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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쥐가 물러났다.
그 외에도 지하 연합은 공을 하사받을 이들이 많았다.
논공행상은 대표자만 나와서 한 명 딱 받아가는 게 아니다. 말단도 나와서 작은 상이라도 받아 가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기득권층에게 알리는 중요한 행사였다.
“이등공신(二等功臣),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앞으로 나오라!”
와아아아아아!
신제국의 이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엘프와 오크를 뛰어넘고, 자신들의 황제가 선택된 것이다. 이에 다른 종족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들은 것이지만 그래도 실제로 이렇게 당하니, 불쾌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믿고 있는 반신이 이등공신이 되어 짜증이 피어올랐다.
세파리아스는 이미 황제였기에 왕관을 쓰고 있었다. 백금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장식은 없었다. 담백했다. 하지만 결코 싸 보이지 않았다. 테두리를 음각(陰亥U)하여 음영을 줌과 동시에 세련미가 돋보였다.
‘멋지게 차려입었네.’
붉은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순백의 망토, 검은색의 칠흑과도 같은 관복은 황금과 은으로 자수가 되어 은하수처럼 빛났다. 그 자수는 왼발 아래까지 쭉 이어져서 발목에서 끝난다. 독특했다.
자수의 형태는 드래곤이었다.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서 소화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세파리아스는 능히 소화했다. 오늘을 위해서 힘을 바짝 준 모습이었다.
이 모습은 확실하게 기록되어서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를 통해 다종족 연합의 모든 이들에게 무료로 배포될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보여주면 될 일이다.’
그게 세파리아스의 생각이었다. 시도하면 어느 정도 결과를 낼 수 있는 게 그였고, 그렇기에 남들과는 현격히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였다. 그 탓에 그는 실패했었다. 너무 잘 돼도 문제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걸으면 넘어지고, 조금이라도 늦게 걸으면 뒤처지고 인생의 타이밍은 맞추기 어렵다. 그 속에서 질주했던 세파리아스의 삶은 피로 점철됐다. 자신의 다리를 걸고 넘어지려는 장애물을 그 주먹으로 부수는 슬上그 끝에는 그저 파국만이 존재했다.
세파리아스의 잘 차려입은 복장만 봐도 그는 성공할 남자였다. 미친 듯이 성공할 자였다.
그는 당당하게 계단 앞에 섰다. 올라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장 쥐처럼 굴종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석상이었기에 더더욱 그런 자세를 취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드낙 또한 거리를 뒀다.
사석에서는 제법 잘 들러붙지만 공석에서는 서로 불편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세파리아스가굴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낙은 그걸 억지로 할 마음도 없었다.
‘달리는 말의 다리를 자르는 꼴이지.’
인성이 좋으면 실력도 좋다는 말은 옛날부터 개 같은 선비놀음이다. 실력과 인성은 아무관련이 없다.
세파리아스 같은 놈을 받아들인 이상, 그건 안고 가야 할 일이다. 최소한 배신은 안 한다는게 위안할 만한 것이다.
그렇기에 드낙도 대장 쥐와는 다르게 왕좌에 앉아서 턱짓했다. 게제라스 총리가 새로운 양피지를 펼쳤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에 대한 양피지였다.
“신제국의 황제는 차원 전쟁에 참여하여 적들의 침공을 육지에서 막아냈다. 숭고한 헌신으로 제국의 수도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이들을 막아냈다.”
그곳에서도 수천 명이 무공을 세웠다. 지금이곳에 있었다. 이를 지휘한 세파리아스의 공 또한 크다.
짝짝짝짝짝!
벌써부터 기립박수가 시작됐다. 이에 게제라스는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그 이후에 적의 본진으로 쳐들어가서 전쟁을 수행했고…….”
무언가가 하나 끝맺을 때마다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쳐주니 어쩔 수 없이 몇 번 쳐주었다.
“방어전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적들의 최측근을 회유했으며…….”
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소리가 퍼져나갔다.
드낙은 그를 치하하는 것이 끝난 뒤에 드낙이 일어났다. 그러고는 보좌관이 주는 깃발을 집어들었다.
깃발을 하사하는 건 그렇게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한 가문에서 여러 개의 깃발을 쓰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중에서 왕에게서 받은 깃발은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즉, 깃발을 내어주는 것 자체가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세파리아스는 이를 받지 않고 싶었지만, 다종족 연합에 속해 있다는 걸 드낙은 보여줘야 했다.
