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화
1. 100억 프로젝트 (1)
드낙은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 무엇도 없는 허허벌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땅에 고저 차가 없고, 죽은 것처럼 회색이었다. 거무죽죽한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과 색이 비슷하여 하늘과 땅이 구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친 바람이 그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알 수 없는 허망함이 드낙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깜빡인 드낙은 어느새 깜깜한 밤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어?’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달빛이 내려오고 있었고, 식량 창고로 보이는 곳에 고블린이 굴을 파고 있었다. 인간이 어렵게 모은 식량을 가져가려는 간악한 짓거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과 고블린이 드잡이질을 했다.
드낙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면서 눈을 떴다.
* * *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드낙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일어났다. 초월적인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세계에서 그는 성공했다. 그 끝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평화로운 나날 속에서도 드낙은 종종 악몽을 꾸곤 했다.
덧없는 인간 시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했고,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언제까지 이런 꿈을 꿔야 하는지.’
악마(惡魔)의 격(格)에 올라선 드낙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는 초월자다. 세상의 지배자이며, 차원의 주인이다.
천장에서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놀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존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낙의 감각을 속일 존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거의’라는 말은 이 세상이 그다지 개연성이 없어서 그렇다.
언제 세파리아스 불파겐 같은 괴물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그런 놈이 인간이라니, 세상도 참…….’
황당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세파리아스라는 존재였다. 드낙은 초월자에 올라섰음에도 그와 생사결을 벌여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다만, 세파리아스 또한 그를 죽이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그 둘은 서로 협력하고 지금까지도 굳건한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떨어진 존재는 곧 형체를 만들어냈다.
호흡할 때마다 피처럼 붉은 숨결이 뱉어져 나왔고, 등에는 뿔이 솟아나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풍채가 좋은 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 숨결 검은 뿔 쥐는 살이 잔뜩 찐 뚱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냉철한 눈동자와 듬직한 앞니는 정예병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찍찍. 우리들의 살아 숨 쉬는 신을 뵙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나?”
“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문제가 생겨서 날 찾아온 것이겠지?”
“예.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악몽을, 꾸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괜찮다.”
드낙의 말에 뿔 쥐는 더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이다.
‘신의 말씀이시다.’
무조건 따라야 한다.
“무슨 문제가 생겼지?”
“송전탑 및 전선의 토목 공사 때문입니다.”
‘우주 전쟁 1’.
그 게임을 통해서 E 스포츠를 부흥시키고, 관전하는 재미, 그 파이를 크게 만들려는 드낙의 야망은 쉽게 이루어질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었다.
‘새로운 것의 창조다.’
강철의 비와 맞물려서 더욱 어려워진 것이 E 스포츠였다. 특히, 기존의 세대는 밖에서 무언가를 함께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만 E 스포츠는 관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게임을 잘하는 게 뭐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모든 문화는 의미가 없다.
결국, 인간은 멸하는 존재이기에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 채로 살아가야 한다.
세파리아스가 전쟁에 미쳐있는 것도, 하나의 의미이며 게임에 목숨 거는 것도 하나의 의미였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라.”
“노동력이 부족합니다. 이대로 둔다면, 5년이 가도 부족합니다.”
뿔 쥐가 종이를 꺼내서 그에게 전해 줬다.
드낙이 이를 받아 들어서 훑었다.
‘전체적으로 진행률이 대단히 낮다.’
특히 구리 채광량이 전선의 제작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고무도 부족했다. 드낙은 이것이 ‘동화’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화폐로 동화를 쓰다 보니, 전선 자체를 많이 생산할 수가 없군.”
“예.”
비단 그것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종족 연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건축산업은 개돼지가 해도 떼돈을 번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물론 그만큼 세금을 많이 내지만 부자가 되는 건 피할 수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는 소리지.’
인구가 증가하면 사람에게 필요한 의식주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다. 집을 짓고, 다리를 놓고, 땅을 다지고, 건물의 층수가 높아진다.
‘그렇게까지 넓게 안 봐도 된다.’
내 집 마련의 꿈.
