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2화
* * *
마수(魔獸) 로노베(Ronove).
칠흑의 후작이라 불리는 자의 이름 또한 로노베다. 그 외의 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희소한 마수가 바로 로노베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마신의 이름을 받은 박동택 미노타우르스라고 해도 그를 하찮게 볼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잘해 보자.”
박동택과 로노베는 서로 굳세게 악수를 하였다.
로노베가 크게 웃었다. 매번 음흉한 곳에서 활약해야 했던 그는 미노타우르스와 제대로 함께하는 것에 큰 기쁨을 지니고 있었다.
“하하하! 늙은 놈들끼리 함께 잘해 보자고!”
그 말에 박동택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소의 검고 긴 혓바닥이 박동택의 콧구멍을 훑었다. 대단히 긴 혀였다.
“크크. 그대가 유일한 무장(武將) 아닌가? 당연히 잘해 봐야지.”
“엉?”
그 말에 로노베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뭔지는 모른다. 그렇기에 입으로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사기를 당한 기분, 명확하지는 않지만 꼬임에 넘어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편의점에서 나와서 걷는데 거스름돈을 잘못 받은 것 같은 괴이한 기분에 휩싸였을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미노타우르스만 해도 12명이나 되는데?”
“미노타우르스는 선봉장이 아니다. 심지어 장수도 아니지.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
보이는 모습만 해도 이미 중형급 괴물이나 다름없는 것이 미노타우르스였다. 걸어 다니는 탱크나 다름없다. 그런 자가 싸움에 끼지 않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걸 들은 로노베가 깜짝 놀랐다.
그제야 생각난 것이다.
“나 말고는 전부 미노타우르스인데…….”
“축하한다.”
박동택이 이를 축하해 줬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달랐다.
‘새로운 정보군. 마신께서는 이번 일을 매우 조심스럽게 하고 싶으신가 보다.’
현역에서 뛰는 미노타우르스가 아니라 수십 년~수백 년 동안 가만히 지낸 미노타우스르를 쓰면 조금 더 은밀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다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무장이 많았다면 크게 일을 벌였겠지만, 칠흑의 후작 로노베 혼자만 여기에 왔다는 건 분명히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으시다는 거다.’
비밀스럽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임은 틀림없다. 명령서에도 본론이 적혀져 있지 않아서다.
“대단히 비밀스러운 일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박동택이 말했다. 이를 로노베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군. 무장이 적다는 건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하니까 그런 건가……. 그럼 내가 할 일도 적겠군.”
이들은 비밀 회의장에 들어섰다. 삭막한 황토색의 배경에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었는데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구멍이 뚫리고 헤지고, 끝이 닳아있었다. 풍화되어서 색이 바랜 부분도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미노타우르스가 가득 모여있었다. 개중 하나는 조용히 뜨개질하고 있었는데 머리가 새하얀 미노타우르스였다. 머리색만 흰색이지 피부도 탱탱하고 근육질로 가득 뭉쳐진 육신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미노타우르스보다 근육 비율이 대단히 높았다. 백발의 미노타우르스가 박동택까지 자리를 잡자 소리를 크게 냈다.
“모두 모였군.”
그 말과 함께 다른 미노타우르스들도 한 마디씩 꺼냈다. 무언가 열기가 피어올라 왔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12마리의 미노타우르스 모두 마신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고, 후배들에게 커리어를 양보하며 조용히 상위 차원에서 미궁을 운영하던 미노타우르스들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A급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의 모임이었다.
“하하하하! 다 아는 얼굴이구먼!”
절로 경박하게 굴었다. 그 정도로 늙은 미노타우르스끼리 모이니 흥이 났다. 못생긴 놈들이 서로 마주 보면 그냥 웃음이 나오는 것처럼, 다 늙은 사람끼리도 괜히 서로 챙겨주고 싶기 마련이다.
“자식도 낳았다던데…….”
“벌써?”
서로 근황을 묻기도 했다. 보통 미노타우르스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다. 출세지향형에다가 본인이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 자들은 가정을 만드는 것도 싫고, 가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정에 소홀하다.
