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1026화 (1,025/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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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 500닢.’

산딸기 사제는 까마득함을 느꼈다.

3만 2천 명. 너무나 많은 숫자였고, 슬럼가의 인구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동시에 분노도 치밀어 올랐다.

“슬럼가의 사람들이 몇 명인지 알 정도의 행정력이면……. 그들을 도와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드낙은 천천히 술을 따라서 마셨다.

그 분위기 속에서 산딸기 사제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드낙에게 화를 낼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걸 자각했다.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건 그만큼 드낙이 산딸기 사제를 배려한다는 뜻이다.

거기에는 몇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임팩트있는 것. 그거 하나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건 중립신이 분명했다. 지금 드낙이 그의 이름을 묻는다면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신념이지.’

부러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뿌리는 ‘무명(無名)’에 있었다.

산딸기 사제는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이 행한 일들이 결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이름이 없는 사제였다. 그가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면, 그 누구도 그를 몰라볼 것이다. 1년만 지나도 그의 얼굴을 아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할 터다.

이름이란 건 그만큼 중요했다. 이름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데 필요한 ‘각인 효과’를 준다. 그렇기에 그는 산딸기 사제라 불렸다. 새로운 별명이고 대중들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도망쳤었지.’

그 이름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썼었다. 복장을 다르게 하고, 머리를 밀거나 기르고, 개의 털로 수염을 만들기도 했다.

‘철없던 시절이었다.’

산딸기 사제라는 이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직했었던 젊은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그는 그 이름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앞에 금화 500닢이라는 묵직한 놈이 다가와서 뺨을 후려쳤다.

‘이걸 왜 나한테 보여줬을까.’

3만 2천 명에게 한 끼를 주려면 금화 500닢이 필요하다.

드낙은 이를 그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저보고 돈을 벌라는 것입니까? 그런 말을 하려고 오셨습니까?”

적의마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 말에는 ‘자본’에 대한 흉포함이 깃들어있었다. 이를 본 드낙은 실로 딱한 표정을 지었다.

“잘 생각해라. 금화 500닢을 하루에 버는 자가 된다면 3만 2천 명을 하루에 한 끼를 먹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산딸기 사제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아버렸다.

괘씸해도 이렇게 괘씸할 수가 없었다. 만약 피 숨결 검은 뿔 쥐들이 이를 바로 옆에서 봤다면 신성모독을 외쳤을 터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를 본 뿔 쥐는 없었다.

모두 드낙 덕분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돈으로 사는 세상에서 살았던 드낙이었다. 특히 그는 돈을 경멸했다. 돈이 없었기에, 그열등감을 돈에게 풀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행복을 건네줬다. 대체로 그러했다.

부자가 망하는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망하는 것도 자주 못 본다. 애초에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바보 같은 생각이지.’

돈으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돈을 경멸하고 가볍게 보다니……. 강자(强者)가 되고 나서 더욱 깨닫게 되었다.

크게 보고 나서야 작은 것이 귀중해 보였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격언이 있지만 실제로 숲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높은 것에 서야 숲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모른 채 그 격언을 모두 안다고 말하는 이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동시에 그런 격언을 간사한 혓바닥으로 말하는 자들 또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신기루 같은 말을 하는 자들이다.

나무를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인간보고 숲을 보라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다.

산 정상에 올라봐야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다.

또한, 그전에 그렇게 하는 자는 남다른 자였다. 평균이 아니니, 평범한 범부에게 적용할 수도 없다.

“저보고 3만 명의 부랑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재력을 가지란 소리라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돈에 미쳐 살고 싶지 않습니다.”

“허어, 어찌 그렇게 돈을 싫어하는 것인지. 자네를 찾아온 건 그뿐만이 아닌데.”

드낙이 실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절절하게 느껴지는 아쉬움에도 산딸기 사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도 됩니까?”

드낙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되는뎅?”

드낙의 경박한 목소리가 산딸기 사제의 귀를 괴롭혔다. 이에 산딸기 사제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감히, 드낙의 앞에서 한숨을 대놓고 내쉬지는 않았다.

“표정 풀어.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야지.”

드낙이 짧게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에 산딸기 사제도 싱긋 웃었다.