그것만 봐도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집을 가지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종족 연합은 인구가 폭증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고, 그 덕에 토목산업은 아직도 인력이 부족했다. 너무나도 많이 지어지고 있어서였다.
‘억지로 바꿀 수는 없다.’
어느 한 곳의 인부들을 옮길 수는 없었다. 그들이 짓는 집에 들어갈 시민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계속해서 도시에 늘어나고 있는 슬럼가를 처리해야 하는데, 시민들의 거주까지 엉망으로 된다면…….
‘걷잡을 수 없지. 내가 할 일이 많아져.’
드낙이 직접 못질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1990년대 옛날 영화를 봐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올라간 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였다. 못질하려고 그 힘든 여정을 걸은 것이 아니었다.
힘든 만큼 그는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는 보상을 원했다. 모든 삶에 대한, 다른 이들과는 확연하게 차별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게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해결 방법은 고민하고 있을 텐데?”
드낙에게까지 올라온 안건이니 엘리트들도 벌써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이에 뿔 쥐 정보원이 즉답했다. 그에 대한 질문을 벌써 예상하고 답안지를 준비한 상태였다.
“게제라스 총리는 결국 인구 조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사람의 가치를 높이려면, 인구가 줄어들어야 한다. 인구가 많으면 사람은 가치가 없어진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다.
만 원 주고 사람을 구해야 하는 동네와 십만 원을 주고 사람을 구해야 하는 동네의 차이는 결국 인구 차이다. 사람이 귀하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람에게 돈을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지배자 입장에서 보자면 아쉬운 일이다.
‘대악마의 공세가 예정되어 있는데, 인구를 줄일 수는 없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군대가 많아야 한다. 군대는 인구가 보장되어 있어야 가능했고, 특히나 세력이 가진 보급과 관련이 깊었다.
보급을 높이려면 경제 발전을 크게 이룩해놔야 했다. 100만 톤의 식량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의 성장을 만들어놔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구, 끝없는 인구가 필요했다.
그런 드낙의 생각은 대단히 잔혹했다.
배고픈 자들, 노동자 계급의 대물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금을 쏟아부어서 최대한 사람 같은 삶을 살도록 지원이 되고 있었지만, 끝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게제라스 총리는 인구 조정을 원하고 있었다. 다만, 그러려면 드낙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생각할 정도로 사람들의 삶이 팍팍한가 보군.’
“후우우. 식량 사정이 안 좋나?”
“그건 아닙니다. 지하 연합의 식량으로 전 세계의 굶주림을 타파할 수 있습니다.”
드낙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떻게?”
“벌레입니다.”
“아……. 그 고소한 가루…….”
“예.”
고소하고 고단백질의 가루.
수많은 이들이 애용하며 먹는 것이다. 뽀얀 가루라서 혐오감도 적었다. 벌레라는 걸 알고 있어도 계속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결국 돈 아니겠습니까. 게제라스 총리는 인간입니다. 지하 연합이 식량 판매를 통해서 벌어들이는 돈을 생각한다면, 헉 소리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균형이 무너졌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뿔 쥐 정보원의 말에는 가시가 단단히 돋아나 있었다. 종족이 다르고, 서로서로 견제하고 경계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까지는 막을 수 없지.’
드낙은 피를 흘리는 것만 금지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는 끝없이 불만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게제라스 총리도 지하 연합의 식량을 규제할 수는 없었다. 식량 부족에 직면해서 식료품 가격이 크게 오르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위하는 게제라스 총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뿔 쥐는 한 번 건드리면 좋다구나 하고 달려들 종족이었다.
‘명분이 없어서 안 싸우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니까.’
항상 드낙이 지배하는 종족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생각하며 큰 자부심을 품고 있는 게 뿔 쥐였다.
뿔 쥐는 호시탐탐 인간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 했다. 그 판을 열어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 외에 수많은 근거를 생각하면, 어려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게제라스 총리는 딜레마에 빠진 채 드낙을 찾아올지도 몰랐다.
‘이런 딜레마가 생기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지.’
뿔 쥐 정보원이 드낙에게 소식을 전한 건 필연이었다. 그가 아니면 결국 균열은 커지고, 인간과 지하 연합 사이에서 경제 전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알겠다. 그 외에는?”