모든 열정을 가정에 투자할 수 없어서다. 그렇기에 서로의 근황을 묻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미노타우르스들의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신으로부터 이름을 받아야 그 커리어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신은 매년 한 마리의 미노타우르스에게 이름을 하사한다.
그 경쟁을 뚫는 건 가히 바늘구멍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일이었다. 많이 힘든 일이고 그런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미노타우르스였다.
수준이 안되는 미노타우르스는 쉽게 포기하여 마수들을 위한 미궁 사업을 통해서 살아가고 있을 정도였다.
“대단하군!”
순수하게 가정을 이룬 미노타우르스를 축하해 줬다. 자식이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 낳는다는 결정을 했다는 것부터 용자나 다름없었다.
“커흠!”
거기에 끼지 못한 로노베가 괜히 헛기침했다. 마수 종족명 자체가 이름인 칠흑의 후작이 내는 헛기침은 큰 영향력을 지녔다.
‘무장이라곤 나 혼자뿐이니.’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미노타우르스들은 해후를 뒤로 미루고 본론으로 서둘러 넘어갔다.
움직일 수 있는 ‘나이트’가 한 개뿐이니, 그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가진 명령서를 모두 꺼내 흑요석 원탁에 두고, 마신의 존재를 현현시키겠다.”
모두 자신이 가진 명령서를 꺼내 흑요석을 깎아 만든 거대한 원탁에 올려두었다.
흑요석에서 검은빛이 나오며 명령서에 깃든 마신의 기운을 흡수했다. 그리고 검은 물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 물에 몸이 닿았지만 한 방울도 묻지 않고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그렇다고 바닥에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흑요석 원탁의 표면에 가득 모인 채로 계속 흐르고 또 흘렀다.
“마신이시여! 마신이시여!”
“우리들의 신! 우리들의 삶!”
“우리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보여주소서!”
“마수들을 이끌어 주소서!”
이에 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라.”
냉막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다. ‘지배력’이라는 괴이한 초월의 힘으로 마수들의 신이 된 인간의 음성은 살얼음이 찬 냉동고에 들어서는 기분을 들게 하였다.
‘지배하되 군림하지 않는다.’라는 되먹지 못한 미친놈의 사상을 지닌 마신의 세계는 모든 것이 뒤엉킨 혼돈의 세계였다.
죽고 죽이는 것이 가볍고, 무언가를 빼앗는 것이 쉬운 세계였다. 기분 내키는 대로 착취당하는 이들은 하루에 육지로 치달아 오르는 파도의 물결 횟수처럼 일상 같은 것이었다.
마신의 차원이 마계라 불리는 까닭은 모든 것이 제대로 된 잣대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행성은 인간이 잡아먹힌다. 반대로 어떤 행성은 인간이 행성을 크게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 그 어떤 잣대도 없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마수를 위한 신인 마신은 수많은 필멸자에 대한 공평한 잣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지배력이 통하는 마수들뿐이다.
상위 차원과 하위 차원이 나눠진 까닭도 그러하다. 그의 사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발악했던 곳은 다시 정벌되고 피로 물들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악독한 사상이었다. 곤죽을 만들어놓고는 ‘알아서 해라.’고 말하며 사라지는 마신의 모습은 30년, 60년 뒤에 다시 똑같은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세대가 두 번 교체되면 마신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속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카르마라고 하기에 마신은 이미 충분히 대신(大神)이라 불릴 만했기 때문이다.
그저 잔혹한 신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지배자가 지배하지 않는 세상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지배자가 규정한 법이 없는 세상은 상상 이상으로 혼란스러웠다.
허나 그것은 마수가 아닌 생명체들이나 느끼는 것이다. 짐승이라 할 수 있는 마수(魔獸)들에게 마신의 간단한 법도는 적응하기가 편했다.
“듣겠습니다. 마신이시여!”
모두가 똑같이 말하자 마신의 다음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이름을 받은 미노타우르스들. 끝없는 어둠 속에서 찾아낸 마수. 너희가 나를 위해서 일을 해줘야겠다.”
쿵! 쿵! 쿵!
로노베가 머리를 흑요석 원탁에 꽝꽝 박았다. 다른 미노타우르스들은 발을 굴렀다.
