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화
드낙이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을 확인했다. 단순히 카르마를 사용하는 게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악마가 본래 지닌 힘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업이 아닌 또 다른 힘이었다.
차원을 지배하고, 별을 파괴하는 초월 종족이 바로 악마였다.
‘전력을 다한다. 악마가 가지는 진정한 힘!’
그저 모으고 모아서 악마가 된 흑마법사와는 달랐다. 진정으로 자격을 얻은 자가 바로 드낙이다. 그 차이는 컸다.
‘거기에 나는 카르마까지 사용하면 그만이지.’
차원을 지배했고, 계속해서 드낙에게 주입되는 업(業) 또한 대단히 높은 수준이었다. 사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드낙은 사용했다.
그는 다른 악마와는 달랐다. 신으로 향하는 길까지 열어두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신과 악마. 두 가지의 길을 모두 걷고 있는 게 드낙이다. 그 모순에서 오는 압도적인 힘을 마주한다면 모두가 놀랄 터였다.
중립신이 드낙을 죽인다는 계획을 미리 세워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신은 걷지 못한 길에 대한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그것은 수많은 근거 중의 하나였다.
‘산을 움직이는 도마뱀.’
그게 드낙이 맨 처음 구상한 것이었다.
길쭉한 도마뱀의 높이는 15m가 넘었고, 그 길이는 100m가 넘었음에도 계속 자라났다. 무려 300m가 되어서야 멈춰 섰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지룡(地龍)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 도마뱀의 울퉁불퉁한 피부가 움직였다. 피부는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계속해서 등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등에는 굵직한 척추뼈의 양옆으로 살이 움푹 들어가 있었는데, 흙을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소멸시킬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현대 지식도 썼지.’
드낙이 속으로 웃었다. 그건 바로 드릴이다. 수많은 미디어에서 모습을 드러낸 뾰족한 원뿔 형태를 지닌 드릴은 인류 과학의 정점이다.
“크어엉!”
도마뱀이 된 드낙이 고함을 지르며 단번에 드릴처럼 변한 앞발을 들어 올려 내려찍었다. 생체 드릴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지만 빠르게 돌아가면서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이거지!’
흙이 파헤쳐지고, 나무가 부서졌다. 새들이 날아오르며 두려움에 떨었다.
‘흐흐흐! 이게 바로 드릴의 힘이다!’
드낙이 웃었다. 피부를 타고 흙과 부서진 돌 따위가 올라갔는데, 금방 차올랐다.
‘어엉?’
생각보다 흙을 운반하는 건 많은 역량을 요구했다. 일단 무게부터가 큰 문제였다.
‘이거 안 되겠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너무 무거웠다. 땅이라는 건 얕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끝낼수록 이득인데. 이거 안 되겠다.’
고속도로를 한 번 뚫어놓으면 100년을 간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이득이 생긴다. 그 공공가치는 경제적으로 시작해서 문화적으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대단하다. 지금도 이와 같다.
‘무려 100억 식량이다.’
산맥을 지우고 싹 다 평야로 만드는 일이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거기서 나오는 곡물, 과일, 고기! 어마어마할 것이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흙을 가져가는 건 다른 놈들에게 맡겨야겠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운반 따로, 파괴하는 것 따로 해야 했다.
두두두두두! 콰드드득!
“크으!”
피가 튀고, 뼈가 분쇄됐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통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드낙은 인상을 가득 찡그렸다.
‘드릴이 뭐 이따위야?’
아무리 악마의 뼈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드릴의 끝은 뾰족했다. 그게 문제였다. 그 부분만 빠르게 닳더니 악마의 뼈까지 분쇄되어 버렸다.
괴이하게도 드낙이 힘을 주면 줄수록 압력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 때문에 악마의 뼈가 악마의 힘으로 가루처럼 갈려버렸다.
‘황당하군.’
문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악마의 뼈였다. 그 뼈가 분질러진 것이다. 하찮은 바위 따위에게. 손뼉이 부딪쳤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수백km의 속도로 달리는 오토바이의 브레이크가 나무막대처럼 닳아버리는 광경과 비슷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현실이 되었다.
‘드릴이 이토록 단점투성이의 무기였다니.’
이런 거로 산에 터널을 뚫는다? 어리석어 보였다.