그가 걸어온 시궁창 길만큼이나 자제력이 강한 게 산딸기 사제였다.

하나뿐인 딸을 전염 병으로 잃고, 과로에 아내가 죽고, 정신 나간 것처럼 구는 남자에게도 은혜를 베푼 사제에게 이런 일을 대처하는 건 우스운일이었다.

‘Yes맨이 되고, 그다음에 안 하면 될 일이다.’

하는 걸 보니 드낙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당장 상황만 피하면 된다고여겼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이번 기회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굴러갈 수 있다.’

이를 모를 드낙이 아니었다.

‘여기서 끝장을 본다.’

전쟁이 끝났다. 그 이후에 생길 전쟁은 30년이 더 남아있다. 그때까지 평온하게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모든 걸 지금 다 해결하고 싶었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공포가 으뜸이라 여기 는이들이 많지.’

문제는 그 공포는 가까이 있을 때나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매번 관리를 해야 공포를 통한 지배가 가능했다.

그런 건 드낙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세파리아스의 공포 정치는 실패했다.’

드낙은 성공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을 고통의 구렁텅이에 집어넣고 싶지 않았다. 드낙의 시작은 박호훈이었다. 그는 노동자 계급이었고, 사회의 밑바닥이었다. 그 본질 이 있었기에 더더욱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찮아도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드낙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걸 지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철인이 지배하는 세상은 철인의 희생으로 만들어진다. 그 철인이 조금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순식간에 타락하기 마련이다.

‘세파리아스가 그렇지.’

한 명이 무너지면 끝이다. 그의 곁에는 쟁쟁한 실력자들이 모이고 있다. 구심점인 세파리아스가 무너진다면 그 사자들은 서로 거칠게 이빨을 들이밀 것이 분명했다. 사자 왕이 사라졌으니, 새로운 사자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걸 막는다면 신제국은 무너진다.’

그런 체계를 만들었다.

‘무조건 세파리아스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런 체계도 필요하다.’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존재했다. 세파리아스의 신제국은 현재 단점이 거의 없는 국가였다. 범인(凡人)을 이해한 천재(天才)가 다스리는 땅이다.

‘단점이 시작된다면 그건 세팔이가 죽었다는 뜻이지.’

사회적으로든 진짜로든 그가 죽었을 때다. 그때가 되면 드낙이 나서면 된다. 그다음 사자 왕을 내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달은 언젠가 기울기 마련이다.’

세파리아스의 영광이 얼마나 오랫동안 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드낙은 그때가 올 것이라 믿고 있었다.

세대와 세대를 거쳐, 인간이 지닌 강력한 변수 속에서 태어난 또 다른 천재가 모습을 드러낼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런 일은 확실히 생길 터다.

이렇듯 드낙은 지배자들을 만들고, 그들 위에서 군림하고 싶어 했다. 수많은 정치체제를 용인하는 것도 그들이 지배하면서 생기는 여유로움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종종 썩은 물들을 정화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산딸기 사제에게 다가왔다. 그자는 정화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다.

“산딸기를 키우는 일을 한다면, 부랑자를 몇명이나 고용할 수 있나? 생각을 해봐라.”

드낙의 말에 산딸기 사제가 조용히 고민했다. 그저 만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산딸기를 키우는 일에 동원한다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산딸기 사제의 눈이 드낙에게로 향했다.

“설마……! 저에게 땅을 주실 생각입니까?”

자신은 하찮은 사제다. 가장 바닥이고, 가진것 하나 없었다. 오직 신의 말씀을 이어나가는 길을 걷기만 할 뿐이다. 그곳에는 그 어떤 이득도 없었다.

드낙이 제법 거드름을 피웠다.

“커흠. 이제 조금 구미가 당기나 보지? 나는 산딸기 사업을 통해서 많은 슬럼가를 처리하고 싶다. 그것도 매우 평화로운 방법으로…… 널 그 프로젝트의 첨병으로 쓸 생각이다. 할 마음이 있는가?”

“…계획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확답을 안 주겠다고?”

드낙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산딸기 사제가 냉큼 대답했다.