“그 외의 사건·사고는 자잘한 것뿐입니다. 모두 초월자이시자 우리들의 살아 숨 쉬는 신이시며 이 세계의 지배자께서 선정을 베풀고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뿔 쥐가 그를 찬양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이로운 건 드낙 덕분이며,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일들은 드낙이 있기에 그나마 가벼운 정도로 끝나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뿔 쥐 정보원이 물러가고 드낙은 자신의 계획을 점검했다.
‘E 스포츠는 욕심이긴 하지.’
전기를 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거기에 하나를 더 얹은 격이나 다름없었다.
대중예술의 발전만 해도 필멸자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끝없이 농업 골렘과 축산 골렘이 가축을 가꾸고 있었다. 박호훈이 살았던, 현대에 비하면 고깃값은 대단히 싸다.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었다. 슬럼가에는 고기 찌꺼기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푹 삶아 구호품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는 게 참…….’
인구의 증가는 압도적인 증가율을 보였다. 하지만 계속 그걸 안고 가야만 했다. 욕을 먹어도 그렇게 해야 했다. 이후에 있을 대전쟁에 패배하는 것보다는 욕먹는 게 낫다.
‘그 욕받이 노릇을 피하려면 문화의 힘을 빌려야 한다.’
퇴근하고 와서 바로 게임하기. 바로 강철의 비로 전투 한판 돌리기. 그런 거로 스트레스를 풀고, 드낙에 대한 불만을 씻어내는 것이다. 영화와 수많은 미디어를 보급하려면 번역 작업도 필요하지만, 전기가 보급되어야만 했다.
드낙으로서는 결코 물러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파동으로 변했다.
세상을 속이고, 순식간에 게제라스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스슥, 스스슥!
무언가에 대단히 열중하고 있었다.
드낙이 이를 훔쳐봤다.
[인간의 수입 식량의 비율을 줄여서 또 하나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지하 연합의 식량 침공 때문에 상위국이나 신제국이나 서서히 그곳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운반료를 생각하더라도 비효율성이 크다.]
[그 효율성을 바로잡는다면, 다종족 연합은 하나의 혁명을 이룩해 내는 것과 같다.]
운송업에 종사하는 여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셈이다.
게제라스 총리의 생각은 식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現) 다종족 연합의 당면 과제가 식량이라 보고 있는 것이다.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
“게제라스, 열심히 하는군.”
“아! 드낙 님.”
게제라스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의 뒤를 점하고 있던 드낙은 어느새 소파에 앉아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송전탑, 전선 제작 등 토목 공사에 많은 고민거리가 있다고 들었다.”
이에 게제라스 총리가 일어서며 말했다.
“드낙 님께서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기는. 진행률이 엉망이다. 아닌가?”
“걱정을 끼쳐드려서 면목이 없습니다.”
드낙은 그를 다독여줬다.
“널 탓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해결 방법은 여러 가지 생각해 뒀겠지?”
“식량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가 즉답했다. 그러나 드낙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건 다분히 ‘인간 위주의 의견’이라서였다. 물론 지하 연합의 식량 침공은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라 걱정할 만하다.
‘그래도 그건 다른 종족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지하 연합에 소속된 필멸자들은 하나같이 그 역량이 제각각이라서 벌레 농장을 가꾸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그걸 업으로 삼는 자들도 있었다.
수출이 줄어들면 그들의 벌이도 줄어든다. 그렇기에 경박하게 일을 진행할 수는 없다.
“다른 것도 듣고 싶은데.”
이에 게제라스가 즉답했다.
“매년 예정되어 있는 차원 침공 참전용사들에 대한 세수를 반절만 줄여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불가(不可)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오늘의 평화를 위해서 죽어간 자들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그들의 가족에게 끝없이 빚을 갚아야 한다. 생명의 빚이라 불리는 것을 계속 갚아야 했다.
그건 매년 속이 쓰릴 정도로 큰 손해로 보일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두 돈 반 차량에 태워서 퉁 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다음 세대가 전쟁에 나서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