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7화
흑요석 사업 구조 지도의 꼭짓점에는 한 입 베어 문 사과 문양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보통이라면 황금 사과를 생각하여 도금을 할 테지만, 사과 자체도 흑요석으로 빚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탐욕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보자…….”
세리안 불파겐이 혼잣말을 하며 흑요석의 사업 구조 지도를 훑었다.
그것은 난해하기 짝이 없었는데, 연습장에 휘적거린 것처럼 구분 없이 대충대충 적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기회의 땅으로 삼아 ‘인간 종족’의 인재를 극한으로 중용하여 전쟁을 대비한다. 백 명 중의 한 명을 찾을 것이요, 만 명 중의 한 명을 찾는다면 인간은 그래도 다른 종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수가 높은 인간 종족을 믿는다.]
“…….”
하나하나 살펴볼수록 이들의 표정은 점점 묵직해져 갔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지도였다.
[상위 인간만 있다면 인간의 경쟁력은 감소한다. 엘프와 비교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과 마력을 지닌 인간이 함께한다면 엘프와는 비교할 수 없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질 수 있음이다. 이는 곧 인간의 강점 중 강점이다.]
[공평한 경쟁. 공정한 경쟁. 그 속에서 인간이 과연 다른 종족보다 많은 지분을 가질 수 있을까? 다종족의 신이 어찌 인간만 편애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그들에게 다른 종족이 불만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까? 노력, 노력, 노력해야 한다.]
“…….”
그 누구도 감히 입도 뻥긋하지 않고, 손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글자를 매만지며 글을 읽어나갔다.
괴이하게도 이 흑요석은 음각(陰刻)하지 않고 양각(陽刻)했다. 글자만 파내지 않고, 글자 외의 것을 전부 파내서 글자가 툭 튀어나오도록 만들었다.
거기에 들어간 노력.
심력.
그 모든 것이 인간을 뜻하고 있었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이 예술품에서 그들은 끝없이 밭을 일구고, 짐을 나르는 가장 하찮은 계급에 존재하는 인간을 떠올렸다. 그들의 투박한 손을 만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파리아스가 오로지 ‘외적’에 대한 적의로 인간을 찬양했다면, 드낙은 그와는 정반대되는 방법으로 인간을 찬양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해야만 하는 것. 그리고 생존에 대해서 논하였다. ‘위기’를 통해서 인간을 찬양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위기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 위기에서 인간이 해야 할 것 또한 적혀져 있었다.
대부분 드낙이 만든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테라라는 곳은 그런 곳이다.
중립신, 엘 마르토 카사다민이 자신이 죽을 곳을 정한 곳이며 부활하여 신들의 땅을 다시 탈환하기 위한 시작점이 될 차원이었다.
고로, 이곳은 다종족이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으며 드낙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다른 종족을 모두 죽인다면 테라의 방위는 뱀 허물이나 다름없다. 쉽게 찢기기 마련이었다. 악마 한 마리조차 못 막아서 끙끙거릴 터였다.
그것이 중립신이 그린 방위 체계이며, 종족 체계였다. 지휘체계라 불러도 무방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몫이 있었다. 그 ‘몫’이 이곳에 적혀 있는 것이다.
“…엘프들은 그릇을 키우고 있고, 점점 정예화를 넘어서 챔피언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인간은 그런 것에만 집중해선 안 된다. 적당한 가치와 압도적인 숫자가 필요하다…….”
흑요석에는 각 종족의 장점을 조금이라도 상쇄하면서 머릿수를 키워야 한다고 적혀져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식량이요, 식량이요, 식량이었다.
그렇기에 산맥을 싹 밀어버리고 거대한 평야를 만들었다. 프랑스의 초거대 평야보다도 더 넓은 평야를 만들었다.
육체 변이의 스페셜리스트.
악마의 좌에 앉지 못했다면 해내지 못할 것이며, 힘도 많이 소비해야 했을 터다.