“말씀만 하십시오! 목숨을 걸고 해내겠습니다!”
이에 마신이 응답했다.
“아주 멀고 먼 차원에 너희 새로운 전쟁터가 될지도 모르는 곳이 있다. 차원의 중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이제 새로 성장하는 주인이 있다. 압도적인 거리라 할 정도로 멀리 있다. 애초에 차원 세계에 중심이 기울고 있다는 것도 우습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하고, 회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곳으로 향해라. 조용히 암약하라. 성과를 낼 생각하지 말고, 조용히 퍼져나가라……. 마계 하위 차원에 속하는 카르보른 행성을 그대들에게 주겠다. 마수 또한 요청한다면 내어주겠다. 겉으로는 광산 개발이니, 쓸데없이 이목을 기울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하겠나이다.”
마신의 음성은 그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미노타우르스들과 로노베는 희열을 느꼈다. 그들 내부에 잔뜩 들어차 있는 마신의 지배력이 들끓고 그들에게 쾌락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검은 액체가 증발하듯이 사라지자 그들은 순식간에 열의를 불태웠다. 활력이 불끈불끈 솟아 나왔다. 그들은 정말 모든 걸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광산 행성 개발이니, 적당한 사업을 벌여야겠는데.”
은폐 작업은 중요하다.
특히 마신이 괜히 광산 행성을 준 것이 아니다.
물류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게 광산업이었다. 제련하더라도 이를 태울 용광로 원료만 해도 무시 못 한다. 물량 자체가 많기에 다른 걸 투입하든 운송하든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럴듯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미노타우르스가 하는 일이니 의문조차 느끼지 않을 터였다.
“인간들을 데려올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인간의 수명은 짧고, 그들이 광산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 또한 짧다. 더욱이 그들이 뿌리를 내리면 그들은 그들 가족을 우선시하며 살게 된다.
거대한 음모 따위, 그냥 알고 싶지 않은 딴 나라 세상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런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광석을 캐는 일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작은 울타리를 지닌 인간은 대단히 많다.
비율로 따지면 85% 정도의 인간이 평범하다. 나머지 15%의 인간에 의해서 세상은 거대한 흐름을 가진 채 살아간다.
즉, 15%의 열정적, 극단적 인간을 제어한다면 인간은 통제하기 쉬운 종족이다.
“표면적으로는 쓰기 좋겠군. 하지만 그 행성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러려면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이 행성은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니다.”
인간은 나약한 필멸자다. 그들은 외부로부터 상처를 입기 쉽기에 입을 것이 필요하고, 항상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 특히 물이라는 물질이 없으면 일주일 내로 사망에 이른다.
이런 척박한 행성에서 인간은 썩 좋은 비료가 아니다.
“오히려 그편이 더 그럴듯할지도 몰라.”
“어째서?”
“소모할 것이 많아지니까. 소비는 곧 생산을 일으켜 세우지. 마신께서 우리에게 행성 하나를 내어줬지만, 대단히 먼 차원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행성 하나를 완전히 개발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이 행성은 크기도 작지. 그 덕에 지금까지 소규모의 광산 작업만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렇다고 여기를 중심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이 행성은 그저 ‘계기’만 되면 된다. 이 행성으로 물꼬를 트고, 다른 행성의 자원을 크게 증가시키고 이를 다시 이용한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할 수 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굳이 광산 행성으로 남을 필요도 없지. 제조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미노타우르스들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큰 것을 만들었다.
그 뒤로 그들이 한 것은 그 과정 사이사이에 세세한 것을 기재하고, 더욱 현실적으로 만드는 것에 있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로노베의 눈이 들끓어 올랐다.
‘이것이 바로 미노타우르스……!’
마신의 왼팔……. 무인도에 던져놓아도 마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해 내는 ‘검은 뇌’.
끝없이 샘솟아 오르는 생각과 계획들은 다시 정리되고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봇물 터지듯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이를 지켜보는 로노베는 목이 말랐다. 미노타우르스라는 존재가 자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이다. 몸집이 아니라 머리가 끝도 없는 대해의 지평선과 같았다.
그것은 위대하다고 말할 정도로 절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