두 의견은 사전에 이야기되지도 않았다. 즉흥적으로 드낙이 내밀었다. 잡느냐, 마느냐. 공식 석상에서 뜬금없이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왔다. 보통이라면 당황했겠지만 세파리아스는 깃발을 받아들였다.
‘신제국은 다종족 연합에 속해 있다.’
그건 그거다. 세파리아스와 드낙의 관계는 동등하지만, 신제국과 드낙의 관계는 다르다.
실로 형편 좋은 생각이었다.
깃발을 받아 든 세파리아스가 쿡하고 웃었다. 도발하듯이 드낙이 깃발을 건넸지만 그 깃발의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런 곳에서 농담하다니, 미친놈인가.’
그 웃음 속에서 드낙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차원 전쟁을 되새기며, 나와 세파리아스의 우정의 표시다. 신제국은 이 깃발을 중히 여기 도록 해라. 어디 가서 자랑하지 말고.”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
세파리아스가 깃대를 쥐고, 깃발을 높이 세웠다. 검과 활이 교차하고, 아래에는 방패가 눕혀 있었으며 그 위로는 동식물이 뛰어가고 있었다. 그 동물에서 나오는 그림자가 굵은 붓으로 길게 한 번 그은 것처럼 거칠게 표현되었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에게 백금 50관과 금궤4천 관을 내린다.”
대장 쥐보다 못한 돈이었다. 많은 이들이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드낙은 무시했다. 생각해보니 게제라스 총리만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억지로라도 받도록 했다.
“또한 악마의 요람 가비노를 하사한다.”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세력 지배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지금은 고도를 높여서 작아지긴 해도 아직도 하늘에 보이는 것이 악마의 요람, 가비노였다. 그 대단함은 보고 또 봐도 새롭다. 그것이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손에 들어갔으니, 웅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차원을 침공할 수 있는 침공 권리를 신제국이 아니라, 세파리아스 불파겐에게 부여한다.”
동시에 다른 차원을 공격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했다. 드낙의 명령이 없어도 자력으로 침공할 수 있다. 이는 대단히 큰 권리다. 다른 이들이 전쟁에 혹해서 참여하고 싶어도 그 결정권은 세파리아스에게 있는 셈이다.
전쟁은 큰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수단이다. 중립신의 안배로 이 행성이 날마다 커진다고 해도, 인구의 급증 때문에 금방 포화상태가 될 터다. 그렇게 되면 싫어도 밖으로 팽창해서 나아가야했다. 그것이 필멸자의 숙명이다.
“차원 다리 건설 우선권을 부여한다. 이를 넘어서는 건 나, 드낙 불파겐이다.”
또한 드낙과 함께 차원 다리를 건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드낙은 지구의 우월한 문화를 맛보기 위해서 차원 다리를 건설할 예정이었는데 그와 반대로 세파리아스는 전쟁을하기 위한 차원 다리를 건설할 것이다.
차원 다리를 건설하는 데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건설하고 나면 차원 장벽이 의미가 없다. 효율적인 통로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들은 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드낙과 세파리아스의 관계를 지금 실감한 것이다. 둘은 서로 원수같이 보이고, 무시하고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그저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서로 싸우는 친구 두 명이 속으로는 서로서로 안부를 묻고, 돕기도 하는 사이인 것과 같았다. 남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격언이 생각날 정도였다.
다음은 삼등공신이 호명될 차례였다. 대부분 긴장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쉽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프지.’
그들은 전쟁에서도 활약했고, 전쟁하기 전에도 활약했으며, 모든 순간순간에도 활약한 세력이었다.
“삼등공신(三等功臣). 규르소모스는 나오라!”
오! 와! 아!
감탄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엘프가 호명되지 않아 그들을 제외한 이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엘프들은 ‘파견 엘프’라는 형태로 많은 곳에서 활약했다. 일류를 때려잡는 일류로서 활약했다. 그 엘리트들이 3등도 아니다? 큰반전이었다.
엘프들은 오히려 그런 반응에 콧소리를 내며 살짝 웃었다. 그들은 자진해서 가장 최하위권에 속하겠다고 말씀을 올렸다. 너무 많은 곳에서 활약하다 보니 자신들을 챙길 수 없게 된것이 컸다.