다행스러운 건 드낙은 훌륭한 악마였고, 악마와는 다르게 신처럼 수많은 필멸자로부터 업을 받아먹고 있다는 점이다. 무한동력을 지닌 항공모함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아니었다면 ‘뉴에이시 시티’는 개발될 수 없었고, 이 평야 또한 만들 수 없었다.
평범한 신이었다면 힘의 소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필멸자의 곡괭이에 의지해서 제국의 대산맥을 깎아야 했을 터다.
“어찌 생각하시오?”
상위 국왕 도렌이 물었다.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 뉴에이지 시티는 미래를 보고 있었다.
“지금 밖에는 환호하는 인간들뿐이지만, 세대가 흘러가면 결국 인간은 사회계급의 가장 낮은 곳에 있을 것이오.”
반박은 없었다.
머릿수가 많은 지하 연합? 뿔 쥐들이 존재하는 한, 그들이 인간보다 낮은 의자에 앉을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인간과는 다르게 지하 연합은 드낙의 입맛대로 변하고 있었다.
철이 들어있는 대변을 배출하는 고블린이 그러하다. 그건 소름 돋을 정도로 꺼림칙하지만, 멀리서 보면 입이 쩍 벌어지는 밥그릇이었다.
“이 밥그릇은 인간을 위한 밥그릇이오. 물론 다른 종족도 이득을 볼 수 있소. 식량이란 건 이곳, 저곳으로 운반할 수 있으니까.”
그 주체가 인간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이건 전쟁이다. 지하 연합과의 싸움이다. 이건 식량 전쟁의 서막이다.”
지하에서 나는 식량보다 평야에서 나는 식량이 실로 대단한 법이다. 이에 다른 이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면전은 아니나, 지하 연합과의 한판 대결이 예정되어 있는 게 식량 사업이다.
“뿔 쥐들은 이미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세리안이 음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초월자께서도 이를 알고 계실 터. 그렇게까지 거센 싸움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
드낙은 알아서 가림막이 되어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대평야를 만들었을 때, 모든 인간의 여력을 집중시켰을 터였다.
이를 논하자, 그제야 다른 상위국 국왕들이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지.”
“초월자께서는 지금까지 항상 인간을 위하셨지 않나.”
“그럼, 그럼.”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드낙이 그 정도로 잔인하게 인간을 밀어 넣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노력하는 것뿐이다!”
길게이의 말을 세리안이 받았다. 그녀의 외침은 갑작스럽기 그지없었다. 전시(戰時)체제에 들어선 지휘관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저열한 계층을 이곳에 잔뜩 모았다. 그분의 뜻을 모르는가?”
이에 모두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알겠다.’
‘모든 퍼즐 조각이 모였다.’
‘그분께서는 이토록 숭고한 일을 하려고 했는데, 나는 어찌 탐욕만 부렸을까.’
“지금은 인간을 위해서 화합을 해야 할 때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사사로이 이익을 탐하려 하는가. 인간의 울타리 너머를 보라! 무엇이 있는지를 봐라!”
“누구보다도 초월의 길을 확실하게 걷고 있는 엘프가 있다.”
상위국의 국왕들이 한 마디씩 다른 종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흑요석 테이블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맹세와도 같이 숭고했다.
“바다를 누비며 타투를 쌓으며 끝도 없이 머릿수가 많아지는 오션 오크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단한 드워프.”
“지하의 지배자가 된 지하 연합……. 그리고 뿔 쥐들!”
인간의 경쟁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밥그릇을 챙기려 했다.
드낙은 그들을 이곳으로 인도했다. 지금 인간이 얼마나 위태로운 위치에 서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인간을 이용해서 그들을 새사람, 새 일꾼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뉴에이지 시티의 진짜 목적은 인간 종족의 전력 강화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드낙으로서는 이들이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도렌 상위 국왕은 이를 통해서 한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세리안 상위 국왕께서 신제국의 신황제를 설득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는 다른 차원을 침공할 생각밖에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테라에서의 점유율 싸움입니다.”
이에 세리안이 깊은 탄식을 했다.
