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9화
그것은 파동을 흩뿌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허공에 물결이 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고도가 제법 높았기에 평범한 이들은 결코 느낄 수 없었다.
빠르게 접근하면서도 스스로를 드러내는 건 굉장히 모순적이었다. 스텔스 전투기가 레이더를 뿜어내는 것과 같았다.
바로 미노타우르스 박동택을 향해서 정확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박동택은 파동을 손으로 훑었다.
마수들만이 지닌 육체. 그 뼈대의 특징적인 부분이 떨리며 언어가 되었다. 짐승의 언어였고, 마수(魔獸)의 보이지 않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물론 미노타우르스인 박동택은 이를 받아들이는 건 가능해도 내뱉는 건 불가능했다. 가능한 마수는 몇 종류 있었지만, 그는 금방 접근하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베르델레트(Verdelet).’
행사 담당자. 전령과 전달자. 주문 사용자들, 마녀 혹은 마법사들과 친하게 지내고 그들을 태워서 안전하게 다른 곳으로 보내주기도 하는 마수다.
마계의 전령으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황금의 관복을 입는 것이 허락된 마수 중 하나다. 그들 마수는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워낙 속도가 빠르기에 적으로 오인할 수 있었지만, 마수만이 수신할 수 있는 떨림의 언어를 쓰는 자가 공격하는 경우는 드물다.
눈에 보일 정도가 되자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건 무시무시할 정도로 긴 용의 꼬리였다. 말의 갈기처럼 황금의 털이 있는 용의 꼬리였다. 다만 비늘이 없었기에 진짜 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베르델레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아룡(亞龍)이라는 걸 과시하는 자들이다. 용에 버금가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놈들이다.
그 탓에 많은 이들이 베르델레트를 용에 비유하며 추켜세우며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써먹기 좋은 마수가 바로 베르델레트란 마수였다.
새까만 색이지만 윤기가 좔좔 흐르는 예쁜 까마귀 색을 지닌 날개 한 쌍을 펼치고 있었고, 푸른색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크게 흩날렸다.
그가 부유석에 섰다.
그는 바다색을 지닌 미남이었고, 손가락과 발가락에 물갈퀴가 보였다. 팔과 다리에만 푸른빛을 띤 피부를 하고 있는 데다가 허벅지에는 비늘이 붙어있었다.
그 비늘을 떼어내는 경우도 있고, 그냥 놔두는 경우도 있다. 황금의 관복을 입었기에 이 베르델레트가 비늘을 관리하는지 방치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높고 곧게 뻗은 흰 뿔은 거추장스러울 정도였고, 대단히 길면서도 바짝 서있는 토끼의 귀는 모습과 맞지 않아서 인위적이었다.
뱀의 혓바닥이 삐져나와서 주변 냄새 분자를 먹었다. 습관이다.
“오랜만입니다. 박동택 미노타우르스님.”
“모린 나이그(Morin naig)! 그대도 잘 지내는 것 같군. 요즘 중하위 차원은 어떤가?”
“여전히 번잡스럽습니다. 사건, 사고도 잦고요. 아무리 마신님께서 지배하고 있는 차원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왜 마수가 아닌 다른 종족들을 받아들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입니다.”
“해답을 안다고 해서 그 의문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은 질문이군.”
“하하하. 그렇습니까?”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박동택을 보며 베르델레트, 모린 나이그가 괜히 웃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문서를 꺼내 그에게 건네줬다. 이를 박동택이 받아 들었다.
그 문서에는 영광스러운 마신에게 받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명령서군.”
단번에 서류를 훑은 박동택이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모린 나이그가 물었다.
“뜻밖이라고 생각하고 계시군요.”
“그럴 수밖에. 나는 이미 이름을 받은, 끝에 닿은 미노타우르스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베르델레트라 불리는 마수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에 박동택이 조금 더 풀어서 말해 줬다.
“내 후배들에게 공을 빼앗는 일이다. 그러니 나는 상위 차원에 살아가고 있는 거다.”
“아하. 그럼 은퇴를 하신 겁니까?”
“그렇지. 미궁을 관리하고 지내는 게지.”
그게 미노타우르스의 생태계였다.