하지만 분명 현대는 산에 터널을 뚫어냈다. 인터넷이 있었다면 그 해결법을 간단히 찾았겠지만, 드낙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드낙은 일단은 멈췄다.
겨우 6m 정도만 팠는데도 뾰족한 드릴이 바위에 틀어박혔다. 가속을 대단히 한 덕에 뼈까지 살짝 갈려버렸다. 드낙이 지닌 근력 때문이기도 했다. 흙을 퍼 올리던 것도 뭉개버렸다.
‘이런 방법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고민하던 드낙은 다양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한 방법은 뜨거운 물을 쏟아내는 일이었다. 마력은 넘쳐났다. 흙은 빠르게 처리할 수 있어 보였지만, 뒤처리가 감당이 안 되어서 포기했다.
그다음에는 육체 변이를 통해서 식물의 뿌리가 바위를 쪼개버린다는 문과 같은 방식을 시도했다. 제법 재미를 봤지만, 그마저도 산을 이기는 건 어려웠다.
‘이것도 아니다.’
드낙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효율적인 방법이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과의 마음으로…….’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회에 나가서 쓴 거라고는 사칙연산뿐이지만, 이과는 분명 세계에 필요한 과목이 틀림없었다.
‘그걸 인정하는 거다.’
드낙은 이내 눈을 떴다.
‘드낙이 뾰족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건 드릴인가?’
드릴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시도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현대인이 만든 뾰족한 드릴을 포기한다는 건 보통 힘든 결정이 아니었다. 분명 과학적인 드릴이 맞는데,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건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뾰족한 드릴은 산을 뚫는 데는 형편없다는 것을……!
이를 인정하고 드낙은 다시 한번 육체 변이를 했다.
도마뱀의 앞발이 변형되었다. 뼈와 근육이 서로 뒤엉켰다. 조이고 풀리고 이완하고 수축했다.
그 단면은 평평했지만, 속에 큰 바위가 들어갈 구멍. 작은 바위가 들어갈 구멍. 자갈과 흙 따위가 들어갈 작은 길들이 가득 자리잡혀 있었다.
근육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끝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앞발이었다.
이를 드낙이 땅에 박아넣었다.
쿠드드득…….
단단한 흙에서 흉악한 소리가 나며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서서히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드낙이 천천히 앞서 나갔다. 그리고 그 팔뚝의 관절 뒤로 부서진 흙이 뿜어져 나왔다.
드낙은 순식간에 밀고 들어가며 산맥에 터널을 깊게 뚫고, 반대쪽에서 튀어나왔다.
“크응.”
‘이게 되네. 무슨 차이지?’
뾰족한 건 금방 갈렸지만, 느리면서 넓적한 팔은 터널을 뚫고 나서도 멀쩡했다. 아무래도 뾰족할 때는 압력이 너무 집중돼서 그랬고, 지금은 뭉툭해서 가능한 일인 듯했다.
드낙은 산에 터널을 뚫으며 산 자체를 붕괴시켜 나갔다.
반면, 다른 곳은 더욱 곤욕이었다.
“땅이 이렇게 단단하다니……?”
“다, 단순한 흙인데도 이 정도라고?”
무게에 의해서 단단히 압축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흙은 돌덩이나 다름없었다. 인력으로는 가히 불가능한 일이고, 마법사나 주술사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효율이 떨어졌다.
그런 소란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는 고블린이 있었다.
그들은 ‘지하 연합’ 소속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검은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가슴팍에는 도금된 지하 연합의 문양이 그려진 브로치를 끼고 있었다. 등판에도 마찬가지였다. 깃발 하나도 옆에 척 걸고 있었다.
검은색 일색의 깃발. 깃대조차도 검은색이었으나, 검회색의 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이는 마치 진흙과 같았고, 우둘투둘해서 손으로 잡기도 편하다. 지하 연합의 독특한 깃발은 특이한 것이 많았다.
고블린은 서둘러 무언가를 메모하고, 기록하고 있었다. 종종 수정구를 들어 올리기도 했는데, 괴이하게도 그 수정구의 테두리는 절반이 구리로 뒤덮여 있었고, 거기로부터 여러 구리 선이 뻗어 나와 배낭으로 향하고 있었다.
최대한 많은 영상을 기록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이들은 지하 연합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가장 낮은 지하 연합의 일원조차도 그 권력이 맞닿아 있었다. 거기에는 그들의 신앙심이 깃들어있었다.
