진 유일한 인류의 검이었다.
‘물론 저대로 놔둘 수는 없지.’
신황제가 마법 시야를 통해서 가만히 이를 지켜보며 씩 웃었다.
3개월간 기다린 이유는 간단하다.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놈들을 솎아낼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파리아스가 주의 깊게 본 것은 바로 ‘선동가’의 재능을 지닌 자들이었다.
‘반드시 쳐 죽여야 할 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