마신에게 이름을 하사받으면 거기서 만족하고 물러나 다른 후손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끝없이 공을 탐하면 안 된다. 그래야 최대한 많은 미노타우르스가 높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규모가 클수록 그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한 마리의 미노타우르스가 고꾸라져도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박동택 미노타우르스는 이미 마신의 왼팔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했기에 실패할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 옳았다.
거의 만장일치로 그 시스템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긋났다.’
명령서를 확인한 박동택은 그렇기에 당황했고, 의문을 표정에 드러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이름은 박동택이다. 파괴의 미노타우르스라 불리는 자다. 다른 미노타우르스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계략을 쓰는 미노타우르스로 전공을 세웠었다.
한국 사람이 들었다면, 미사일이 생각나는 이름인 만큼 독특한 스타일을 지닌 게 박동택이었다.
‘그런데 나를 지목했다? 실수일지도 모른다.’
곧장 명령서를 이행하기보다는 관련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도 몰랐다.
“괜찮으십니까? 표정이 많이 안 좋습니다.”
“괜찮다. 50년 만에 명령서를 받으니, 감회가 새롭군.”
“축하할… 일이지요?”
“하하하!”
주저하는 그를 보며 미노타우르스가 크게 웃었다. 척 봐도 3m에 달하는 거체다. 절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신장(魔神將)처럼 강한 전투력을 지닌 건 아니어도 준수하고 다재다능한 것이 미노타우르스였다. 그저 지략가라 여기는 건 어리석다.
마신의 왼팔이라고 불릴 정도면 머리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가히 모든 분야에서 특출나야 했다. 그런 공부를 하려면 수백 년이 걸려도 부족하지만 미노타우르스는 가능했다.
그게 바로 ‘미궁’이다.
어찌 되었든 박동택은 명령서를 받아 들고 하늘 위로 쭉 내뻗으며 외쳤다.
“위대하신 마신의 명령서를 받드나이다! 제가 쌓아 올린 모든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마신의 위상을 드높이겠나이다!”
“끝없는 어둠 속에 마수들의 세상 있으리!”
베르델레트가 뒤이어서 마신을 칭송했다.
“점심은 먹었나?”
그 이후에 박동택은 베르델레트를 집에 초대할 생각을 가졌다.
“초대에 감사히 응하겠습니다.”
“식사하면서 적합자들이 어떻게 투쟁하는지 구경하고 가게. 큰 경험이 될 거다.”
“감사합니다.”
돈 주고 보는 게 미궁의 추첨자, 적합자들의 투쟁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특히 마신으로부터 이름을 받은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에는 쟁쟁한 이들이 도전하기 마련이다. 물론 하찮은 추첨자가 들어서기도 한다.
누군가가 아름다운 백색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면, 누군가는 그 스포트라이트를 바라보는 조연이 되어야 했다.
* * *
“선택하시죠. 무엇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합니까.”
에레쉬키갈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인간은 포기할 마음 없이 양피지에서 뇌로 즉각적으로 스며들어 오는 정보를 모두 훑는 기행을 벌였다.
오랫동안 추첨에서 살아남았기에 성숙하고 쉽게 흥분하지 못하는 나이가 된 인간이었다.
“전 한순간의 힘을 선택하겠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힘이 될 수 있지.”
에레쉬키갈이 인간을 이해하며 양피지를 움켜쥐고, 힘을 쏟아냈다.
양피지가 소모되며 흑요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것이 마신석(魔神石).’
마신석은 온갖 것에 사용된다. 가히 만능의 물질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인간은 모른다.
“꿇어라. 경배하라!”
그 외침에 그가 서둘러 무릎을 찍고, 이마를 땅바닥에 찍었다. 피가 흘러내렸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아팠다.
“으윽.”
너무 강하게 찍어서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형편없는 모습에도 에레쉬키갈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받아먹어라. 이것이 마신님의 살이며, 피다.”
그녀는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귀에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달콤한 향기가 맡아지고, 뜨끈한 입김이 귀를 간지럽혔다.
단지 속삭이는 것뿐이었음에도 그는 사타구니가 벌떡 서는 걸 느꼈다.
마신석을 양손으로 받아서 입에 욱여넣었다. 보석처럼 보였지만 뾰족한 부분이 입에 닿았음에도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녹았다.
등급이 낮은 마신석이었지만, 인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용솟음치는 힘을 느꼈다. 그 힘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필요한 때에 나타나서 그를 도와줄 것이다.