‘모든 지하 연합의 목숨은 오로지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신을 위해서 있다!’
그런 귀중한 목숨을 다른 이들이 침해하고, 짓밟는다? 억압한다? 신성모독이었다.
마법사들은 불편한 기색을 하면서도 고블린을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고블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이에 호기심을 지닌 마법사가 고블린에게 다가갔다.
“보통 수정구만 들고 다니고, 오래 있지도 않던데. 지하 연합 내에서 뭔가 바뀌었습니까?”
대단히 정중하게 물었다. 의문을 반드시 풀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에 고블린 또한 웃으며 대답했다.
“지하 연합의 새로운 사업입니다. 오직 지하 연합에서밖에 할 수가 없죠.”
자부심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블린이 종이 뭉치를 건넸다. 조금 두꺼웠고, 무거웠으며 꺼끌꺼끌했다. 대단히 저급한 종이었다. 오히려 투박해서 둔기로 쓸 수도 있을 법했다.
“이게 뭔가?”
“언더그라운드 타임즈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사고들, 소식들을 적어놓은 신문이라는 겁니다. 저는 신문기자고요. 취재하고 다니고 있죠.”
마법사가 종이 뭉치를 훑었다.
1면에는 당연히 드낙의 중대 발표가 떡하니 있었다. 그리고 우측 구석에는 얇고 길쭉하게 소식이 적혀져 있었다.
「크레시미르 왕자가 떠나고, 다이앤타 공주가 남았다.」라는 사설이었다.
대단히 흥미로웠다.
1면을 단번에 훑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걸 고블린이 막았다.
“동화 3닢입니다.”
“동화 3닢?”
“예.”
“흠…….”
마법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싼값이다.
냉큼 품에서 동화 3닢을 건네줬다. 껌값이나 다름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싸지?”
“일단 저급한 종이를 썼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벌목이 성행한다는 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 그렇지.”
“그러니 쉽게 매입할 수 있지요. 하하하하!”
아주 간단명료한 말이었다.
“그걸로는 좀 부족한데. 이토록 싸게 한다고?”
“사실은…….”
고블린 기자가 두리번거렸다. 마법사도 절로 고개를 숙였다. 고블린의 키가 작아서다. 얼핏 보면 어린애처럼 보이는 게 고블린의 작은 키다.
“가구의 자투리 나무를 얇게 펴서 종이로 만드는 특별한 제조법도 있습니다.”
“나무 찌꺼기로 종이를……?!”
그가 놀라워했다. 말 그대로 쓰레기 같은 거로 종이를 만들고 있었다.
“놀라기는 이릅니다. 국가에서도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화 3닢에 신문 한 개를 구매할 수 있지요.”
아직도 이 세상의 미디어는 보급률이 낮았다. TV를 제작하려고 해도 그 모든 인프라가 구축되어야만 했다. 송전탑을 짓는 것도 이런저런 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태이니, 할 말 다 했다.
그 덕에 지하 연합의 「언더그라운드 타임즈」가 기회를 잡았다.
오지나 소식이 바로 전달되지 않는 곳. 세상과는 담을 쌓았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고 싶은 이들.
그리고 테라에 속해 있으면서도 중요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는데, 신문을 통해 알게 되는 것. 이는 큰 이득이었다.
도시에 있는 TV는 온종일 볼 수도 없다. 광장에 있는 TV로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도 볼 수 없고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덕에 언더그라운드 타임즈는 조용히 구독자들을 늘리고 있었다. 매달 구매하겠다고 한 사람들도 많았다.
혹은 심심해서 신문을 구매하기도 했다. 대중예술 진흥을 위해서 예술가들의 노력도 몇 쪽 담기 때문이다.
난잡해질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신문에 담아낼 수 있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 그만이다.
지방마다 버전도 다르기도 했다. 인간은 인간대로, 오크는 오크대로였다.
지하 연합은 국경을 뛰어넘어 모든 지하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손쉬운 일이었다.
예외도 많았는데, 작은 마을에는 그 나름대로의 소식통을 담았다. 누가 출산을 했고, 누군가가 생일을 맞이했다는 등, 지역 커뮤니티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간사하게 신문 속에 드낙에 대한 호감을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지하 연합이 「언더그라운드 타임즈」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신문 1부가 고작 동화 3닢인 이유 중의 하나는 드낙에 대한 뒷공작이 가능해서였다.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