“아! 인간 외의 종족은 테라에서 살기 바쁜데, 우리 인간은 이미 둘로 쪼개져 있구나!!”
신제국은 차원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테라에 깊은 뜻이 없어 보였다.
이는 큰 문제였다.
안 그래도 열세인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지금 세파리아스의 행동으로 보면 종족 방향성이 반으로 쪼개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낙은 뉴에이지 시티와 제국 대평야를 통해서 인간을 위하고 있었지만, 세파리아스는 오로지 전쟁뿐이었다.
동시에 세리안은 세파리아스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모든 것 불살라버릴 수 있는 사내였다.
“그의 신념을 꺾으려면 그를 죽여야 할 것이오.”
그녀의 말에 다른 이들은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세파리아스는 진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
“초월자께서도 신황제가 테라 내에서 활동하는 걸 반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긴 할 겁니다.”
세파리아스는 밖으로 뻗어나갈 창부리다. 그걸 안으로 돌린다면 그 칼날이 테라를 베어 피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방향성은 밖으로 향하는 게 좋았다.
그게 드낙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이 흑요석에 새겨진 것을 보자면 이미 농업… 아니, 뉴에이지 시티를 통해서 경제 전쟁이 시작되는 건 약속된 것이나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곱씹어 생각해도 모든 인간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크온 상위 국왕은 벌써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포기하자는 건가? 뉴에이지에 들어선 이들은 부랑자와 고아, 패배한 계층의 인간들이다. 그들이 어찌 식량 전쟁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되레 우리들이 너무 나선다면 지하 연합의 시선을 모을 겁니다. 그곳은 이미 고도화, 상업과 산업에 닥치는 대로 달려들고 있어서 쉐도우 위스퍼의 영향력은 빠르게 소모되고 있습니다.”
“군축하기 시작했다는 말도 떠돌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마신은 물러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간악한 자가 테라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오벨리스크 사태를 잘 알지 않습니까.”
마신의 한 입 빼먹기는 앞으로도 꾸준할 것이다.
드낙이나 다른 이들 또한 열심히 이를 막겠지만, 매 순간 이를 면밀하게 정찰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초월자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뿔 쥐들의 이목이 서슴서슴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차라리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딱 다섯 가지 사업만 가져가서 그곳에서도 1등을 찍으면 안 된다는 초월자님의 말씀을 곱씹으십시오. 이목을 끌수록 지하 연합은 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상위 국왕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그들이 하는 것을 지켜봅시다. 2위로 남아서 그들이 스스로 1위가 될 수 있도록 천천히 도와주는 게 저희의 몫입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무엇을?”
“드낙 님께서 왜 뉴에이지 시티의 지하를 지하 연합에게 주지 않았는지.”
“과연.”
모두 그럴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번 해봅시다. 은밀하게 많은 자원을 여기에 투입할 수 있겠습니까?”
“은퇴자들. 그들은 항상 넘쳐나지. 상위국의 인력 보존을 위해서 그들을 뉴에이지에 취업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좋은 방법 같았다. 노인은 항상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이를 꺼리는 척하면서 뉴에이지 시티에 짬처리를 하듯이 쏟아버리는 것이다. 그럼 뉴에이지는 이득을 보고, 상위국 또한 복지에 자원을 아낄 수 있었다.
자식도 좋다고 할 것이다. 긴병에 효자 없단 말이 있다. 그만큼 부모를 모시고 사는 건 힘든 일이었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고,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대단한 일이다.
상위국 국왕은 흑요석 사업 구조 지도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그들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 * *
상위국이 뉴에이지 시티의 다섯 가지 사업에 발을 담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실제로 공인받았으며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는 소리와 함께 경제가 들썩였다.
동시에 외딴곳에서는 어둠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테라에 자리를 잡았다. 심지어 드낙조차도 몰랐다.
그렇게 개발된 어둠이었다. 그것은 좁쌀보다도 작았다. 아니, 애초에 부피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은 꿈틀거리는 ‘그림자’였다.
로노베(Ronove).
칠흑의 후작의 그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