“이제 미궁에 들어가라. 미궁의 선택을 받고, 그곳에서 살아남아라. 싸운다면 얻을 것이고, 죽는다면 잃을 것이며 도망친다면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군인정신으로 잔뜩 무장해야 할 존재도 빤스런을 치는 세상에서 태어났던 마신은 빤스런을 가장 싫어하는 존재 중 하나였다.
저벅. 저벅.
철컹. 철컹!
그가 거침없이 미궁 속으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어둠에 잡아먹혔다.
* * *
미궁에 들어서서 그는 정처 없이 걸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가 내는 철 소리는 멀리멀리 메아리처럼 울렸는데, 그 덕에 굉장히 큰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갑옷을 벗을 수는 없었다.
‘제기랄.’
부상에 대한 공포. 방어력이 감소하면서 생기는 전투력 감쇄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소음을 내는 갑옷을 못 벗도록 만들었다.
‘어.’
그런 그는 언제 공격당할지 몰랐지만, 그 인간은 제법 운이 좋았다.
그는 미궁에 있는 함정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는데, 워낙 긴장한 덕분이었다. 조금 질감이 다른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색감은 똑같지만, 확실히 다르다.’
아주 조그만 차이였다. 자세히 보면 거칠지만, 언뜻 보면 똑같았다. 색감이 같고, 재질 또한 똑같은 돌이기 때문이다.
그 덕에 그는 간사한 계략을 쓸 수 있었다.
‘이걸로 미궁에 방황하는 놈 하나를 조져볼까.’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어떤 함정인지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미궁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정인 것은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 함정으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주변을 경계하며 창을 든 채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곧 그처럼 방황하는 미궁의 거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추첨자 또한 미궁에 들어서는 순간, 미궁의 거주자가 된다.
“크르르르……!”
그건 곰이었다. 네 발로 걷고 있었기에 작아 보였지만, 벌떡 일어선다면 그보다 머리 두 개는 클 것이다. 거기에 두툼하기 짝이 없는 앞발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와라! 이 개 같은 새끼야!”
마신의 차원에 태어나 미궁으로 들어온 인간이 고함을 질렀다.
곰은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제법 느렸다. 탐색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전에 함정이 발동되었다.
화르르르!
이글거리는 화염이 쏟아졌다. 그곳에 노출된 곰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속에서 인간은 달려드는 판단을 했다.
화염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곰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용솟음치는 힘이 갑자기 생겨났다. 마신석을 하나 먹고 생긴 힘이었다.
단번에 창을 찔렀다.
‘머리를 노린다!’
한 방에 죽일 생각을 가졌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촤악!
가죽이 찢기고, 뼈에 창이 닿았다. 두개골의 둥근 부분에 창끝이 부딪쳤고, 그대로 미끄러졌다.
‘윽?!’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창은 머리를 지나쳐 옆부분을 주르륵 베고 지나갔다. 그리고 곰이 순식간에 달려들어서 그의 목을 물었다.
“악!”
곰은 거칠게 고개를 털었고, 인간은 수수깡처럼 흔들리더니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충격이 전신에 퍼졌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갑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릿했고, 힘이 제대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움직이고 싶었는데 누가 꽉 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붕 뜬 채로 날아가 전봇대에 부딪혔을 때 꼼짝도 못 하는 것과 같았다.
화상을 잔뜩 입은 곰이 거칠게 숨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대로 팔을 물고 늘어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강철을 이빨로 뜯지는 못했지만 한 발로는 몸을 누르고, 팔을 잡아당기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고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죽을 수는 없다.
인간의 고통 소리가 미궁에 울려 퍼져나갔다.
쇼크로 인하여 죽은 인간의 몸이 미궁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무튀튀한 손이 튀어나왔다. 물컹거리는 검은 슬라임 같은 것이 꿈틀거렸는데 곰이 이를 냉큼 물어서 집어삼켰다.
곰의 몸이 회복되고, 털이 조금 더 검게 변했다. 동시에 혓바닥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그 침의 색깔은 녹색에 가까웠고, 바닥에 떨어지자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곰이 다시 미궁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미궁에 스며들고, 미궁에 살아가는 모든 것은 정보가 되어 미노타우르스에게 녹여지고 있었다. 이 미궁은 미노타우르스의 몸 속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