“지금 하던 것이 있어서……”

이를 버리고 확답을 줄 수는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드낙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식사한 것들을 치우도록 부탁했고, 종업원이 냉큼 치웠다. 간단한 안주가 새로 나왔다. 육포였다. 고기가 워낙 싸게 유통되다 보니 간단히 내주는 안주조차도 고기였다.

드낙이 육포를 뜯어먹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다 잘 된다니까. 내가 돈 크게 벌어줄 걸 지금 주는 거라고.”

얼핏 들으면 사짜 느낌이 날 정도였다. 돈 버는 일을 자기나 자기 가족에게 주지 남에게 줄 리가 없는 데도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

“어떤겁니까?”

“이스핀 백작이 드워프들을 상대로 술장사를 하게 될 거다. 그걸 도와주면 되는 일이다.”

“드워프를 상대로 술장사를…….”

산딸기 사제는 인간을 위해서 봉사해서 드워프에 대해서 잘 몰랐다. 이를 드낙이 간사한 혀를 놀려서 알려주자 단번에 산딸기 사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흥미로웠다.

동시에 드낙은 인간 찬가를 읊었다.

‘산딸기 사제에게 중요한 건 인간이라는 종족이다.’

그 종족 울타리를 결코 넘을 수 없었다.

“잘 들어라. 드워프들은 계속해서 많은 부(富)를 가져갈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계속해서 많은 돈을 가져갈 것이다. 사람들은 좋다고 드워프의 양산된 물건을 사면서 돈을 그들에게 가져다 바칠 것이다. 그 이후의 삶이 어찌 되겠느냐? 인간은 가난해지고, 드워프는 부유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결코 드워프가 만든 것을 뛰어넘지 못한다. 드워프의 손길이 가진 반영구적인 효과를 닮은 아티팩트를 만드는 건 엘프조차도 불가능하다. 인간이 드워프의 물건을 사면서 드워프에게 바친 돈을 다시 가져와 야한다.”

드낙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힘으로…….”

산딸기 사제가 중얼거렸다. 그건 또 하나의 신념이다.

“돈의 세계에서 돈으로 할 수 없는 건 없다! 그 돈으로 사람을 구한다면 너는 지금 하는 일보다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다. 처음 목표는 금화 500닢이 되겠군.”

“금화 500닢.”

“3 만명을 구할 힘.”

드낙의 말에 산딸기 사제는 강렬한 불꽃을 태웠다.

‘그럴듯하다.’

해볼 만했다.

“하겠습니다. 하게 해주십시오.”

“좋다. 그럼 짐을 싸서 국제 연합 도시로 와라. 거기서 이스핀 백작과 함께 행동해라. 이미말을 해두었다.”

“그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주 좋아하더라. 열정 있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에 크게 감동했다.”

산딸기 사제도 기분 좋게 웃었다.

‘이걸로 산딸기 사제는 훨훨 날아오르겠지.’

가장 알짜배기 사업이다. 사장도 이스핀이다.

‘이스핀은 망할 수가 없다.’

이스핀은 게으름을 피워도 기가 막히게 감각이 좋았다. 현대에서 태어났다면 단타로 유명한 펀드 매니저가 되었을 터다.

‘불법도 좀하고.’

돈 되는 곳을 쿡쿡 찌르며 단기적으로 목돈을 마련하여 떵떵거리며 살아갈지도 몰랐다.

이스핀에게 산딸기 사제를 붙여준 건 둘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드낙은 그 너머를 엿보았다.

‘사회적인 기업.’

베풀 줄 아는 기업이 되는 첫 사례가 될 것이다.

“신성력을 그대에게도 부여하겠다. 산딸기 산업을 통해서 많은 빈민을 구제하라.”

그 말에 산딸기 사제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가장 밑바닥을 향해서 걸어가겠습니다.”

산딸기 주를 만드는 회사의 부사장 같은 위치에 있겠지만, 산딸기 사제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드낙에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드낙은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간 곳은 안젤리카 에드윈이 거주하는 대저택이었다. 경비병들은 갑자기 나타난 드낙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그를 찬양했다.

“안젤리카 에오인 부인과 아메리코 불파겐을 불러라. 긴히 할 말이 있다.”

선택의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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