이제는 중심을 잡고,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찾아오기를 원했다. 그래야 엘프가 변할 수 있다. 종족이 지키고 있는 프라이버시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자신들의 도시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여 섞이며 계속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참고해야만 한다. 그게 엘프들이 자신들을 백색 빛 엘프(White Shine Elf)라고 새로이 지칭한 이유다.
감탄 속에서 규르소모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때, 소란이 일어났다. 이 자리에 참석한 오크전사 하나가 튀어나와서는 양탄자 위에 풀썩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명예를 외쳤다.
“아얄타아아아!”
그 양손에는 해풍에 건조한 거대한 돼지 허벅다리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얼굴색이 왜 저래?”
얼굴은 초록빛이 아니라 시뻘겋게 달아올랐는데 누가 봐도 취한 얼굴이었다.
“잡아내!”
드낙이 외치자 너도나도 오크 전사에게 달려들었다.
“우, 우하하하하하하!! 엘프 놈들아! 우리가 이겼땅!!”
끌려가면서도 혀를 꼬며 웃어대었다. 엘프들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게 처세술이다.
오크 전사는 계속 그렇게 되뇌며 건조한 돼지 허벅다리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면서 끌려 갔다.
드낙이 한숨을 내쉬었다. 게제라스 총리가 이에 다가와서 속삭였다.
“이건 편집할까요?”
“됐다. 다 보여줘라. 조작하면 무슨 가치가 있겠어? 그대로진행해.”
어차피 자신이 쪽팔리는 게 아니었다. 생각을 해보면 오크들도 좋아할 것 같았다. 은근히 무식한 오크들은 엘프들에게 열등감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류를 잡는 일류가 엘프들이었다.
배를 건조하며 오션 오크들을 도우면서 자존심이 많이도 긁혔을 터다. 거기에 이렇게 엘프들의 신경을 긁었으니, 술안주로 삼기 좋을 것이다.
‘5년은 내내 우려먹겄!지. 저 오크 전사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달성해냈다.
소란이 지 나가고, 규르소모스가 양탄자를 밟기 위해서 움직였다. 오크들이 온갖 소리를 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처럼 극명하게 엘프와 오크의 평가가 갈린 적은 없었기에 더더욱 좋아했다. 첫 번째 승리나 다름없었다.
규르소모스는 술 냄새를 풀풀 풍겼다. 하지만 걸음은 올곧았다. 거대한 육신을 지닌 오크대족장은 가릴 곳만 가리고 오크들의 타투를 여실 없이 다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강인함이었다.
규르소모스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종족연합의 위대함을 깨달았고, 적어도 오션 오크들은 드낙의 득을 크게 봤다. 엘프들을 파견시킨 것도 드낙의 입김이었다.
그 수많은 이권을 받고도 무릎 하나 못 굽히고 굴종하지 않는다면 호로 상놈의 개자식이다. 드낙은 이에 감동했다.
‘솔직히 내가 오션 오크라면 세파리아스처럼 나랑 동등해지고 싶겠지.’
평야를 지배한 오크는 대단한 인구 증가를 얻었다. 게다가 부족함을 느끼고 해양까지 진출했다. 그 세력을 생각한다면, 대가리가 불쑥높아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규르소모스는 오크를 대표한 삼등공신으로 불렀음에도 한쪽 무릎을 꿇어줬다.
‘중국만 생각해도 그렇지.’
가진 게 좀 많아지면 대가리가 굵어지기 마련이다. 베트남도 그러했다. 동남아에서 으뜸으로 여겨지는 듯하자 대가리가 굵어진다.
사람도 그렇다. 돈이 좀 많아지면 겸손해지지 못한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을 표현하는 데있어서 객관성, 지성만을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인간은 본성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오크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오크는 더하지.’
녹색 도끼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말해 주는 종족신을 가진 오크들은 인생을 정말이지 화끈하게 산다.
그런 오크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줬다. 공식 석상에서 그렇게까지 해준 것은 오크들이 완전히 다종족 연합과 협력하기를 원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종교로는 녹색 도끼를 따르면서도 다종족 연합과 함께하고 싶음을 보여준것이다.
이에 드낙은 세파리아스 때와는 다르게 또게제라스로부터 양피지를 받아 들어 규르소모스를 대우해 줬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극명한 차이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걸 깨닫게 해줄 것이 분명했다.
‘기브 앤 테이크.’
그것만큼 신뢰성 높은 행동도 없었다.